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가난 속에서도 '가능한 사랑'이 있을까 [책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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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걸 훔칠 수도 있을까요. 빛나는 성취나 부와 명예 말고 초라한 것, 고통스러운 것,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것.
든든한 아버지를 둔 상우, 부자 남편을 둔 예지의 자리에 우리는 스스로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을 대입해볼 수 있습니다.
진심어린 속내 같은 걸 털어놓는다고 상훈과 '나'가, 예지와 미옥이, 호석과 상우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평행우주만큼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이들이 잠시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달을 바라본다고 해서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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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걸 훔칠 수도 있을까요. 빛나는 성취나 부와 명예 말고 초라한 것, 고통스러운 것,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것. 이창동 감독의 신작 영화 <가능한 사랑>을 보고 나니 세상엔 빼앗길 수 없는 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 (조여정 역)는 해고 노동자 부부 미옥 (전도연 역)의 불행을 훔치려 합니다. 포획 도구는 카메라, 이들의 이야기는 예지의 첫 다큐멘터리 영화 소재가 될 예정입니다. 예지의 카메라는 아름다운 '선의'로 중무장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대기업 정리해고로 길바닥에 나앉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자살한 해고 노동자의 빈소에서도, 미옥 남편의 오열이 울려 퍼지는 수풀 너머로도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었습니다.
비싼 고기를 턱턱 사주고 근사한 별장으로 초대하는 명분은 더 우아합니다. 예지는 말합니다. "나는 저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라포 (Rapport, 마음을 터놓는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 먼저 무언가를 베푸라는 건 오래된 취재 기법이기도 합니다. 단지 진솔한 이야기가 시작되려고 할 때쯤 헬리콥터 소리에 목소리가 묻히지는 않을지, 카메라는 제대로 켜져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할 뿐입니다.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을 땐 녹화 버튼을 꺼버리고, 미옥의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엔 외칠 뿐입니다. "컷!"
예지는 일찍이 촬영 협조 설득에 성공한 미옥에 이어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던 미옥의 남편 호석 (설경구 역)으로부터도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를 듣는 데 성공합니다. 묵직한 고통을 담은 서늘한 절규를 직관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그들의 우정을 축하하듯 카메라의 REC (녹화중) 버튼이 깜빡입니다. 소설가 박완서의 1975년작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이 떠오른 건 그때였습니다. 눈을 몇 번이고 비비며 다시 읽게 되던 결말 속 '상훈'의 충격적 면모도.
소설의 배경은 1970년대, 봉제공장에 다니는 '나'는 도금공장에 다니는 상훈과 달동네 단칸방에서 동거를 이어갑니다. 가난뱅이들끼리 모여 녹록지 않은 생활이지만 '나'는 누구보다 씩씩합니다. 매일을 성실한 노동으로 채워가며 구슬땀으로 마치는 하루는 가끔 좀 살맛나는 것도 같습니다. 일상을 견디게 하는 큰 기대 중 하나는 함께 가난을 헤쳐나가는 상훈이 언젠가 도금된 목걸이와 함께 건넬 것만 같은 소박한 프로포즈입니다.
그런데 이 동거남이 자세히 볼수록 어딘가 이상합니다. 어느 날 공장 동료가 폐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하는 목소리가 담담합니다.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푼돈이라도 모아 도와야 하지 않느냐고 닦달해 봐도 반응은 영 심드렁합니다. 더 놀라운 건 다음날,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곤 둘의 전재산 3만여 원이 든 예금통장 잔고를 몽땅 동료에게 갖다 바쳤다고 전하는 태연한 얼굴입니다. 당시로선 푼돈과는 거리가 먼 거금인데도 어째 그 화통한 씀씀이가 마음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기괴한 이물감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소설 후반부에야 밝혀지건대 상훈은 사실 가난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정체는 부잣집 도련님이자 번듯한 대학생,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곱게 자라는 것 같다며 "어디 가서 고생 좀 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걱정 어린 등살에 떠밀려 잠시 무일푼으로 집에서 가출, 아니 외출했을 뿐입니다. 3만 원 쯤이야 없어도 그만, '푼돈'이라도 모아보라던 말을 어찌보면 착실하게 따른 셈입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는 고통 속에선 무언가를 베푸는 일도, 당장의 불편함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덕분에 '돈 주고도 못 할 경험'을 무사히 마쳤다고 고마움을 표하는 상훈은 미련 없이 후련해 보입니다.
상훈은 심지어 마지막 호의까지 베풉니다. 집에 돌아가 아버지께 빈민굴에서 만난 여자의 딱한 사정을 전했더니, 그 '끔찍한 생활'을 청산하도록 우리 집에서 잡일이라도 시키자고 하셨다는 겁니다. 이제 봉제공장 같은 건 그만 다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선의는 궁금했던 음식을 먹어 치우곤 내뱉는 냄새나는 트림 같습니다. 청춘의 가난을 자부심으로 견디던 '나'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 박완서 <도둑맞은 가난> 중
상훈과 예지 중 그래도 누가 더 나은 인간일까 고민해보다, 그래도 예지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집니다. 예지는 보는 내내 관객에게 불쾌감을 유발하지만, 그 과정이 "거, 가난 체험 잘 하고 갑니다!"는 한줄평을 육성으로 선사한 상훈만큼 경우 없지야 않았습니다. 하지만 둘다 상대의 무언가를 훼손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닮았습니다. 자신이 베푼 호의가 못내 뿌듯해 보인다는 점에서도 그러합니다. '컷’을 외치고 나면 포르쉐를 타고 귀가하면 그만인 예지의 쾌적한 얼굴에 시한부 단칸방 생활을 끝마친 대학생 상훈이 겹칩니다. 그건 둘이 유독 무지해서라기보다, 얼마간의 조심성을 갖췄다 한들 안전한 지대에서 바라보는 타인의 고통은 애초에 '체험'일 수밖에 없기 때문도 같습니다. 든든한 아버지를 둔 상우, 부자 남편을 둔 예지의 자리에 우리는 스스로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을 대입해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회적 계급 사이에선 무언가를 베푸려는 일이 동시에 다른 것을 빼앗는 일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합니다. 미옥 부부의 처지 개선을 돕고자 하던 예지의 마음만은 진심이었고, 미옥은 그 덕에 난생 처음 마이크 앞에 서 지나온 삶에 서사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지는 분명히 미옥과 호석이 고단함 속에서도 지켜오던 무언가를 도둑질했습니다. 카메라가 훔쳐 담은 순간들도 예지의 메모리카드 속에 사뿐히 안착했습니다. 그걸 지우지 않는 이상 둘의 고난은 언제까지고 영화의 든든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 '썰 풀 거리'로서의 빈민가 여성과의 단칸방 체험처럼,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처럼.
형법상 절도죄는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는 경우에 성립한다는데, 재물 말고 '재물 없음'을 훔칠 수도 있다니 마음이 막막합니다. 진심어린 속내 같은 걸 털어놓는다고 상훈과 '나'가, 예지와 미옥이, 호석과 상우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평행우주만큼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이들이 잠시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달을 바라본다고 해서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그런 결말은 아무리 '사랑밖에 난 몰라'를 함께 열창해도, 서로를 '야, 이년아!'라고 불러봐도 조금은 멀게 느껴집니다.
타인의 고통을 전해 듣는 일이 고통을 구경하는 일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지, 그의 삶을 나의 무엇으로 가져오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훔치고 있는 것일지. 훔치고 빼앗기는 관계에서도 가능한 사랑이라는 게 있을지. 일주일이 넘도록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영화 '가능한 사랑'은 오늘(4일)을 끝으로 2주 간의 극장 상영을 마친 후 11월 6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됩니다. 청소년 관람불가.
[MBN 문화부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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