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목욕탕 그리고 양자역학[이기진의 만만한 과학]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2026. 10. 5. 23:0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일본 친구가 서울 종로구 서촌에 왔다. 1년 사이에 변한 서촌의 모습을 보고, 특히 사라져 가는 오래된 한옥과 새롭게 생겨나는 가게들을 보더니 한마디했다.

한 예로, 서촌이 달리기의 성지가 되면서 오래된 책방과 음식점, 잡화점이 있던 자리에 신발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서촌에 하나 남은 오래된 목욕탕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일본 친구가 서울 종로구 서촌에 왔다. 1년 사이에 변한 서촌의 모습을 보고, 특히 사라져 가는 오래된 한옥과 새롭게 생겨나는 가게들을 보더니 한마디했다. “시간의 문제네요.” 일본 친구는 매년 서울을 방문해 서촌의 허름한 한옥에서 전시를 여는 예술가다. 지금까지 지켜봐 온 고즈넉한 서촌의 미래가 걱정됐던 것일까?

내가 서촌에 자리 잡은 지도 20년이 되어간다. 어느 순간 동네의 허름한 단골 중국집이 사라지더니 카페와 작은 가게가 하나둘 들어섰다. 그리고 지금 서촌은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다. 한 예로, 서촌이 달리기의 성지가 되면서 오래된 책방과 음식점, 잡화점이 있던 자리에 신발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시간의 문제”라는 표현에는 물리학적으로 고전역학적인 세계관이 숨어 있다. 초기 조건을 알면 미래의 일이 결정된다는 결정론과 연결된다. 그 대표적인 이론이 뉴턴의 운동법칙이고, 이를 철학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 라플라스의 결정론이다. 라플라스는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로, 뉴턴 역학을 발전시켜 우주를 수학적으로 예측 가능한 체계로 바라봤다. 라플라스에게 미래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계산되지 않은 것이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을 뿐 이미 현재 속에 들어있다는 의미다.

양자역학적 해석은 어떨까? 양자역학에서 미래는 확률로 주어진다. 현재의 상태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는 계산할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확률적으로만 예측할 뿐이다. 20년 전의 내가 미래의 서촌에 신발가게가 줄지어 들어설 줄 알지 못했던 것처럼, 서촌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서촌에는 공중목욕탕이 두 곳 있다. 통의동의 ‘인왕탕’과 통인시장 후문에 있는 ‘송림사우나’다. 나는 주말이면 인왕탕에 다녔는데, 어느 날 인왕탕이 여성 전용 목욕탕이 되어, 나도 송림사우나로 자리를 옮겼다. 송림사우나에서는 통인시장에서 자주 보던 가게 사장님들을 만난다. 평소에는 인사만 나누던 사람도 목욕탕에서 만나면 묘한 연대감이 생긴다. 나에게 목욕탕은 생각하는 곳이라기보다 비우는 곳이다. 마음을 제로의 상태로 돌려놓는 곳이다.

송림사우나에는 내가 높이 평가하는 시설이 하나 있다. 천장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기면 폭포처럼 냉수가 쏟아지는 폭포수다. 목욕을 마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때면 이 폭포수로 마무리한다. 이 시설이 없었다면 아마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시간이 우리를 이미 정해진 미래로 데려가는 것은 아니다. 서촌의 미래를 시간의 문제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한옥이 사라질 수도 있고, 오래된 식당이 사라진 자리에 신발가게가 들어설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상실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풍경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서촌에 하나 남은 오래된 목욕탕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다. 양자역학을 공부한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시간의 문제일 테지만.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