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인’ 장기 생존 시대···두려움에 연 끊어냈으나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창간 80주년 기획]

하주언 기자 2026. 10. 5.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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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단절과 통제 속 HIV 생존자 1만7000여명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 장기 생존자인 A씨가 지난달 21일 서울 중랑구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50세 이상 7632명…전체의 43%
고립·빈곤 겪으며 세월 보낸 환자
‘서로돌봄’ 활동에 건강 되찾기도
방문·병원 동행…‘감염인 간’ 지원
약 복용 땐 에이즈 진행 안 되는데
의료 현장조차도 감염인 차별 반복
민간 중심 돌봄서 제도적 강화 필요
치료·일상·자립 지원 요구 목소리

지난달 21일 오전 서울 중랑구 한 반지하. 침대에 걸터앉은 A씨(58)가 손가락을 하나둘 접으며 기억하는 전화번호를 셌다. “어머니, 형, 누나 그리고…” 네번째 손가락이 접힐 때쯤 셈이 멈췄다.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건 15년 전쯤이다.

접힌 손을 바라보던 A씨는 올해 7월에 멈춘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죽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부터 번호를 바꾸고 단절한 거죠. 지금껏 안 죽고 살아있을 줄 알았다면…” 달력 옆 누런 벽지 곳곳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A씨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이다.

장기생존자 절반 가까이가 ‘50대 이상’

치료 기술 발전으로 HIV에 감염됐으나 장기 생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와 맞물려 고령층 감염인도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예방 등에만 초점이 맞춰진 현행 제도와 사회적 편견은 이들의 고립을 고착시키고 있다. 이들이 원만하게 일상을 살아가도록 치료와 돌봄 등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질병관리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HIV에 감염된 상태로 생활하는 내국인(누적 생존 감염인)은 2012년 7678명에서 지난해 1만7557명으로 증가했다. 신규 감염인 수는 내·외국인을 포함해 2019년 1223명에서 지난해 927명으로 줄어드는 등 감소세다. 이는 감염인의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감염인의 고령화도 눈에 띈다. 지난해 기준 50세 이상 감염인은 7632명으로 전체의 43.5%를 차지했다. 60대 감염인은 2012년 616명에서 지난해 2603명으로 4배 이상, 70대 이상은 같은 기간 196명에서 1228명으로 6배 넘게 늘었다.

A씨도 HIV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 30년에 이르렀다. 건설업에서 일하던 A씨는 1996년 허리 수술을 앞두고 찾은 병원에서 감염 사실을 알게 됐다. 오늘날 HIV는 고혈압·당뇨처럼 약 복용으로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분류되지만, 당시만 해도 죽는 병으로 여겼다. 생존 기간이 “길어야 5년”이라는 의사의 말에 A씨 스스로 시한부로 여기며 살아왔다.

A씨는 “혼자 고민만 깊어지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매일 저녁 술만 마셨다”고 회상했다. 결국 마흔두 살이 되던 해에 동료의 만류를 뒤로하고 일터를 완전히 떠났다.

감염으로 인한 낙인은 고립과 빈곤으로 이어졌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생각에 감염 사실을 숨기며 지인들과도 멀어졌다. A씨는 “사람을 피하게 됐고 시장에 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며 “도시 한복판에 살면서도 세상과 단절된 자연인과 다를 바 없었다”고 말했다. 병원 문턱은 높았다. 조기 치료 시기를 놓치며 10여년 사이 몸의 면역 체계가 무너졌다. 건장한 체격으로 85㎏에 이르렀던 몸무게는 41㎏까지 줄었다.

A씨의 ‘삶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건 또래 감염인 이세현 활동가(57)를 만나면서다. 두 사람은 지난 7월 사단법인 ‘함께서봄’의 서로돌봄 사업을 통해 연결됐다. 돌봄 활동가들은 모두 일정한 교육을 이수한 중장년층 감염인들로 구성된다. 주로 A씨처럼 가족관계가 단절됐거나 이동이 어려운 ‘돌봄 사각지대’ 감염인들을 돌본다.

비감염인이 감염인 돌봄에 나서는 일은 드물다. 감염인 자신도 비감염인에게 돌봄을 받는 것이 편치 않기도 하다. 감염인 간 돌봄은 방문과 주거 지원 등 다양하지만 병원에 동행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이세현 활동가는 “비감염인 도우미와 함께 감염내과에 가면 진료과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 감염 사실이 쉽게 드러난다”며 “이를 알게 된 비감염인이 돌봄을 거부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감염인 스스로 지역사회에 소문이 퍼질까 불안해한다”고 말했다.

A씨는 이 활동가와 함께 병원을 오가고 치료제를 복용하면서 건강이 빠르게 호전됐다. 몸무게는 병원 동행 한 달 만에 41㎏에서 55㎏으로 늘었다. A씨는 바짓단과 소매를 걷어 올리며 “살이 이만큼 차올랐다. 약이 이렇게 좋은 줄, 감염되어도 오래 살 수 있는지 옛날엔 몰랐다. 이제는 혼자서 병뚜껑도 쉽게 딴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를 두고는 “의사 말을 나보다 더 빨리 알아듣고, 내 말이 막히면 대신 정리해서 물어봐주는 선생님”이라고 설명했다.

장기 생존자 증가에 따른 감염인 고령화에 맞춰 돌봄 사각지대 해소와 복지망 강화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강고한 사회적 편견과 배제는 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HIV를 AIDS(에이즈)와 구분하지 못하고 ‘죽는 병’으로 바라보는 오해는 여전하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체내 바이러스가 억제돼 HIV가 에이즈로 진행되지 않아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혈액 내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으면 성 접촉을 통해서도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오래전에 확립됐다.

이러한 의학적 요인을 잘 알고 있는 의료 현장에서조차 차별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일부 병원과 요양시설은 다른 환자들의 시선이나 감염 관리를 구실로 감염인 대상 진료와 수술, 입원 등을 거부한다. “다른 큰 병원에 먼저 다녀오라”는 식이다. 감염인들이 수술 거부 등 차별 시정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계속 진정을 내는 이유다.

정민석 함께서봄 활동가는 “2026년 지금도 3차 대형병원에서조차 협진 수술을 거부당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넣어도 결론까지 한참 걸리고, 감염내과 치료는 계속 받아야 하니 문제 제기를 강하게 하기도 어려워 딜레마”라고 말했다.

A씨가 복용하는 약이 담긴 봉투. 권도현 기자

‘지원·돌봄’으로…법률 전부개정 추진

민간단체 중심으로 하던 HIV 감염인 돌봄을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내용의 법률이 추진되고 있다. 서미화 의원은 현행 ‘에이즈예방법’을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 예방 및 감염인 지원에 관한 법’(가칭)으로 전부개정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개정안의 취지는 에이즈 예방·관리 위주의 현행 내용을 개선하는 것이다. 치료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에이즈로 이어지지 않는 HIV 감염인의 건강·일상을 장기 지원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취지다. 서 의원은 HIV 감염과 에이즈의 명확한 구분, 감염인의 건강권과 치료권, 감염인 실태조사와 정책 참여 보장 등을 법안에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서 의원은 “HIV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이들이 고령화되고 있지만, 법률과 정책은 여전히 에이즈 예방과 감염인 관리 관점에 머물러 있다”며 “감염인을 관리·통제 대상으로 보는 법에서 벗어나 감염 예방과 함께 치료와 일상 및 돌봄과 자립을 지원하는 법체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A씨처럼 삶의 의지를 되찾고자 하는 감염인들에게 제도 변화와 이에 따른 인식 개선은 큰 힘이 될 수 있다. A씨는 “원래는 ‘2년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뒤 환갑이 지나 국민연금이 나오면, 그간 죽을 끓여다준 윗집 이웃에게 보증금이라도 쥐여주고 떠나려고 했다”며 “지금은 5년이고 10년이고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 10㎏만 더 찌워보자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하주언 기자 e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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