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에게 필요한 건 ‘월급 받는 실패’…사업고용협동조합 만들어 창업 위험 최소화해야”

인류 역사는 다양한 국가의 역사였고, 동시에 다양한 국가론의 역사였다. 국가론은 시대가 직면한 위기에 대응해 등장했다.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론은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사회 안정을 되찾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이에크의 최소국가론은 전체주의 위협 앞에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동아시아 발전국가론은 산업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자원의 투입을 국가가 계획하고 집행하는 체제였다.
20세기 국가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기존 국가론으로는 기후위기와 부의 불평등, 초고령사회, 플랫폼 독점이라는 변화한 상황에 대응하기 어렵다. 21세기 국가는 복합위기에 대처할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연결되고, 개방된 디지털 인프라 위에서 시민이 국가의 설계자이자 운영자가 돼야 한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플랫폼국가연구소 소장)가 최근 펴낸 <플랫폼국가론>(한울)에서 역설한 국가론의 골격이다.
20세기 국가론이 저문 자리에 인공지능 기술을 주도하는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론이 퍼지고 있다. 이른바 기술공화국론이다. 실리콘밸리의 일부 기업가는 민주주의가 전제하는 토론과 합의의 과정은 비효율적이며 자본과 지식을 갖춘 엘리트에 의한 통치가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이런 기술 기업이 물적 자산과 데이터,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는 ‘삼중 사유화’가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경고했다. 인공지능에 따른 이익은 소수 기업에 집중되고 비용 부담은 사회가 지는 ‘디지털 봉건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의 플랫폼국가론은 디지털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지만 맨 꼭대기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건 시민이라는 점에서 이들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 플랫폼국가란 물적 자원과 디지털 인프라를 결합해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인 쿠팡과 같은 모델에 시민의 결정권을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9월 21일 김용진 교수를 서울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나 지금 시대 새롭게 필요한 국가론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플랫폼국가는 삼중 사유화를 해소할 3가지 원리 위에 서 있다. 그러기 위해선 연결성과 개방성 위에 시민성이 더해져야 한다. 시민이 자원의 용도와 활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기존 국가론이 한계가 있다면.
“케인스주의 복지국가는 청년 노동과 안정된 직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가장이 돈을 벌어오면 집안일 하는 사람이 무료로 돌봄과 가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젊은 인구가 노령 인구를 뒷받침하는 구조다. 그게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인데 지금 다 깨졌다. 저출생 고령화, 1인 가구 증가와 함께 플랫폼 노동자 증가했다. 직장을 기준으로 복지 체제를 구축한다는 구상이 유효하지 않다. 케인스주의는 국가가 개입해 총수요를 관리한다. 총수요가 떨어지면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고, 경기가 과열되면 금리를 올려서 안정시키는데, 하이에크는 ‘국가가 뭘 알기에 그걸 하냐’고 생각했다. 경제는 가장 잘 아는 시장에 맡기라고 했다. 규제를 풀고 감세하고 민영화하면 경쟁이 일어나 낙수효과를 누린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했더니 신자유주의 시기 성장률은 복지국가 시절의 절반도 안 된다. 부의 집중은 더 심해졌다. 발전국가는 국가가 자원의 배분 규칙을 정하고 승자를 결정했다. 굉장히 성공적이었지만 지금의 조건과는 맞지 않는다. 분야별로 분절돼 있고, 위계질서가 강해 시민의 자율성과 개방성이라는 21세기가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지 못한다.”
-지금의 위기의 뿌리를 ‘삼중 사유화’에서 찾았다.
“그렇다. 기후위기든 불평등이든 AI·디지털 독점이든 뿌리를 공유한다. 먼저 물적 자원이 사유화됐다. 철도도 도로도 항만도 민영화되면서 시민이 관여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졌다. 플랫폼 기업의 등장과 함께 데이터의 사유화도 문제가 됐다. 21세기 자원은 데이터이고, 개인과 기업이 데이터를 다 만들어내지만 소유권은 이들에게 없다. 누가 내 데이터를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이용하는 쪽은 데이터 독점으로 엄청난 돈을 버는데, 혜택은 아무한테도 돌아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의사결정의 독점이다. 알고리즘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지지만, 그 바탕에 있는 표준을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엘리트와 전문가, 빅테크가 다 장악하고 있다. 기존 국가론으로는 삼중 사유화로 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김 교수는 데이터 사유화와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의사결정의 사유화가 우리 사회를 디지털 봉건제 사회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데이터를 만들면서도 시민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부와 권력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플랫폼 국가란 무엇인가.
“플랫폼 국가는 삼중 사유화를 해소할 3가지 원리 위에 서 있다. 먼저 연결성이다. 데이터와 자산, 제도와 사람, 부문과 부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원리다. 기후위기와 돌봄 위기, 복지와 산업은 이미 깊이 얽혀 있는데, 흩어진 정보와 권한, 예산과 서비스로는 해결이 난망하다. 둘째는 개방성이다. 공공의 자산과 정보, 규칙과 과정이 권력 내부에 갇히지 않고, 시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연결성과 개방성 위에 시민성이 더해져야 한다. 시민이 자원의 용도와 활용을 결정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무엇부터 해야 하나.
“플랫폼국가의 운영 원리를 실현하는 토대는 ‘디지털 트윈’이다. 철도, 항만, 공원, 학교, 병원, 도서관 등 모든 물적 공공자원을 전부 디지털 인프라와 결합한 것이다. 디지털 트윈으로 자원이 연결돼야 효율성이 발생하고, 숨겨져 있지 않고 시민에게 개방돼야 사적 소유로 변하지 않고 시민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디지털 트윈으로 공공 인프라의 작동 방식은 계획·집행·통제하는 한 방향이 아니라 문제를 감지하고, 대안을 만들고, 조정·실행하며 그 결과를 토대로 학습하는 순환 구조가 된다.”
-디지털 트윈을 쉽게 설명한다면.
“일례로 구급차가 환자를 보낼 응급실을 찾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일도 줄일 수 있다. 병상이 얼마나 비어 있고 응급실에 어떤 의사가 있는지 필요할 때 정보를 호출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체계를 갖추면 된다. 중요한 건 데이터를 한 통에 모으는 게 아니라 그 데이터를 갖고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정의하는 것이다.”
-플랫폼국가의 철학적 토대로 ‘비지배 자유’를 들었다.
“애덤 스미스가 야경국가를 말했을 때는 왕과 귀족과 자본가가 수탈해가는 중상주의 국가였다. 그러니 정부한테 간섭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게 자유주의의 자유, 즉 간섭받지 않을 자유다. 왕이 내버려 두겠다고 하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간섭할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자유가 없다고 봐야 한다. 이게 공화주의의 자유, 지배받지 않을 자유다. 또 하나는 관계적 인간학이다. 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오로지 이기심과 경제적 합리성에 따라 행동하는 경제적 인간)를 전제하는데, 이 세상에 개별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개인이 혼자 섬에 살면 무슨 경제가 있겠나. 관계를 무시하는 순간 경제도 가격도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적 인간학에서 연결성이 나오고, 비지배 자유에서 개방성이 나온다. 그런데 연결과 개방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군가 결정을 독점하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걸 통제하는 역할을 시민이 하고, 그 역량을 시민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데이터 배당과 에너지 배당을 들었다.
“플랫폼국가의 마지막 사회적 모습이 기본사회다. 개인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데이터를 보내는 대가로 ‘데이터 배당’을 받을 수 있다. 분산 에너지 체제에서 지역 공동체가 발전 사업에 투자해 만들어진 에너지 배당을 결합하면 기본소득이 된다. 실리콘밸리가 말하는 기본소득과는 다르다. 기술 엘리트들은 ‘기술은 우리가 만들 테니 너희는 쓰기만 해라. 그러면 기본소득도 줄게’라고 말한다. 일론 머스크나 제프 베이조스, 피터 틸이 말하는 것이 그렇다. 그건 결정적으로 디스토피아로 가는 길이라고 본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소득을 얻고, 거기에 내 데이터와 내가 투자한 에너지 인프라에서 소득이 생기는 것이다.”
-플랫폼국가도 감시국가가 될 위험이 있지 않나.
“데이터가 다 보인다는 것은 감시국가로 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통제 가능성을 시민에게 줘야 한다. ‘이게 왜 이렇게 된 거냐’고 물을 수 있는 설명요구권, 그리고 감사추적권이 시민에게 부여돼야 한다. 발전국가가 독재로 간 이유는 그렇지 않아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스스로 자원을 만들고 배분을 결정하고 의사결정까지 한다. 디지털 인프라에서 모인 데이터를 갖고 한다. 운영 주체가 선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선하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지금 사람은 좋았지만 다음에 온 사람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
-플랫폼 국가론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틀로 쿠팡을 들었다.
“쿠팡이 왜 이마트나 롯데마트보다 훨씬 큰 기업이 됐나. 물적 자원과 디지털 자원을 완벽하게 연결하고, 그 위에서 자기네 거버넌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쟁력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져온다. 디지털 플랫폼만 가진 네이버가 돈이 훨씬 많은데도 쿠팡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 의사결정을 쿠팡 혼자 한다. 노동자들은 모든 의사결정에서 배제돼 있다. 지속할 수 있지 않은 구조다.”
그는 플랫폼국가란 결국 쿠팡이 한 일을 국가가 하되 한 가지를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꼭대기에 시민을 올려놓는 것이다. 국가의 자원을 어디에 쓸지 시민이 결정하는 한 예로 창업고용 플랫폼으로서의 사업고용협동조합을 제안했다. 지역별로 기업과 공공이 출자한 사업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그곳에서 청년이 자기 사업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방식이다. 창업에 따른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기업이 요구하는 경력을 쌓을 기회를 제공한다. 데이터·에너지 배당을 합한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창업과 고용을 연결해주는 공공사업 운영을 플랫폼 국가의 주요 역할이라고 봤다.
-프랑스의 사업고용협동조합 모델을 예로 들었는데.
“청년에게는 ‘월급 받는 실패’가 필요하다. 지금 청년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기업은 경험 있는 사람만 뽑는다. 그러면 어디 가서 경험을 하나. 경험이라도 줄 수 있게 해보자는 것이다. 기업과 공공기관, 지자체, 학교가 조합원이 되고,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은 ‘사업자 직원’이 된다. 조합은 작게 사업 아이템을 시험해볼 공간과 창업 과정을 지원하고, 4대 보험과 월급까지 준다. 사업을 하는데 월급을 받는 이상한 개념이긴 한데 실제로 프랑스에서 하고 있다. 성공하면 조합원이 돼 받았던 돈을 돌려주는 선순환 구조다. 여기에 물적 공공자원을 써야 한다. 청년 창업 아카데미부터 창업보육센터, 팁스(TIPS·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까지 공공 창업 공간이 많은데 다 따로 떨어져 효율성이 안 난다. 디지털 트윈으로 올라와 어디가 비어 있는지 알 수 있다면 청년이 들어가기 쉬워진다.”
김 교수는 반도체 초과 세수로 확보한 미래대응기금의 일부를 이런 사업고용협동조합 예산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사업의 첫 실험지로는 제주도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플랫폼국가에서 정부 조직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나.
“핵심은 부처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기후부가 해결할 수 있나. 못 한다. 기획예산처부터 재정부, 과기부, 산업부, 중기부가 다 연결돼야 한다. 무엇으로 연결하나. 문제를 중심으로 연결해야 한다. 관련 데이터가 연계되도록 표준 API(응용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만들어주면 된다. 영국이나 캐나다는 전달체계가 다르다. 내가 겪는 문제를 중심으로 필요한 전달체계가 다 연결돼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부 대표 홈페이지가 사실상 민원 창구에 그친다.”
-한국이 플랫폼국가가 될 수 있을까.
“탁월한 역량이 있다. 공공의 자원을 조직해본 경험이 많고, 거기다 주민등록번호가 있다. 세상의 모든 국민을 다 파악할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 하나다. 복지·교육 등 개인에 관련된 모든 데이터가 붙어갈 수 있는 구조를 가진 거의 유일한 나라다. 돈을 더 쓰자는 게 아니다. 데이터를 한 곳으로 모을 필요가 없다. 지금대로 갖고 있되, 서로 필요할 때 쉽게 호출해 쓸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있는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으로 구조화해야 한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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