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에 푹 빠진 만수르 친형’에서 AI 큰손으로···UAE ‘그림자 왕자’ 타눈[시스루피플]

최경윤 기자 2026. 10. 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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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크 타눈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랍에미리트연합 국가안보보좌관. 본인 SNS 갈무리

199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한 주짓수 도장에 ‘벤’이라는 가명의 중동 출신 청년이 찾아왔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수업이 끝나면 남아 매트를 청소하기도 했다. 함께 운동한 사람들은 그가 종종 동행하던 부유한 영국인의 집사나 경호원이라고 생각했다.

1년여 뒤 고향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으로 돌아가겠다는 벤의 정체가 드러났다. UAE의 왕자 셰이크 타눈 빈 자이드 알나하얀이었다. 그는 UAE에 주짓수를 알리기 위해 다니던 도장의 관장을 아부다비로 데려갔다. 주짓수에 몰두한 타눈은 결국 고수 등급인 블랙벨트까지 땄다.

주짓수에 푹 빠진 UAE 왕자의 이름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 인공지능(AI) 산업의 중심에 등장하고 있다. 타눈은 UAE 국가안보보좌관이자 UAE 최대 국부펀드와 AI 기업 ‘G42’ 등을 이끌고 있다. 막강한 영향력에도 그간 그의 이름은 다른 왕자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디언은 1일(현지시간) 금융·외교를 넘어 AI 산업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타눈을 집중 조명했다. 일각에서는 그를 ‘왕실의 해결사’ 또는 ‘선구자’로 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 속 악당’에 비유하기도 한다.

타눈(가운데)은 주짓수 못지않게 종합격투기도 즐기는 것으로 전해진다. 주짓수 전문 매체 그레이시매그 갈무리
검은 선글라스 뒤의 ‘그림자 왕자’

타눈은 UAE 건국자이자 초대 대통령인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나하얀의 아들이다. 자이드는 7차례 결혼해 최소 30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타눈은 자이드의 세 번째 부인 파티마 알케트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중 한 명이다.

타눈의 친형은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이고, 친동생은 맨체스터시티 구단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부통령 겸 부총리다.

하지만 두 형제에 비해 타눈의 이름은 UAE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거의 없고, 동업자들과는 비밀유지 계약을 맺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직 미국 국가안보 당국자는 그를 ‘조용하지만 언제, 어디에나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측근으로는 사드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와 미인대회 우승자이자 피트니스 사업가인 멜리사 몬카다 등이 꼽힌다. 말 키우기와 체스 등의 취미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2000조원 금융 제국 세운 ‘UAE 실세’

대중 앞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가 건설한 ‘금융 제국’은 막강하다.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던 타눈은 아버지 자이드의 궁전과 농장, 해외 부동산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금융계에 발을 들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왕가의 투자회사인 ‘로열그룹’을 설립했다.

현재 타눈이 운영하는 자산은 약 1조5000억달러(약 2000조원)로 추산된다. 투자 대상은 스코틀랜드의 풍력발전소와 미국 텍사스의 우주산업부터 팝스타 리한나의 란제리 브랜드, 영국 유명 레스토랑 체인 ‘디 아이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영향력은 금융에 그치지 않는다. UAE가 2000년대 들어 미국과 대테러·정보 협력을 확대하던 상황에서 타눈은 안보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키웠다. 2016년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이후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비롯한 민감한 외교 현안을 주도했다.

‘트럼프 날개’ 달고 ‘AI 큰손’으로 변신

이후 타눈이 새롭게 주목한 분야는 AI였다. 그는 챗GPT를 이용해 자신의 집 전체를 설계했다고 말할 정도로 AI 기술에 큰 관심을 보여왔다. 2018년 타눈은 AI 기업 G42를 설립했다. 회사 이름 속 숫자 ‘42’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슈퍼컴퓨터가 내놓는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에서 따왔다.

G42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AI 거물들과 빠르게 관계를 구축해갔다. 마이크로소프트(MS)·오픈AI·앤트로픽·xAI 등과 투자·협력 관계를 맺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타눈을 “친애하는 개인적 친구”로 칭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왼쪽)와 만나고 있는 타눈(오른쪽). 타눈 SNS 갈무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은 타눈의 AI 구상에 더욱 힘을 실었다. 조 바이든 전 행정부는 UAE와 중국 간 관계를 우려해 첨단 AI 반도체의 UAE 수출을 제한했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뒤집고 지난 7월 첨단 반도체 칩의 UAE 이전을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일가와 타눈의 사업 관계를 둘러싼 이해충돌 논란도 불거졌다. 규제 완화 직전 타눈의 투자회사는 트럼프 일가가 설립한 가상화폐 기업 ‘월드리버티’가 발행한 암호화폐 20억달러(약 3조원)어치를 사들였다. 타눈은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전 월드리버티 지분 49%도 인수했다.

논란을 뒤로하고 UAE는 타눈의 구상대로 AI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 중이다. 오늘날 UAE 해안에는 5GW 규모의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단지가 건설되고 있다. MS와 G42가 지난해 공동 출범한 AI 윤리 관련 ‘책임있는 AI 미래 재단’의 본부 역시 아부다비에 자리 잡았다.

타눈(왼쪽)이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의 초청으로 미국 백악관을 방문했다. 타눈 SNS 갈무리
타눈의 ‘AI 제국’은 과연

다만 타눈을 둘러싸고 제기돼온 인권 침해와 불법 감시 논란은 그가 AI 분야로 영향력을 넓히면서 새로운 우려를 낳고 있다. UAE는 과거 미국 정보기관 출신 인사 등을 동원해 비밀 사이버 정보 조직 ‘프로젝트 레이븐’을 운영한 바 있다. 애초 대테러 작전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후 UAE 정부에 비판적인 활동가와 언론인, 외국 정치인 등을 감시하는 데 활용된 사실이 드러났다.

미라 알 후세인 에든버러대 사회학자는 타눈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AI 산업에 투영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타눈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매우 걱정스럽다”며 “그는 버튼 하나를 눌러 모든 위협을 제거하려는 비디오게임 속 왕자”라고 말했다.

UAE에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고, 노동조합과 파업은 금지돼 있다. 시위하거나 왕실을 모독할 경우 신속히 처벌된다. 인구 상당수를 차지하는 이주 노동자들 가운데 수천명은 매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고 있다. 가디언은 이 같은 UAE의 모습이 곧 타눈이 재편할 세계와 닮아있다고 전했다.

최경윤 기자 c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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