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되새김질]톰 크루즈는 실패한걸까…의도된 삽질 ‘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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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때 말 못한 볼만한 영화를 되새겨 봅니다. 두번째는 현지의 혹평과 흥행 실패에 톰 크루즈의 역대급 흑역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이는 영화 '디거'입니다.
톰 크루즈 말마따나 "듣도 보도 못한 영화"란 점에서 '디거'는 문제작이다.
그런데 톰 크루즈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삽질'하는 블랙 코미디만을 기대한 관객은 영화가 품고 있는 다층적 설정에 어안이 벙벙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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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때 말 못한 볼만한 영화를 되새겨 봅니다. 두번째는 현지의 혹평과 흥행 실패에 톰 크루즈의 역대급 흑역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이는 영화 ‘디거’입니다.
※기사에 스포일러가 암시돼 있습니다.
영화 ‘디거’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영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가열찬 풍자를 기대했다면, 첫 번째 반전에 김이 새고 만다. 반대로 영화의 과격한 조롱과 끝없는 수다에 지칠 사람도 부지기수다. 트럼프주의자나 안티-트럼프주의자 모두 난색을 표할 영화라는 얘기다.
두 가지 경우에 속하지 않는 관객이라면 어떨까. 기후 위기, 석유 산업, 권력과 미디어까지. 대다수 관객들은 영화가 건드리는 각종 분야에서 자신의 위선에 뜨끔할 수 있다. 수많은 난관을 견딘 선량한 관객들도 이제까지 봐왔던 것을 다시금 재정립시켜야 하는 영화의 마지막 반전에 허탈하거나 화가 날지 모른다.
톰 크루즈 말마따나 “듣도 보도 못한 영화”란 점에서 ‘디거’는 문제작이다. 문제를 감수했다는 점에서, 정확히는 실패를 감수했다는 점에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주연 배우 톰 크루즈의 과감한 시도는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건 톰 크루즈의 외양 변화다. 벗겨진 이마에 듬성듬성 난 흰머리. 쳐진 얼굴에 두툼한 뱃살, 틈만 나면 “우리 선조가 땅을 파서 석유가 나온거야”라고 열변을 토하는 밉살스런 꼰대 할아버지. ‘디거’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미남 배우 톰 크루즈는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탐욕으로 지구를 재앙에 빠뜨린 괴짜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톰 크루즈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삽질’하는 블랙 코미디만을 기대한 관객은 영화가 품고 있는 다층적 설정에 어안이 벙벙해질 것. 현 시대를 풍자하는 재난 소동극이란 외피만 봤을 때는 아담 멕케이의 ‘돈 룩 업’이 연상된다. 그러나 세련되게 상대편 진영만을 겨냥했던 ‘돈 룩 업’과 달리 ‘디거’는 무차별 난사를 택했다.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이 초래한 대재앙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 30여분간 영화는 사정없이 현재의 미국을 비웃는다. 록웰은 세계 표준인 미터는 모르고, 인치만 아는 전형적인 미국인. 이름부터 ‘디거(땅파기)’인 그는 삽을 든 채 선조들의 개척시대 성공 신화를 읊으며, 세계의 중심이 자신이라는 오만으로 무장한 미국 자체를 표상한다.
존 굿맨이 연기한 미국 대통령은 어떤가. 트럼프 대통령 판박이다. 대통령과 관료들이 록웰과 대책 회의를 하는 광경은 태평양 건너 한국 관객이 봐도 걱정될 정도로 노골적으로 트럼프 행정부를 조롱한다.
모든 나쁜 일은 러시아 때문이고, 중국이 만악의 근본이라며 두려워하며, 불편한 일은 얼간이 부통령(마이클 스털버그)에게 맡긴 채 자신의 안위만 염려하는 영화 속 대통령의 모습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다짜고짜 빙하를 미사일로 쓸어버리자는 군 장성이나 관료 회의가 끝난 뒤 안수기도를 하는 목사의 모습도 마찬가지.
톰 크루즈를 비롯한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연기한다. 극단적인 로-앵글로 잡힌 이들은 하나 같이 광대로 보인다. 이들의 과장된 연기가 거슬릴 때쯤 갑자기 디거 록웰의 저택 밖에 서 있던 나무 한그루가 무너지고,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후 영화는 이냐리투 감독의 대표작 ‘버드맨’이 연상되며, 새로운 양상으로 뻗어 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기존 디거 록웰 서사도 계속 파국으로 돌진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소유한 석유 회사의 무리한 석유 시추로 발생한 폭발 사고로 거대한 빙하 덩어리가 유럽 대륙에 돌진하고, 졸지에 인류의 공적이 된 록웰은 반성은커녕 세계의 구원자를 자처하며 위기 돌파를 시도한다.

뒤틀린 서사의 혼돈에서 막이 내릴 때까지 멱살 잡고 극을 끌고 가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은 톰 크루즈는 혼신의 연기 차력을 펼친다. 그리고 배우로서 이정표를 남기려고 작정한 듯 연기했다. 오스카 레이스에서 밀려나 있다는 보도에 괜히 우리가 미안해질 정도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던 이냐리투 감독은 또다시 할리우드 스타를 위한 성대한 ‘연기 밥상’을 차렸다.
특히 유럽 의회를 상대로 펼치는 록웰의 10여 분간 일장연설은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록웰은 자신이 무리하게 석유를 시추한 것은 차를 몰고, 휴대폰을 보며, 편리한 생활을 즐기려는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서라는 논리를 펼친다. 그러면서 인류는 언제나 대자연과 대결하면서 문명이 발전해왔고, 이번 역시 대자연과 대결해야 하며, 자신이 대자연과 한판 대결을 앞둔 영웅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궤변은 몰염치하지만, 뜨끔하게 된다.
석유 등 에너지가 환경에 나쁜 것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활용하고 있는 인류 대다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 톰 크루즈는 내한간담회에서 “이 장면을 위해 트레일러에서 먹고 잘 정도로 연습을 되풀이했”고 “촬영할 때는 재즈 연주하듯 자유롭게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지나치게 기교적이다. 너무 과시적이란 비판은 이해가 간다. 왜 트럼프 정부를 이렇게도 노골적으로 조롱했을까, 왜 기후 위기 상황에서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훈계하듯 설파했을까. 이냐리투 감독의 ‘모두까기’가 정리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생각에 이를 때쯤 영화는 또 한 번의 반전을 내놓고, 이 반전으로 새로운 의미가 영화에 덧입혀진다.
요컨대 이냐리투 감독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기후 위기 등 현실이라는 재료를 버무려 강렬한 영화적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영화는 가상이지만 현실의 반영이니까.
톰 크루즈, 존 굿맨, 제시 플레먼스, 산드라 휠러 등 배우들은 호연으로 현실보다 강렬한 순간을 ‘이따금’ 만들어낸다. 영화 속 각종 재난의 모습이 뉴스 화면으로 TV 모니터에 비치는 점을 주목하자. 인류가 앞으로 직면할 현실의 고난처럼 느껴진다.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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