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주 핵실험장에서 강원 홍천까지… 선도농업인 꿈꾸는 33세 탈북 여성 농부[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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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북한에서 탈북한 지 4년째로 그 동네 사는 탈북 여성이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민며느리는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장 씨 같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 법의 보호를 받기는 어려웠다.
"탈북 여성 영농인을 대표하고 싶습니다. 올해 6월 29일에 '북한이탈주민 귀농정착협회'를 만들어 회장이 됐습니다. 아직 회원은 9명뿐이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입니다. 농촌에 정착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탈북민들에게 제가 본보기가 되겠습니다. 홍천을 탈북 귀농인 요람으로 만들어 멘토 역할도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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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골짜기를 따라 메아리친 묵직한 소리가 함북 길주군 모든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땅이나 건물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13세이던 장진희 씨는 길주 장마당에서 약을 팔던 아주머니 가게에서 보따리를 들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소리에 놀라 가게 밖으로 뛰쳐나오니 다들 밖에 나와 무슨 일인지 몰라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지진인가?” “어디서 대포를 쏜 건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장마당은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평소대로 돌아갔다. 북한 첫 핵실험이 수십 km 떨어진 풍계리에서 진행됐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한 시간 뒤 북한 TV에선 핵실험 성공을 알리는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길주 사람들은 여전히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북한이 핵실험 장소를 공개하지 않기도 했지만, 늘 정전인지라 TV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핵실험을 했는지도 몰랐다.
핵실험 장소가 길주라는 사실은 한참 지나 입소문으로 알려졌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핵물질이 몸에 나쁘다는 것도 몰랐다. 발밑에서 핵실험이 진행됐다는 것보다는 오늘 가마솥에 넣을 것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당시는 쌀값이 무섭게 폭등해서 민심이 흉흉했기에 보위부와 안전부에서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던 때였다. 괜히 나랏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꼬투리 잡혀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장 씨 역시 핵실험에 관심도 없었다. 길주 아이들에겐 장마당에서 일감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누구는 빵집에서 일했고 누구는 가구 제작소에서 판자를 연마했으며 누구는 손수레를 밀었다. 장 씨도 어머니를 도와 뭐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 어린 마음에 스며든 중국
1993년 장 씨가 태어났을 땐 집안이 그리 가난하지 않았다. 부모와 함께 일본에서 북송선을 타고 온 귀국자 출신 장 씨 아버지는 당국에서 시키는 대로 길주에 정착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때 길주에서도 많이 굶어 죽었지만, 장 씨네는 일본 사는 아버지 친척들 덕분에 풍족하진 않아도 밥은 먹고 살았다.
장 씨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은 2006년 찾아왔다. 사금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큰돈을 사기당해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 왔다. 장 씨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위장 이혼을 강요했다. 어쩔 수 없어 어머니와 장 씨는 따로 나와 살게 됐다. 얼마 뒤 아버지는 장 씨와 비슷한 나이 딸이 있는 여자와 재혼했다.
‘어떻게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저 아이 아버지로 살 수가 있지?’
사춘기에 들어선 장 씨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사라지면 아버지가 후회할까?’
그러던 장 씨에게 삶의 희망이 생긴 것은 인신매매범에게 걸려 중국에 팔려 갔다가 북송된 마을 친구 얘기를 듣고서였다. 돈을 많이 벌게 해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13세에 중국에 간 그친구를 인신매매범들은 20세라고 속여 장애인에게 팔았다.
원래는 친구와 함께 탈북한 다른 북한 여성이 장애인에게 팔려 가기로 했는데, 그 여성은 죽어도 못 간다고 버텼다. 친구와 이 여성을 넘겨 받은 중국 쪽 인신매매범들은 “이 뒷산에 얼마나 (시신이) 묻혔을 것 같냐”고 협박하며 그 여성을 심하게 폭행했다.
그 모습을 보고 겁이 난 친구는 인신매매범들이 시키는 대로 장애인 집으로 대신 팔려 간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살 수 없었던 친구는 기회를 보다 탈출해서는 공안을 찾아가 북에 보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돌아온 친구에게서 들은 중국 이야기 가운데 장 씨 귀에 쏙 들어온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가니 집에 TV가 있고 정전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으며 집에서 빵이나 케이크 같은 다양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앞서 장 씨가 인민학교 시절 3년 동안 지낸 외할머니 집이 있는 강원도 마을엔 다양한 한국 삐라가 매일같이 날아왔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삐라에 담긴 낯선 세상 모습이었다. 자동차가 끊임없이 오가는 거리와 사람들이 살아 가는 도시 풍경, 그리고 집에서도 다양한 음식과 디저트를 만들어 먹는 모습은 그가 아는 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어떤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저렇게 다양한 것을 일상에서 누리면서 살아가기도 하는구나.’
그런데 친구가 말하는 화려한 거리와 자동차, 온갖 물건이 가득한 가게 등은 그가 삐라에서 본 그 세상인 듯싶었다.
‘그래. 죽지 말고 중국에 가서라도 새로운 삶을 살아 보자. 필요 없는 딸이라면 내가 사라져 줄게. 중국에 가서 살 거야.’
마침 친구도 중국에 다시 가고 싶어 했다. 팔려간 집 사람이 장애인이라서 도망친 것이었을 뿐 자리만 잘 잡으면 북한보다 훨씬 낫다는 얘기였다. 중국을 한번 경험한 사람이 북한에서 살긴 힘든 노릇이다.
장 씨는 어머니에게 “내가 중국에 가면 어떨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미쳤느냐”며 막대저울로 때렸다. 그 후 중국에 가겠다는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누우면 중국에 가서 살 생각만 했다.

● 15세에 선택한 탈북
마침내 기회가 왔다. 친구가 혜산에 선을 만들어 놨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2008년 1월 7일. 그는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친구와 함께 집을 나섰다. 길주에서 혜산까지는 기차로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어린 여학생들이라 단속을 피해 무사히 혜산에 도착했다.
친구가 안다는 오빠네 집에 들어가 일주일 기다리는 동안 일행이 점점 불어났다. 모두 15~17세 소녀였다. 1월 어느 날 6명의 소녀가 그 오빠 뒤를 따라 압록강 상류로 10km 정도 걸어 올라갔다.
어둑어둑해지자 그 오빠는 “지금이다. 뛰어”라고 소리쳤다. 모두 정신없이 압록강을 뛰어서 건너 중국 쪽 풀숲에 몸을 숨겼다. 잠시 뒤 도로에 차가 나타나 깜빡깜빡 전조등 신호를 보냈다. 이들이 탄 차는 2~3시간 달려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이들이 입을 옷도 다 준비돼 있었다. 다음 날 일행은 승합차를 타고 어디론가 출발했다.
승합차가 한참을 가다 멈추면 기다리고 있던 다른 차로 한두 명씩 갈아탔다. 승합차를 몰던 조선족은 “공안의 경계가 심해 함께 움직이면 잡힌다”고 했다.
같이 온 친구와도 헤어졌다. “얘는 도망친 전적이 있어 다시 (북한에) 가면 맞아 죽는다”며 다른 차에 태웠다. 장 씨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인 줄 몰랐다. 따로 이동하다 어디선가 만나는 줄만 알았다. 지금도 장 씨는 그 친구가 그립다.
“예쁘고 똑똑한 친구라 어디서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어요.”
그렇게 다 내리고 장 씨 혼자 남았다. 15세인 장 씨는 팔려 간다는 의미를 잘 몰랐다. 인신매매범들은 친절했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었다. 태어나서 부모 말고 그렇게 친절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호의 뒤에 숨은 의도를 알기엔 너무 어렸다.
장 씨 머릿속에는 집을 벗어나 아무 데나 자리 잡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중국에 와 보니 사람들이 친절한 듯해 탈북해서 잘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 산이 없는 산둥 마을에 정착
며칠이나 달렸을까. 차가 도착한 곳은 산둥(山東)성 빈저우(濱州)라는 곳이었다. 지명은 나중에 알았다. 차에서 내리니 산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밭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산이 없는 곳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무척 신기했다.
그는 마을에서도 눈에 띄는 2층 벽돌집에 들어갔다. 제일 좋아 보이는 집에 들어가니 기분이 좋았다. 여기서 그 친구가 오길 기다리면 되는 줄 알았다. 그 집에는 노부부가 살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할 수는 없었다.
며칠 지나고 젊은 여성이 나타났다. 북한에서 탈북한 지 4년째로 그 동네 사는 탈북 여성이었다. 수시로 와서 중국말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말을 배울 때까지 1년 동안 노부부를 따라 밭에 나가 밀과 보리 농사짓는 것을 도왔다. 마을 남자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돈을 벌었고, 설이나 추석 때 잠깐 왔다가 이내 떠났다.
노부부는 그를 친딸처럼 대했다. 좋은 옷도 입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게 되니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중국말을 배워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니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살았을 때 노부부가 말을 꺼냈다.
“저번에 설 때 왔다 간 우리 아들 있지? 내년엔 우리 아들하고 결혼해야 해. 그때까진 인근에 있는 우리 여동생 봉제공장에 가서 일을 좀 도와줘.”
장 씨보다 열 살 많은 노부부 아들은 명절 때 본 적이 있었다. 어차피 여자로 태어나서 결혼한다면, 이 집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키는 대로 봉제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예비 신랑의 고모라는 여성이 그를 계속 못살게 굴었다.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랑 갔는지 시시콜콜 감시하며 통제하는 바람에 많이 다투었다. 급기야 어느 날에는 그 고모라는 여성에게 폭행당해 입원까지 했다.
견딜 수가 없어 그는 공장을 뛰쳐나왔다. 2010년 6월, 17세 때였다. 무작정 인근 다른 현으로 가서 전봇대에 붙은 구인 광고를 보다가 맞춤한 자리를 찾았다. 학력 무관에 한국어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광고에 적힌 번호로 전화했더니 바로 오라고 했다.
장 씨는 중국판 민며느리제인 통양시(童养媳)의 제물이 될 뻔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민며느리는 법적으로 금지됐지만 장 씨 같은 탈북 여성들이 중국 법의 보호를 받기는 어려웠다.
그의 시부모 될 사람들은 장 씨를 2년 정도 키우며 중국말도 익히게 하고 정도 붙인 뒤 17세에 아들과 정식 결혼을 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장 씨가 도망을 갔으니 계획이 어긋나게 됐다.

● 갑자기 집에 나타난 공안
장 씨가 자리 잡은 회사는 농촌에 있는 니트 회사였다. 산둥 웨이하이(威海)에 있는 본사는 한국인 사장이 운영했고, 이곳은 중국 여성 사장이 운영하는 자회사였다. 장 씨는 가끔 한국 기업과 소통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
사장은 아이가 둘인 26세 한족 여인이었는데 친언니처럼 장 씨를 대해 주었다. 자기 이름으로 만든 통장에 장 씨가 번 돈을 꼬박꼬박 넣어 관리해 주었다.
이 공장에서 장 씨는 2016년 한국에 올 때까지 6년 동안 일했다. 그는 공장을 떠날 때까지 자신이 탈북민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작별을 고하는 순간에야 사장이 그의 정체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장에서 받은 첫 월급은 1500위안. 하지만 1~2년 지나니 공장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돼 4000~5000위안도 벌었다. 손재주가 좋은 한국인의 유전자는 중국에서 빛을 발했다. 공장 기계가 고장 나도 그가 척척 고쳤다.
어린 데다 눈썰미도 좋아서 다른 여직원보다 일을 두세 배씩 하는 바람에 공장 사람들은 뒤에서 “재는 기계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공장 옆에 잡은 월셋집 주인 부부도 장 씨를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 주인 부부에겐 장 씨 또래 아들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고 했다. 한밤중 급한 일이 공장에서 터지면 장 씨가 제일 먼저 뛰쳐나가 일을 했다.
6년 동안 공장과 하숙집만 오가며 살았다. 어두워지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삶이 행복했다. 일한 만큼 돈이 쌓이고 스트레스도 없으며 근처 시장에서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바라던 삶이구나.’
하지만 2016년 3월 행복했던 삶은 끝이 났다. 신랑이 될 뻔했던 예전 노부부 아들이 나타난 것이다. 장 씨를 찾아 월셋집에 온 그 남자를 주인 부부가 내쫓자, 다음에는 공안을 대동하고 왔다.
“얘는 내 마누라가 될 여자인데 도망쳐서 집에 안 들어오니 데려가겠다.”
그러자 공안이 장 씨에게 신분증을 내놓으라고 했다. 장 씨는 당황했다. 그 남자도 이것까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해하며 황급히 다른 핑계를 대면서 공안을 데리고 사라졌다.
위기는 넘겼지만 밤새 다리가 떨리고 잠이 오지 않았다. 공안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 남자 부모가 잘해 줬던 것을 생각하면 미안함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돈 잘 벌면서 걱정 없이 사는데 23세에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 정도 없는 남자 아내로 평생 살 자신은 없었다.

● 마지막 작별 인사
그날 밤 그는 알고 있던 조선족 카카오톡 단톡방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이 정보를 교류하는 곳이었다. 평소 친절하게 느껴지던 여성에게 무작정 매달렸다.
“저는 북한 사람인데, 공안이 왔다 갔어요. 여기서 더 있을 형편이 못 돼요.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 여성은 “마침 내가 다니는 회사에 탈북민이 있는데, 내일 아침에 출근해서 물어보겠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카톡 알림이 울렸다. 그 탈북민 직원이 중국 칭다오(靑島)에 있는 브로커 전화번호를 알려줬다고 했다. 그 브로커에게 전화하자 칭다오로 오라고 했다. 칭다오에서 얼마간 기다리면 연변에서 오는 탈북민 3명과 함께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사장에게 찾아가 작별을 고했다. 사장은 그를 말렸다.
“신분이 위태로우면 본사로 보내줄게.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한국에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 가지 말아라.”
하지만 그는 마음을 되돌리지 않았다. 신분이 불안한 곳에선 더는 마음 편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앞서 4년 전 위조 중국 신분증을 사려다 3만5000위안을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안정적인 신분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으로 간다고 하니 셋집 주인 부부는 아쉬워하며 무사히 가라는 의미로 만두를 빚어 주었다. 장 씨는 중국에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며느리로 삼으려는 속셈은 있었지만 처음 자리 잡은 집 노부부는 친딸처럼 대해 줬다. 탈북민인 줄 알면서도 친언니처럼 대해 준 공장 여사장, 역시 북한에서 온 줄 알면서도 친딸처럼 대해 준 월셋집 주인 부부….
“15세에 아무것도 모르고 중국에 온 소녀가 그런 분들 덕분에 삐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살았어요.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면 어떤 운명이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애를 받아 주고 숨겨 주고 성장시켜 준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엄마 아빠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이 나야 하는데 왜 그분들 이야기를 하니 눈물이 나죠?”

● 고생 끝에 도착한 한국
칭다오까지 버스로 600km나 가야 했다. 장 씨는 자신의 불안한 신세를 다시 뼈저리게 느꼈다. 신분증이 없으니 버스표를 살 수 없었다. 버스터미널 노숙자에게 100위안을 사례비로 주고 대신 버스표를 사 달라고 했다.
오전에 탄 버스는 밤 11시가 돼서야 칭다오에 도착했다. 신분증이 없어 숙박업소에서 잘 수가 없었다. 깊은 밤중에 허름한 민박을 찾아 돌아다녔다.
“지갑을 잃어버렸어요. 보름치 하숙비를 먼저 내겠으니 잠 좀 재워 주세요.”
몇 군데 거절당한 끝에 한 곳에서 받아 주었다. 남자였다면 받지 않았을 텐데, 아가씨가 이 추운 밤길을 헤매는 것이 딱하니 믿고 재워 준다고 했다. 그런데 그 민박집 방이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연변에서 온다는 탈북민 일행이 도착하려면 20일을 버텨야 했다.
이틀 동안 다른 민박을 열심히 찾아다녀 다른 집을 찾았다. 보름치 방세를 먼저 냈다. 혹시 공안이 단속을 나오면 세탁실에 숨으라는 조건이었다.
민박 1층엔 식당이 있었다. 식당에서 며칠 동안 밥을 먹으며 친해진 사장이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식당에 한국 사람들도 종종 오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서빙 겸 통역으로 일해 달라. 대신 월급 3200위안과 숙식을 제공하겠다.”
그의 수중엔 몇만 위안이 있었고 보름 뒤면 한국으로 떠나게 된다. 굳이 떠나는 날까지 일하지 않고 시내 구경이나 다닐 법도 한데, 장 씨는 그 보름이 아까워 돈 버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나도 브로커에게선 전화가 오지 않았다. 식당 사장은 식당 옆 테라스를 개조해 양꼬치 가게로 만들어 줄 테니 같이 일하자고 했다. 신분증만 있다면 솔깃했을 테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브로커에게선 보름이 훨씬 지나 연락이 왔다. 한 탈북 여성의 중국인 남편이 눈치 채는 바람에 그 여성을 탈출시키느라 시간이 지체됐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틀간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와 친황다오(秦皇島)로 오라고 했다.
신분증도 없는 사람에게 중국을 가로질러 내려오라, 올라오라 하는 브로커에게 기가 막혔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친황다오에 도착하니 또 밤이었다. 이곳 숙박 시설은 더 까다롭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칭다오보다 더 많은 돈을 내겠다고 하니, 어느 한 집이 문을 열어 주었다.
사흘 뒤 마침내 버스터미널에서 연변에서 온 일행과 만났다. 탈북한 지 8년 만에 만나는 북한 여인들이었다. 버스와 승합차를 갈아타며 동남아 국가로 넘어갔다. 2016년 6월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고 그해 11월 2일 하나원을 나왔다.

● 입사 3개월 만에 반장 승진
하나원을 나온 장 씨는 대구에 정착했다. 하나원에서 있을 때 대구가 섬유 도시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편직 공장에서 6년 동안 일했기에 대구에 정착하면 일자리를 쉽게 잡을 거라 믿었다. 오판이었다. 막상 가 보니 대구엔 니트를 짜거나 재봉틀로 옷 만드는 공장은 없었다.
대구 정착에 실패한 그는 하나원에서 알게 된 언니 소개로 경기 김포시에 있는 플라스틱 용기 제조회사에 취직했다. 첫 월급은 200만 원. 2층짜리 공장에선 직원 20여 명이 일했다.
기계가 자주 고장 났는데, 그때마다 수리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어느 날 아무리 기다려도 수리공이 오지 않자 장 씨는 직접 기계를 분해했다. 중국 공장에서 기계를 척척 고친 장 씨였다. 임원이 달려와 “신참인 네가 뭘 알아서 비싼 기계를 뜯었냐”고 욕을 해댔다. 하지만 그가 다시 조립한 기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공장엔 중국인 직원들도 있었는데, 중국말에 능통한 장 씨가 그들과의 소통을 맡았다. 장 씨는 입사 3개월 만에 1층 반장으로 승진했다.
회사에 잘 다니던 때에 지인 소개로 한 남자를 알게 됐다. 결혼 적령기였던 이 남자는 장 씨 공장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서 실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만나 보니 술도 마시지 않는 자상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장 씨의 지난 삶과 배경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사람 자체를 진심으로 사랑해 줬다.
2018년 결혼한 이후 남편은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 석 달마다 통장에 1000만 원씩 채워 갖다 주었다. 지금도 남편은 여전히 아내 장 씨를 처음과 똑같이 대해 주고 있다.
장 씨 부부는 2019년과 2021년에 각각 아들을 낳았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선 일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대구로 갔다. 목수 일을 하고 싶던 남편은 대구에서 원하는 곳에 취직해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목공업도 쇠퇴기여서 예전처럼 돈을 벌기 힘들게 됐다. 남편은 “AI(인공지능) 시대에 목수도 사라질 직업이 된다”며 한숨을 쉬더니 “농촌에 가서 정착하자”고 장 씨를 설득했다. 농촌엔 갈 생각이 없던 장 씨도 남편이 “농촌에 가면 내가 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자 마음을 바꾸었다.
뭐든 다 하겠다는 남편 말만 믿고 대구를 떠날 순 없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자 장 씨는 농촌진흥청 도움을 받아 어떤 작목을 선택해 재배할지 하나씩 알아 가며 귀농 공부를 했다.

● 홍천에 뿌리내리다
장 씨 부부는 동물복지 산란계 농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열심히 매물을 찾다가 강원 양구군에 660㎡(200평)짜리 양계장 두 동이 나온 것을 알았다. 대구 집을 정리한 돈까지 포함해 3억8000만 원에 매입하려는데 막판에 틀어졌다. 계약서에 지장을 찍기 전에 만난 양구군 그 마을 이장이 오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우리 마을은 저 냄새나는 양계장을 없애고 관광단지로 거듭나려 하는데, 당신들이 그래도 들어온다면 하루 열 번씩 군청에 민원을 넣을 거요.”
이 말을 듣고 계약할 순 없었다.
다시 마땅한 정착지를 찾아 품을 팔았다. 그러면서 소규모 양계장은 허가받기도 어렵고, 받았다고 해도 대기업이 장악한 국내 양계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방향을 영농으로 바꾸었다. 마침 남북하나재단에서 영농을 결심한 탈북민들을 지원해 주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장 씨 부부는 강원 홍천군에 정착하기로 했다. 남북하나재단 영농 교육이 홍천 농업기술센터에서 열렸는데 귀농귀촌 담당 여성 팀장이 무척 친절하고 세심하게 가르쳤다. 이런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지난해 장 씨의 고군분투 홍천 정착기가 막을 올렸다. 땅 4300㎡(1300평)은 사고, 1만3000㎡(4000평)은 농지은행에서 빌렸다.
첫해 작물은 수박과 들깨, 대두콩을 심었다. 하지만 돈이 부족해 하우스 농사를 못 지어 수박은 겨우 본전을 건졌다. 올여름 폭염으로 야외에서 자란 수박은 속부터 익어가는 ‘피수박’이 돼 절반을 버려야 했다.
나머지 절반은 온라인에 ‘크기는 작아도 노지에서 자라 단맛이 좋은 수박’을 내세워 팔았다. 5~6kg짜리 수박을 무작위로 1만 원에 보내주는 행사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대신 택배로 보내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물가는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계속 내려서 올해 적자를 본 주변 농가가 적지 않다.
장 씨는 첫 농사를 지으며 농사 기술과 판매 노하우를 익혔고 기본 투자금도 회수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직접 키워서 직접 팔며 많은 것을 배운 의미 있는 한 해였다.
밭에 심은 들깨와 콩은 이달과 다음 달 중순 수확할 예정이다. 처음으로 지은 것이라 기대가 크다. 막상 농사를 해 보니 너무 힘들지만 보람도 느낀다.
“내가 심은 것들이 2~3일 있다가 가 보면 예쁘게 잘 자라나고 있어요. 농사를 이런 맛에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스러운 일은 요즘엔 필요한 농기계를 농업기술센터에서 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기사를 부르면 인건비가 수십만 원 든다. 장 씨는 농사짓는 중에도 농기계 운전법을 열심히 배웠다.
지난달 그는 농촌진흥청 주관 제2회 여성 농업인 농기계 챌린지에서 동상을 받았다. 전국에서 4인 1조, 30개 팀이 참가했는데, 장 씨는 자신의 팀에서 이앙기 운전을 맡았다.
“처음 배운 농기계 운전으로 동상까지 받은 것을 보면 기계 다루는 데 재능이 있는가 봅니다. 기계가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이앙기뿐만 아니라 트랙터나 보행관리기 운전도 척척 해낸다. 내년엔 굴착기 운전면허증도 따려고 한다.

● ‘나’를 찾은 홍천 귀농
그는 홍천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홍천은 ‘나’라는 사람을 찾은 곳입니다. 중국에선 돈은 잘 벌어도 나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고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았죠. 하지만 여기선 여성 영농인 장진희로 당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장 씨는 내성적이다. 홍천에서 영농을 시작하면서 성격도 바뀌었다. 한국이란 땅에 정착하기도 힘든데, 인간관계를 많이 신경 써야 하는 농촌 생활에 적응하는 것운 훨씬 버겁다. 그는 이를 젊음의 패기로 이겨 나가고 있다.
홍천에서 현재 다섯 개 단체에 가입돼 활동하고 있다. 지역 사회를 빨리 알고 그 안으로 스며들기 위해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지역 봉사를 통해 품위 있는 사람으로 늙어가는 법도 배운다고 했다.
농사짓고 작물 판매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영농 기계를 익히고, 5개 단체에서 청년 역할까지 하다 보면 몸이 몇 개라도 어려울 법하지만 장 씨는 씩씩하다. 홍천에서도 장 씨 이름과 활동을 알아주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국에 와서 10년 동안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 여행 한번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지만, 그의 꿈은 원대하다.
“탈북 여성 영농인을 대표하고 싶습니다. 올해 6월 29일에 ‘북한이탈주민 귀농정착협회’를 만들어 회장이 됐습니다. 아직 회원은 9명뿐이지만 앞으로 더 늘어날 것입니다. 농촌에 정착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탈북민들에게 제가 본보기가 되겠습니다. 홍천을 탈북 귀농인 요람으로 만들어 멘토 역할도 할 생각입니다.”
농사에 대한 주관도 뚜렷하다.
“영농 경력이 1년밖에 되지 않지만, 와서 보니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홍천에서 전통적인 농사 방법만으론 소득을 늘리기 쉽지 않습니다. 기후변화로 봄이 한 달 빨리 오고, 가을은 보름 늦춰졌습니다. 충분히 2모작도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내년엔 참깨와 들깨로 2모작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민물고기용 사료를 재배할지 생각 중입니다. 노지에서 수박 키우는 것보단 더 수익이 날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무엇보다 생산, 가공, 판매까지 하는 6차 산업으로 바뀌어야 농촌이 생존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 농업인으로 변신한 그는 낡은 영농 방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을 떠올리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든다.
“통일이 되면 제가 여기서 배운 모든 기술과 기법을 북한에 전수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보다 제가 선도농업인이 먼저 돼야겠죠. 북에서 온 사람들이 농사 잘 짓는다는 이미지를 저를 통해 한국 사회에 보여주고 싶습니다. 홍천의 장진희를 지켜보고 응원해 주십시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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