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박준 시인 2026. 10. 10.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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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준의 마음쓰기] (50)
일러스트=유현호

나흘간의 여정은 춘천에서 시작됐습니다. 춘천에 이어 삼척에서도 일정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조율해 동선을 연결했지만 마냥 효율만을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한가로운 걸음도 끼워 넣었습니다. 비록 일이긴 해도 분주함 끝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조금은 여행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소설가 김유정의 생가가 있는 춘천 실레마을에서 일을 마치고 강촌역에 들렀습니다. 열차 시간에 맞춰 다음 일정을 함께할 일행을 데리러 간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역에 도착했을 때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강촌역이 그 강촌역이 아닌데? 알고 보니 이 강촌역은 경춘선이 복선화되면서 새로 지어진 것이고 아치형 터널을 정거장으로 쓰던 그 강촌역은 폐쇄돼 관광지로 탈바꿈할 예정이라 했습니다.

강원 북쪽 영서에서 남쪽 영동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멀었습니다. 이 탓에 남이섬을 둘러보겠다는 처음 계획은 포기했습니다. 서른을 바라보는 한 후배가 자신은 얼마 전에 다녀왔다고, 아쉽지만 괜찮다고 위로 섞인 말을 건넸습니다. 자연스레 남이섬이 배경으로 등장했던 드라마 ‘겨울 연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후배는 제목은 들어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가 방영되던 2002년, 후배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유행시킨 목도리를 참 열심히 두르고 다녔던 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뒷자리에 있던 선배는 남이섬은 드라마 ‘겨울 연가’ 촬영지보다는 소설가 최인호의 원작을 영화화한 ‘겨울 나그네’ 촬영지로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열렸던 강변가요제를 직접 보러 간 이야기도 해줬습니다. 역시 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셈을 해보니 제9회 강변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담다디’가 전국에 울려 퍼질 때 제 나이는 다섯 살.

홍천과 원주, 제천까지 갔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영월 지나 삼척으로 가는 길. 으레 이곳을 지날 때면 단종의 시간이 서려 있는 청령포에 가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지로 큰 인기를 끌어 관광객이 몰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까닭입니다. 두 번째 목적지인 삼척 도계에 이르렀을 때 창밖 한적한 길가에 이국적인 건물이 보였습니다. 10년 전 방영된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장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여독을 풀고 싶은 생각에 눈길을 거뒀습니다.

삼척, 그중에서도 도계를 찾은 이유는 스위치백 디젤 열차를 타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은 폐선된 영동선 구간 위로 과거 모습을 재현한 관광 열차가 다닙니다. 스위치백은 지그재그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산악 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전진과 후진을 하며 ‘Z’형으로 달리는 열차. 말끔한 열차 내부에는 연인 혹은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철도 기관사로 일했다는 관계자분이 스위치백 열차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이어나갈 때 몇몇은 집중하며 눈을 반짝였고 다른 몇몇은 창밖 풍경이나 함께한 이의 사진을 찍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노랫말처럼 그대는 내가 아니며, 추억은 다르게 적히는 법이니까.

삼척에서 일을 마치고 일행과 작별을 했습니다. 후배는 동해에서 하루 더 머물 것이라 했고 선배는 강릉에서 KTX 열차를 타고 돌아갈 거라 했습니다. 저는 순간 동해 묵호가 배경인 영화 ‘봄날은 간다’와 드라마 ‘모래시계’로 처음 만난 정동진을 떠올렸습니다. 밤 기차를 타고 정동진에 갔다가 마땅한 숙소나 머물 곳을 찾지 못해 고생했던 젊은 날의 시간도 함께였습니다. 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손을 흔들며 저마다의 새로운 추억을 고대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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