10·26 증인 심수봉 “김재규 ‘버러지’ 발언 없었다”… 굴곡 겪으면서도 용기있게 증언[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장재선 전임기자 2026. 10. 1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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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심수봉은 경영학도였다. 심민경이라는 본명으로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나가 '그때 그 사람'을 불렀을 때, 그는 명지대 경영학과 3학년생이었다.

그러나 2011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합수부의 강요 때문에 그런 증언을 했으나, 김재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날 심수봉은 트로트 발라드인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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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 (24) 심수봉 ‘그때 그사람’ <상>
1979년 ‘궁정동 안가 만찬’서 박정희 살해사건 목격
“총성 울리는데도 대통령은 정자세로 앉아 ‘난 괜찮아’”
김재규 법정진술 진실처럼 알려져… 沈 “완전한 창작”
사건이후 방송출연 금지·정신병원 감금 등 갖은 고초
1979년에 발표된 심수봉의 공식 데뷔 앨범. 10개의 수록곡 중 타이틀곡 ‘그때 그 사람’이 A·B면 둘 다 첫 트랙에 실렸다. A면은 오케스트라 반주곡이었고, B면은 대학가요제 본선 무대처럼 심수봉이 홀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한 어쿠스틱 버전이다. 자료사진

가수 심수봉은 경영학도였다. 심민경이라는 본명으로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나가 ‘그때 그 사람’을 불렀을 때, 그는 명지대 경영학과 3학년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 공부를 했던 그는 음대 진학을 꿈꿨으나, 재수 끝에 경영학도가 됐다. 대입 준비를 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던 가정 형편과 관련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의 후배 가수 김광석이 1982년 명지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것도 가난했던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1955년생인 심수봉은 스무 살이던 1975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1917∼1979)를 처음 봤다. 그보다 두 해 전, 레스토랑에서 노래 부르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밴드 마스터에 의해 밀실 사교파티에 불려간 것이 계기였다. 그 파티에 참석했던 박종규(1930∼1985) 경호실장이 그의 노래와 연주 실력을 높게 봐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부른 것이었다. 이후 대통령이 참석한 몇 번의 행사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1979년 11월 7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현장검증에서 김재규(맨 오른쪽) 전 중앙정보부장이 총 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자료사진

1979년 10월 26일, 한국 정치 격변의 현장이 된 ‘궁정동 안가(安家) 만찬’에 불려 갔을 때, 그는 24세의 신인 가수였다. 노래 ‘그때 그 사람’을 통해 인기를 모으고 있던 참이었다. 안가 행사 실무자인 중앙정보부(중정) 의전과장 박선호(1934∼1980)의 안내로 당시 연극영화과를 다니던 22세의 여대생 신재순과 함께 만찬장에 갔다.

이 자리에서 국가원수 살해 사건이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였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김재규(1926∼1980) 중정부장이 총을 뽑아 차지철(1934∼1979) 경호실장을 쐈을 때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차지철은 박종규가 1974년 8·15 저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경호실장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를 꿰차고 마치 2인자인 듯 권력을 휘둘러댔던 인물이었다.

심수봉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첫 총성이 울리자 비서실장 김계원(1923∼2016)이 벌떡 일어나더니 줄행랑을 놓듯 급히 뛰어나갔다. 대통령은 그 상황에서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손을 양 무릎 위에 얹은 정자세로 지그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흡사 “이것들이 또 이 짓들이구나” 못마땅해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순간 김재규는 뒷걸음치듯 일어나며 대통령 가슴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이날의 사건 수사 결과는 그해 11월 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본)에 의해 공식 발표됐다. 합수본부장이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1931∼2021)은 “주범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었다”라고 했다. 중정에 대한 대통령의 질책, 차지철과의 권력 암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합수부 발표로 김재규는 ‘주군을 살해한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나, 1990년대 이후 그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유신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이 작용해서였다. (1993년에 나온 정호승의 소설 3부작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는 그 반감을 반영하며, 김재규 사건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정호승은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때 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군사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한 김재규의 최후 진술 육성이 공개되며 활발해졌다. 김재규는 녹음 파일로 26분에 달할 정도로 긴 진술을 통해 10·26을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혁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그를 민주화 영웅으로 추앙한다. 그러나 그의 진술을 다 믿을 수 없고, 설령 믿는다고 해도 그의 총격을 빌미로 신군부가 군사정권을 12년이나 연장한 것을 생각할 때 영웅론은 가당치 않다.

재판 과정에서 김재규가 밝힌 궁정동 만찬 상황에 대한 녹취도 2010년 언론에 의해 공개됐다. 그 녹취의 일부. “저는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고 김계원 실장을 이걸로 툭 치면서 ‘각하 똑똑히 모시시오’ 하고 권총을 뽑았습니다. ‘이 버러지’ 하면서 첫발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심수봉은 김재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1994년 수기 ‘사랑밖에 난 몰라’를 펴낸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관되게 전했다. 김재규가 당시 총격 현장에서 한 말은 단 하나였다고. 차지철에게 총을 겨누며 했던 한마디. “짜식, 넌 너무 건방져!”

심수봉은 수기에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과 김 부장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 없었다. 김계원 실장에게 한 말도 없었다.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려 유명해진 말 ‘버러지 같은 놈’은 완전한 창작이다.”

그런데 왜 김재규의 진술만 진실인 것처럼 알려지게 됐을까. 이는 합수부 발표 내용, 김재규 변호인들의 전언이 뒤섞여 세간의 인식을 이뤘기 때문이다. 합수부는 그를 내란범으로 몰기 위한 현장 발언이 필요했고, 김재규는 자신의 민주 혁명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야 했다.

심수봉(오른쪽)과 신재순이 1979년 12월 16일 재판에 출두할 때의 뒷모습. 당시 신군부는 언론에 두 여인의 뒷모습만 게재하고 이름도 가명(孫錦子, 鄭惠善)을 쓰게 했다.

심수봉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여성 신재순은 법정 진술에서 김재규가 “버러지 같은 놈을…” 등의 발언을 했다고 증언했다. 미국에 거주하며 펴낸 책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1994)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2011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합수부의 강요 때문에 그런 증언을 했으나, 김재규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심수봉의 증언과 일치하는 것이다.

김재규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에게 심수봉의 증언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할 말이 없다”라고 했다. 자신은 이미 10·26 사건을 담은 두 권의 책을 통해 김재규의 진술을 신뢰한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올해 86세로, 10·26 사건 피의자를 변호했던 7명의 변호인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안 변호사는 당시 재판이 신군부 세력의 전횡으로 이뤄졌다며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었다”라고 주장해왔다.

김재규 형사재판은 현재 재심이 진행 중이다. 재판부는 “계엄사령부 소속 수사관들이 김재규를 수사하면서 수일간 구타와 전기고문 등의 폭행과 가혹행위를 한 것이 인정된다”라는 등의 이유로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안 변호사는 오는 12월 16일로 예정돼 있는 재심 선고와 관련해 “내란 목적 살인이 아니라 단순 살인으로 죄목이 변경되길 바란다”라고 했다.

10·26 장면이 나오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원작자인 김충식 가천대 부총장도 같은 의견을 밝혔다. 당시 신군부의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도 대법원 판사 14명 중 6명이 내란 목적이 없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행위 시 존재했던 유신체제가 재판 때 폐기됐기 때문’ ‘폭동을 일으킬 만한 다수가 동원되지 않았다’라는 등의 이유였다. 김충식은 “김재규는 평소 성품이 곧았으나 분노조절장애가 있어서 가끔 욱 -하며 폭발했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 이야기”라며 “당일 거사 준비가 엉성했던 것도 내란 목적 배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궁정동 만찬 상황을 밝힌 심수봉의 증언에 대해 “신뢰성이 있다”라고 했다. 합수부는 국민이 자신들의 발표를 납득할 수 있게 근거를 만들었으며, 김재규는 평소 자신이 속에 쌓아뒀던 이야기를 총격 현장에서 말한 것처럼 재판에서 진술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수봉, 신재순 두 여성은 총성이 울리고 피가 튀는 현장에서 도망가지 않고 대통령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라고 신재순이 물었을 때, 대통령은 “음, 괜찮아”라고 답했다. 팔에 총을 맞고 화장실로 피했다가 다시 등장한 차지철이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대통령은 단호하게 또박또박 대꾸했다. “음, 나는 괜찮아.” 신재순은 “나는 괜찮으니 너희들은 피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을 거라고 했다.

두 여성의 증언에 의해 대한민국을 18년간 통치했던 지도자의 마지막 모습이 비범했음을 기록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유신 헌법을 통해 장기 독재를 꾀하며 반정부 세력의 저항을 자초했으나,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를 중진국 대열에 동참시키고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던 인물이었다. 예기치 않은 총격을 받고도 도망치거나 숨어서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의연한 태도를 지킨 채 생애를 마감했다.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 동석한 이후로 두 여인의 삶은 굴곡이 컸다. 특히 심수봉은 방송 출연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갇히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하편에 계속>

1978년 심수봉이 본명 심민경으로 대학가요제에 나갔을 때의 모습. 방송화면 캡처
대학가요제 수상 못했지만 곡 히트… “그때 그 사람은 나훈아였다”

심수봉은 한국 대중음악계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로서 크게 활약해왔다. 그 자존심이 지나쳐서였을까. 그는 지난 9월 한 축제 무대에서 후배 가수 김다현에 대해 “노래가 뭔지 삶이 뭔지도 모르는 아가씨인 것 같다”라는 등의 막말을 퍼부어 논란을 일으켰다. 54세나 어린 후배에게 꼰대 짓을 했다며 비판 목소리가 높아지자, 심수봉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일 행사장에서 소음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긴 했으나, 후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한 것은 분명 잘못됐다는 요지였다.

이번 논란 속에서 그가 청소년 시절 ‘뇌신경 인플레’(미소포니아)를 앓았다는 사실이 새삼 조명됐다. 주변의 소음이나 폭력적 언동에 뇌가 자극을 받아 극심한 고통을 받는 증세라고 한다.

알려진 것처럼, 충남 서산 태생의 심수봉은 국악인 집안에서 자랐다. 증조부,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이 전통 음악 거장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국악을 들으며 성장했으나, 어머니 손에 이끌려 피아노 교습을 받으며 서양 음악에 빠졌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타계를 겪었고, 청소년기부터 레스토랑에서 음악 알바를 했다.

스무 살이던 1975년, 한 호텔에서 노래하는 피아니스트로 일하다가 당대 톱가수였던 나훈아를 만났다. 나훈아는 그의 독특한 음색을 높게 평가하며 ‘여자이니까’라는 곡을 만들어줬다. 심수봉은 이 곡을 음반 녹음까지 했으나, 음반사와 분쟁이 생겨서 발매는 하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가수로 등장한 것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서였다. 당시 사회자였던 이수만은 대학 3학년생인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자작곡도 굉장히 많고 타악기와 건반악기는 거의 다 만진다고 합니다. 특히 드럼은 무지무지하게 잘 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날 심수봉은 트로트 발라드인 자작곡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다른 참가자들이 포크나 록을 했던 것과 달리 트로트 발라드여서 이색적이었다. “대학생답지 않고 너무 프로스럽다”라는 이유로 수상에 실패했는데, 이후 노래가 대중의 인기를 끌면서 가수로 주목받게 됐다.

그가 10·26 사건의 증인이 된 후 ‘그때 그 사람’은 마치 그 역사 현장의 인물인 것처럼 호사가들의 입길에 올랐다. 심수봉은 2024년에야 그 노래의 실제 주인공이 나훈아 선배였다고 털어놨다. 자신이 가수 데뷔 준비를 할 때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는데, 나훈아가 병실에 와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해줬다는 것이다. “나훈아 선배가 그때 군대에 갔는데 위험한 임무에 투입됐다고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분이 저렇게 죽으면 안 돼요. 저 사람 대신 제가 죽을게요’라는 기도를 했지요.”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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