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근대 섞인 궁궐 안… 흐드러지게 피어난 흰 복숭아꽃 2000송이

허윤희 기자 2026. 10. 8.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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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까지 가을 궁중문화축전
창덕궁 희정당서 ‘白의 질서’ 전시
창덕궁 희정당 접견실 한가운데 흰 복숭아꽃 2000송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 최성우 보유자가 비단 생초로 만든 꽃송이를 고사목 가지에 일일이 붙여서 만든 작품 ‘화이트알리오스’다./임지훈 기자

‘밝은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지닌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전각 안에 흰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머물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벌과 나비, 천연기념물 팔색조가 꽃나무 가지 위에 군데군데 앉아 있다. 꽃도 나비도 진짜가 아니다. 국가무형유산 궁중채화(宮中綵花) 최성우 보유자가 비단 생초로 벽도화(碧桃花) 2000송이를 만들고 고사목 가지에 일일이 붙여서 만든 작품이다.

창덕궁 희정당이 7일부터 11일까지 닷새간 활짝 개방된다. ‘2026 가을 궁중문화축전’ 기간에 맞춰 전각 전체가 공예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공간 스튜디오 WGNB의 백종환 대표가 전시 감독을 맡은 특별 전시 ‘조선 공간 미학: 백(白)의 질서’다. 왕이 거처했던 ‘어거간’, 손님을 맞았던 ‘접견실’과 ‘귀빈실’ 등에 국가무형유산 전승자 26명과 현대 작가 7명의 작품 50여 점이 어우러졌다.

도예가 권대섭의 ‘달항아리’가 귀빈실 바닥에 놓였다. /임지훈 기자

희정당은 전통과 근대가 섞인 독특한 궁궐 전각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 그 부재로 재건했다. 외관은 전통 목조 건축물이지만 실내 장식에는 샹들리에, 카펫, 화려한 벽지 등 서양식 요소가 도입됐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대 왕의 집무실이자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였다. 백종환 대표는 “희정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어떤 질서가 보였다. 서양 근대 문화가 도입된 공간인데도 조선의 미학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했다.

접견실 한가운데 놓인 궁중채화 최성우 보유자의 작품 ‘화이트알리오스’. /임지훈 기자

백 대표는 전시 주제인 ‘백(白)’을 여백의 개념으로 풀어냈다. “제가 생각한 백색은 여백이에요. 빈 종이를 그냥 여백이라고 부르진 않지만, 거기에 점 하나를 찍는 순간 나머지가 여백이 되죠. 점을 하나 더 찍으면 두 점 사이에 관계성이 생기고요. 그 다양한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접견실 한가운데는 ‘환대’의 의미를 담아 대형 궁중채화 작품이 놓였다. 최성우 보유자는 “궁궐 잔치에 사용됐던 벽도화가 하늘에서 내려와 희정당에 피어난 모습을 표현했다”고 했다. 넓은 접견실 동·서벽을 장식한 해강 김규진(1868~1933)의 대형 부벽화(付壁畵) 사이에서, 활짝 핀 복숭아꽃이 하늘의 별처럼 빛을 낸다.

허유정 작가의 ‘희정(喜庭)’. 오얏꽃을 상실의 극복으로 재해석했다. /임지훈 기자

그 옆 또 다른 접견실에는 허유정 작가가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을 은으로 재해석한 ‘희정(喜庭)’이 전시됐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과거의 상실을 재현하는 꽃이 아니라 그 시간을 품고도 다시 피어나는 꽃을 이 공간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왕의 거처로 쓰였던 어거간에는 염장 조대용이 제작한 붉은 발이 드리우고, 발 뒤에는 제와장 김창대가 만든 용머리 모양 기와가 놓여 궁궐의 위엄을 더했다. 긴 복도의 끝에선 갓일장(갓 만드는 장인) 정춘모가 만든 ‘갓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백 대표는 “이 공간을 거쳐 간 사건과 인물, 겹겹이 쌓인 공간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며 “장인과 현대 작가들의 작업이 궁궐 안에서 이렇게 호흡할 수 있구나 하는 것도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갓일장 정춘모 보유자가 디자이너 스튜디오 워드와 함께 만든 '양태 수직 펜던트 조명'. /임지훈 기자

매년 봄·가을에 열리는 궁중문화축전은 경복궁·창덕궁·덕수궁 등 서울 5대 궁과 종묘 일대에서 열리는 국내 최대 문화유산 축제다. 이번 가을 축전에서는 ‘경복궁 한복 연향(한복을 입고 즐기는 궁중 잔치)’, ‘창경궁 시간 여행’과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종묘 건축 탐험대’ 등이 진행된다. ‘백의 질서’ 전시 관람은 사전 예약 없이 창덕궁 현장에서 신청해 입장할 수 있다. 15분마다 25명씩, 하루 700∼800명 정도 관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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