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훈 더봄] 아들딸 보아라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2026. 10. 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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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훈의 미니픽션]
에미는 죽음이 복이라 여기고 갈 테니
울지 말고 아버지 곁에 묻어다오
AI 생성 이미지 /제미나이 나노바나나

못난 에미 때문에 하루도 니들 몸과 마음이 편할 날이 없지? 이 에미는 니들에게 할 말이 없구나. 무슨 낯으로 니들을 볼 것이며, 무슨 입으로 니들에게 말을 하겠냐? 그날 서둘러 집을 나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만신창이가 된 몸도 몸이지만 더는 니들 볼 염치가 없어서 아예 입을 열지 않고 병신이 된 척한 것이란다.

다행히도 의사 선생님이 뇌 촬영 결과 뇌출혈로 인해 언어 장애는 물론 의식불명까지 될 수 있다는 말에 에미는 오히려 말을 안 해도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아 안도했었단다. 입도 뻥긋 안 하고 이대로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다가 이대로 죽는 것이 낫지 다시 살아서 니들에게 부담되기도 싫고 이러쿵저러쿵 동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싫다. 때가 되면 어서 죽는 게 복이라는 옛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더구나. 

사고 뒤 내 가방에서 나온 500만원 현금 다발에 대해 듣는 사람마다 온갖 억측을 쏟아내더구나. 혼자 된 딸에게 아들들 몰래 주려고 했을 거라는 둥, 누구에게 사채를 놓으려 했을 거라는 둥, 불쌍한 영감님 하나 생겨 도와주려 했을 거라는 둥 입방아를 찧더구나. 죽은 척 듣고만 있었다.

그래, 그네들이 의혹을 제기한 그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허구한 날 친정에 찾아와 돈 내놓으라며 포악질하던 딸년에게 니들 몰래 돈을 준 적도 있고, 동네 사람들에게 100만~200만원씩 빌려주고 이자 따먹는 재미도 쏠쏠했었다.

돈도 돈이지만 찾아올 때마다 주전부리를 싸 들고 와서 이 말 저 말 건네주는 그들이 여간 반갑고 정다운 것이 아니었단다. 어느 살붙이가 그리  하겠냐? 영감이 생겼다는 말은 나도 농담으로 들었다. 팔십 넘은 할망구에게 새 영감은 당치도 않지. 먼저 간 니들 아버지에게도 욕될 일이지. 

언제 숨이 끊어질지는 모르겠다만 그날이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병원 생활도 이젠 넌더리가 난다. 조선족 아주머니의 정성 어린 간병이 그나마 위로가 되고, 이 아주머니 덕에 니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길 수 있게 되었구나. 며칠에 걸쳐 내가 남기는 말을 또박또박 잘도 받아 적더구나.

오늘은 500만원 현금 다발에 대해 말해야겠구나. 그래야 니들이 이 에미의 지난 10년의 삶을, 니들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산 10년의 삶을 짐작이나 해 보겠지. 니들 아버지 보내고 처음 한두 해는 그래도 주말마다 찾아오는 아들딸과 손주들 보는 재미로 살았지. 그러던 것이 차차 손주들이 커서 중·고등학생이 되고, 니들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발걸음이 잦아들었지. 

그 무렵부터 에미는 경로잔치나 온천 무료 관광, 북한예술단 무료 공연장으로 동네 할머니들과 출근하다시피 몰려다녔단다. 그때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니들은 모를 것이다. 가기만 하면 공짜로 선물 주지, 팔다리 어깨 주물러 주지, 곁에 앉아 살갑게 말동무해 주지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었단다. 아직도 다락방 가득 그런 곳을 다니며 받아 온 선물들이 쌓여 있단다.

니들은 받아 온 선물을 보며 사기라고 일축했다만 에미인들 왜 그것을 몰랐겠니? 처음 몇 번이야 혹했다만 한두 해 좇아 댕기다 보니 그들의 수법이 훤히 보이더라. 

그러나 자제하고 집에 들어앉아 며칠 지내면 좀이 쑤시고 그들이 그리워지더구나. 사근사근 말 걸어오고, 여기저기 쑤시는 데 주물러 주고, 매일매일 전화로 안부 물어오고. 이게 다 거짓말인데, 이게 아닌데 다짐하면서도 몸은 벌써 문밖을 나서고 있었으니 나도 나를 모르겠더구나. 번연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에미가 빠져든 것이지.

옛날 천둥벌거숭이 니들 아버지하고 연애할 때 홀딱 빠져든 것처럼 그랬던 것이란다. 그래도 그들이 칼 든 도둑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했단다. 긴긴밤 말똥말똥 누워 있을 때는 도둑이라도 찾아들기를 바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좇아 댕기다 만난 것이 북한예술단 아가씨였단다. 그 아가씨 이야기 들어 보니 기구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그 아가씨 고향이 에미와 같은 원산이더구나. 송도원이며 명사십리며 눈시울 붉혀 가며 이야기하는데 나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지. 그 아가씨가 선물을 싸 들고 집까지 찾아왔을 때는 내가 진수성찬까지 차려 함께 먹기도 했단다. 그날 밥맛이 꿀맛이었지. 늘상 혼자 먹던 것에 비하면 견줄 수가 없지.

돈을 벌어 북에서 굶고 있는 부모님께 송금해야 하는데 남쪽에서의 삶이 너무 고달파 쉽지가 않다는 말에 고향 사람 돕는다는 생각으로 의료용 침대를 덥석 사고 말았지. 니들에게는 싸게 샀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나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싼 값을 주고 산 것이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무엇에 홀려 그리 비싼 것을 샀는지 후회막급이다. 침대가 배달되고, 할부금을 두어 번 내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반품하겠다고 전화했더니 이미 포장을 뜯었고, 할머니께서 직접 서명을 했으니 법대로 하라고 막말을 하더구나.

나도 버티고 몇 달 할부금을 내지 않았더니 사람이 찾아와서는 욕을 퍼붓질 않나 제 명에 못 살 거라며 아들 회사를 찾아가서라도 받아내겠다고 하질 않나.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더구나. 그 아가씨를 찾으니 이미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만나게 해 주지도 않더구나.

그러더니 며칠 후 무슨 압류 계고장 같은 것이 왔더구나. 그래 별수 있겠냐? 한시라도 빨리 갚는 것이 니들도 살리고, 집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니들이 올 때마다 용돈으로 준 것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었는데 그것을 들고 갚으러 나가던 참에 사고가 난 것이란다. 

이런저런 사정을 그냥 입 꾹 다물고 눈감을까 하다가 그래도 이 에미의 응어리진 속을 알리고자 힘들게 몇 자 적었다. 그래야 내가 편히 눈 감을 것 같더구나.

부디 우리 삼남매 화목하게 잘들 살아라. 에미는 이제 죽음이 복이라 여기고 갈 테니 울지 말고 아버지 곁에 잘 묻어다오. 그리고 500만원으로는 병원비로 쓰든 침대 외상값을 갚든 니들 마음이다만 이 편지를 받아 적고 전해 주시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도 섭섭잖게 인사를 했으면 좋겠다.

애들아, 잘들 있거라. 못난 에미가 애끓는 마음으로 몇 자 적는다.

여성경제신문 이진훈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전 영동고 교사
mokleeyd@nate.com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이진훈 작가·교육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EBS와 고등학교에서 오랜 시간 국어와 논술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으로 <베이비 부머의 반타작 인생>을 펴냈으며, 구상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사)K문화독립군 부회장 등 다양한 문화 단체에서 중책을 맡고 있다. 한양도성의 역사와 철학을 담은 저술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양도성 文史哲  순성놀이>를 발간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전례위원 경험을 바탕으로 <명절 차례와 기제사>를 발간하는 등 전통문화 계승에도 힘쓰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또는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