칩 리스·자산담보 대출...AI 투자 폭주에 ‘빅테크 금융공학’ 총동원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빅테크와 반도체 기업들이 투자 속도는 유지하면서 재무 부담을 낮추기 위한 금융 기법을 잇달아 동원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AI 반도체에 들어가는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나자 GPU(그래픽 처리 장치)와 TPU(텐서 처리 장치), 서버 등을 직접 사서 보유하는 대신 특수목적법인(SPV), 리스, 담보 대출 등 다양한 금융 기법을 활용해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SPV는 특정 거래 하나만을 위해 만든 서류상 회사다. 자산을 이 회사에 따로 담아두면, 문제가 생겨도 위험이 이 회사 안에만 생기고 모회사로 번지지 않는다. 다만 이런 방법이 오히려 AI 투자 부담을 은행·사모펀드·보험사 등 금융시장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GPU·TPU까지 ‘금융 상품’으로
3일(현지 시각)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아마존은 약 80억달러(약 11조원) 규모의 엔비디아 최첨단 AI 반도체를 별도 법인에 넘긴 뒤 다시 빌려 쓰는 방안을 투자자들과 협의하고 있다. 미국 10여 개 데이터센터에 이미 설치되어 돌아가는 엔비디아 ‘그레이스 블랙웰’ 칩 수천 개를 SPV에 팔고, 아마존이 같은 칩을 다시 장기간 빌려 쓰는 세일앤리스백(매각 후 재임차) 구조다. 회사가 비싼 승용차나 비행기를 직접 사지 않고, 렌터카 업체가 차를 사게 한 뒤 매달 월세를 내고 이용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SPV는 주로 외부 투자자에게 채권을 발행하거나 일부 지분을 매각해 칩 구매 자금을 마련한다.
아마존이 이 같은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막대한 AI 투자비를 모두 직접 부담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아마존은 올해 자본 지출 규모를 2200억달러로 예상하고 있으며, 상당 부분을 AI 인프라에 투입할 계획이다. AI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투자를 늦출 수 없지만, 수백억 달러어치 GPU와 서버를 모두 직접 사서 보유할 경우 현금 흐름과 재무제표에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아마존의 최근 12개월 잉여현금흐름(영업으로 번 돈에서 투자비를 뺀 금액)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AI 반도체 자체를 금융 자산처럼 활용하는 시장도 생기고 있다. 구글 TPU나 엔비디아 GPU의 가치와 장기 사용 계약 등을 담보로 은행·사모펀드가 자금을 대는 방식이다. 지난 5월 아폴로와 블랙스톤이 주도한 350억~360억달러 규모 사모 대출도 구글 TPU를 사들여 앤스로픽에 빌려주는 구조다. 항공기·부동산처럼 AI 반도체도 대형 금융 거래의 기초 자산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막대한 AI 인프라 비용에 부담을 느끼는 고객들이 자사 칩을 계속 구매할 수 있도록 직간접적으로 금융을 지원하고 있다. AI 기업들이 한꺼번에 수십억~수백억 달러의 설비 투자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경우 칩 구매를 늦추거나 규모를 줄일 수 있는 만큼, 금융사와 함께 구매 자금을 마련해 수요를 뒷받침하겠다는 것이다. 가령 브로드컴은 최근 월가 대형 금융사들과 함께 앤스로픽 등 AI 기업의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장비 구매를 지원하기 위한 600억달러(약 85조원) 규모의 금융 패키지를 추진하고 있다. 엔비디아도 지난 8월 블랙록·블랙스톤 등 6개 금융사와 손잡고, 자사 칩을 사는 고객에게 자금을 대주는 금융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자동차 회사가 자사 차를 사는 고객에게 저리 할부 금융을 연결해주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 같은 금융 공학은 원래 데이터센터 건물과 전력 인프라에서 먼저 확산했다. 빅테크가 수십조 원을 들여 데이터센터를 직접 소유하는 대신 별도 법인에 자산을 넣고 사모펀드·보험사·은행 등의 자금을 끌어들인 뒤 장기간 임차하는 방식이다. AI 투자비가 계속 늘면서 이런 구조가 이제 데이터센터를 넘어 서버와 반도체까지 내려오는 추세다. 기업 입장에서는 대출을 많이 받아 신용 등급이 떨어지는 위험을 피하면서도 AI 투자를 이어갈 수 있다.
◇투자는 계속하되 신용 등급은 지켜야
이처럼 각종 금융 기법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기업의 기존 자금 조달 방식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 AI 투자 규모가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주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누적 AI 인프라 투자액이 2031년까지 9조달러에 근접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데이터센터와 발전·송전 설비뿐 아니라 GPU와 서버 역시 기술 발전에 따라 수년마다 최신 제품으로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 투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으로 인해 AI 투자 위험이 기술 기업을 넘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국제결제은행(BIS)는 AI 투자가 불투명한 부채 구조와 결합하면서 예상했던 수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새로운 금융 안정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로이터통신은 “AI 관련 회사채 발행이 급증하면서 투자자들이 AI 기업 채권에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는 등 경계감도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AI 붐을 떠받치기 위해 은행·사모펀드·보험사 등 외부 자본이 대거 들어올수록, 투자 실패 때 손실 역시 실리콘밸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투자 부담을 장부 밖으로 옮긴다고 실제 위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빅테크들이 칩이나 데이터센터 가치가 떨어질 경우 손실 일부를 떠안는 ‘잔존가치 보증’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신용평가사들도 장부 밖 거래까지 반영해 기업의 실제 부담을 따지고 있다.
AI 기업과 반도체 업체가 서로의 투자와 구매를 지원하는 구조를 두고는 ‘순환 금융(circular financing)’이라는 지적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BIS에 따르면 조사 대상 AI 기업 1246곳이 받은 자금의 절반 이상이 다른 AI 기업에서 나왔고, 투자 관계와 칩·클라우드 구매 같은 상업적 거래가 서로 얽힌 사례가 적지 않았다. BIS는 “이런 구조가 실제 최종 수요가 얼마나 강한지를 가리고, AI 호황의 지속 가능성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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