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이름밖에 몰랐는데…내 손으로 이름 석 자 쓸 때가 행복해"

조수민 기자 2026. 10. 9.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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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서방 이름밖에 몰랐어. 그런데 이제는 내 이름도 또렷이 쓰고, 길가에 걸린 간판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니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이지."

김 할머니는 "젊은 날엔 글을 몰라 주눅 들고 숨어 지내야 했던 날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내 손으로 주소를 적고 버스 노선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며 "몸이 아파도 이 교실에 와서 글자를 익히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전성기"라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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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돌 한글날…전남광주 동구 빛고을복지관 문해교실 가보니
강원도 소녀에서 만학도까지… 50년 세월 넘어 펼친 한글 도전기
580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전남광주 동구 빛고을종합사회복지관 성인문해 한글 교실 기초반 학생이 한글 단어를 따라 적고 있다. 2026.10.7 ⓒ 뉴스1 조수민 기자

(광주=뉴스1) 조수민 기자

"처음엔 서방 이름밖에 몰랐어. 그런데 이제는 내 이름도 또렷이 쓰고, 길가에 걸린 간판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니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이지."
580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전남광주 동구 빛고을종합사회복지관 성인문해 한글교실.

본격적인 수업 시작 전 교실 안은 어르신들이 손수 챙겨온 대추와 과일을 서로의 손에 쥐여주며 정을 나누는 웃음꽃으로 가득 찼다.

잠시 후 선생님이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기를 거두고 책상 위에 꼿꼿이 앉아 교재로 시선을 모았다.

교실의 풍경은 그 어느 학교보다 치열하고 진지했다.

세월의 무게만큼 굵게 주름 팬 투박한 손마디로 연필을 꼭 쥐고 하얀 공책 위에 'ㄱ,ㄴ,ㄷ' 자음과 모음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는 손길이 이어졌다.

서툰 필체였지만 한 자라도 틀릴세라 숨을 죽인 채 집중했고 쓰다 막히면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방금 배운 단어를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읊조리기도 했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칠판과 공책을 번갈아 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배움을 향한 뜨거운 열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따뜻한 온기 속에서 굵은 연필을 꾹 눌러 쥐며 칠판을 응시하는 학생 김연순 할머니(76)의 눈빛은 그 어느 학생보다 진지했다.

김 할머니가 연필을 다시 잡기까지는 참으로 긴 세월이 걸렸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과 아프신 부모님 밑에서 학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채 유년 시절을 보냈다. 글을 몰라 겪은 아쉬움은 일상 속 작은 불편함으로 다가오곤 했다.

광주로 내려온 지 어느덧 50년. 김 할머니는 낯선 타향에서 남편과 함께 살며 학교 급식소에서 20년 넘게 일했다. 몸이 부서라듯 성실하게 일하며 자녀 셋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훌륭하게 키워냈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 한 자 마음 편히 적지 못하는 아쉬움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갈 때마다 지인의 손을 빌려 서류를 채워야 했고,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생활 속 작은 글자들을 마주할 때면 가족들에게 넌지시 물어보며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했다.

그러다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문해 교육의 문을 두드렸고 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겨 배움을 이어간 지는 어느덧 4년째다. 월수금 수업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는 개근왕이자 모범생이다.

옆자리 동료 어르신들과 함께 맞춤법을 익히고, '이모님' 같은 헷갈리는 글자를 배우며 티격태격 웃음을 나누는 이 시간이 할머니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활력소다.

김 할머니는 "젊은 날엔 글을 몰라 주눅 들고 숨어 지내야 했던 날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내 손으로 주소를 적고 버스 노선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며 "몸이 아파도 이 교실에 와서 글자를 익히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전성기"라고 활짝 웃었다.

580돌 한글날을 이틀 앞둔 7일 전남광주 동구 빛고을종합사회복지관 성인문해 한글 교실 기초반 학생이 한글 단어를 따라 적고 있다. 2026.10.7 ⓒ 뉴스1 조수민 기자

교실 안은 칠판 글씨를 공책에 옮겨 담는 '서걱서걱' 연필 소리만 울려 퍼졌다. 간간이 헷갈리는 맞춤법이 나올 때마다 옆자리 동료와 공책을 슬쩍 엿보며 "맞아, 이 글자가 아니었어"라며 머쓱하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서로를 격려하듯 손뼉을 치는 소리가 교실을 따뜻하게 채웠다.

칠판 앞쪽 자리에 앉아 굵은 연필을 내려놓은 80대 학생 김기심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작년에 처음 왔을 때는 칠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뒤돌아서면 까먹기 바빴어. 그런데 이제는 내 손으로 마트 영수증도 확인하고, 자식들한테 문자도 보낼 수 있게 됐지 뭐야. 늦게 시작했지만 내 남은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 바로 이 한글 공부야."

김 할머니는 "젊은 날엔 글을 몰라 조심스럽고 아쉬운 날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내 힘으로 주소를 적고 버스 노선표를 읽을 수 있게 됐다"며 "몸이 아파도 이 교실에 나와 글자를 익히고 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이 시간이 지금 내 삶의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sum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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