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연의 시대사색]‘적’을 향한 증오가 동지를 향할 때

조희연 성공회대 석좌교수·전 서울시교육감 2026. 10. 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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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는 끝났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집권 1년 반, 대통령 지지율은 예상 밖의 수준으로 낮아졌고, 당 안에서는 서로를 멸칭으로 부르는 일이 일상이 됐다. 내가 ‘장기 민주화시대’라 부르는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 정치와 사회운동 내부에 늘 균열은 거기 있었다. ‘적’과의 대립, 동지와의 균열, 진보 안의 정당과 정당, 그룹과 그룹 사이의 균열. 물론 갈등이 곧 불행은 아니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료할 수 있다. 다만 갈등이 어디서 터지고 어디에 선이 그어지는지는 시대의 공기에 따라 자리를 옮긴다. 12·3에서 4·4를 거쳐 6·3에 이른 시간, 그 이후는 벌써 다른 계절이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다원성

1980년대, 전두환의 시대에 우리가 다툰 것은 ‘누가 더 뜨거운가’였다. 더 뜨거운 사람이 존경받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던 대중의 갈망이 그 뜨거움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중을 향하던 불꽃이 방향을 틀어 동지들 사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갈등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갈등을 어떤 눈으로 마주하는가이다. 견해와 전략이 다르다는 사실보다 그 다름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지붕 아래 살아갈 것인가.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라는 익숙한 정의는 정치의 심장부에 갈등이 있다는 통찰을 준다. 그러나 끝내 답하지 않은 물음이 따른다. 동지 안의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어려운 것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길을 고집하는, 바로 곁의 그 사람이다. 오랫동안 민주화운동과 민주진보정치를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적을 향한 증오는 때로 동지에게로 번진다. 불은 바람을 가리지 않는다. 처음엔 적을 향하던 분노가 어느새 충분히 싸우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덜 급진적인 동지를 겨눈다. 그다음엔 “저 사람이 성공하느니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낫다”는 감정이 고개를 든다. 일종의 ‘적대의 내향화(內向化)’이다. 나는 이것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비극의 첫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극단의 얼굴은, 다행히 우리 안이 아니라 1972년 일본 아사마 산장 사건과 그 과정에서 노출된 ‘베이스캠프’ 사건에서 볼 수 있었다. 연합적군은 경찰과 총구를 마주하기 전 이미 스스로를 허물고 있었다. “사상성이 부족하다” “혁명성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동지를 둘러싸고 때렸고, 끝내 죽였다. 쓰러진 건 적이 아니라 동지였다. 그 겨울 이후 일본 신좌파는 대중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무엇이 동지를 적으로 바꾸었는가. 출발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었다. 비극은 그 열망이 절대가 되면서 시작됐다. 혁명이 문턱에 와 있다고 믿는 순간, 장애물은 타방(他方)의 적만이 아니라 아방(我方)에서 걸음을 늦추는 사람이 된다. 마침내 전도가 일어난다. 혁명을 위해 동지를 치는 것이 아니라, 동지를 치는 일 자체가 혁명이 돼버린다. 나는 “20세기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막이 올랐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희생적 투쟁에 몸과 마음을 맡길 때 투사들은 순수 그 자체였지만, 혁명(자기희생적 운동)이 체제(권력)가 되는 순간 순수의 근저에 이익의 시선이 흘러들고 자기정치와 자기 집단정치의 동학이 작동한다. 여기에 고양기와 퇴조기의 다른 결의 균열이 작용한다. 고양기의 전투성은 쉽게 적을 향하지만, 열기가 식는 퇴조기에는 상황의 복잡함이 동지의 불철저함 탓으로 돌려진다. 적은 그대로인데, 시선은 안쪽을 향한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정의로운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많은 청년은 ‘레닌’을 꿈꾸었고, 나는 그 급진성을 지금도 아름답게 기억한다. 문제는 치열함이 절대가 될 때였다.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순간, 생각이 다른 동지는 타도의 대상이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견디지 못하는 역설이 거기서 태어난다. 순수성의 역설이라 부를 만하다.

동지 사이의 다름을 견디는 능력

여기서 우리는 동지 안의 다원성이라는 문제와 마주한다. 이것은 원칙 없는 타협도, 모든 의견이 옳다는 말도 아니다. 정당도 운동도 본래 한 덩어리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생각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민주주의란 그 갈래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흐르며 하나의 물길을 내는 과정이다. 건강함은 차이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다스릴 수 있는 상태에 있다. 한 진영이나 정당의 수명은 얼마나 많은 다름을 품을 수 있는가, 즉 ‘동지적 다원주의’에 달려 있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면 ‘분립(分立)’이 더 생산적일 때도 있다. 여기서 아무도 진리를 독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지를 향한 증오로까지 번지는 치열함이 대중에게 버림받을 과잉인지, 끝내 더 큰 진보를 이끄는 치열함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맬컴 엑스를 함부로 폄하할 수 없듯이, 그 판단은 결국 대중의 몫이다. 정치는 대중을 관객으로 한 공감 창출의 전략예술이다. 안쪽의 차이에 발이 묶인 싸움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순간, 정치는 이미 제자리를 떠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의 여백이 아닐까. 지금 내가 그어놓은 적과 동지의 경계도 역사의 긴 눈으로 보면 모래 위의 선일지 모른다. 나 스스로도 극단적인 치열함 속에서 강렬한 전투성을 내뿜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의 발언과 언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후끈거릴 때도 많다. 치열함은 역사를 전진시키지만, 매 순간의 그 치열함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치열함은 온건한 열망까지 품는 리버럴의 자리를 남겨뒀지만, 지금의 균열 속엔 리버럴이 설 자리가 없다. 어쩌면 성찰적 여유를 가지고 증오했던 동지와의 공통성을 찾는 것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경로였을 때도 있다. 물론 아무도 ‘전지적’ 평가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당연히 겸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정치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능력만큼 동지 사이의 다름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그 성숙함 하나일지 모른다.

조희연 성공회대 석좌교수·전 서울시교육감

조희연 성공회대 석좌교수·전 서울시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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