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묘 더봄] 베개
때때로 다른 세상의 힘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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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한 물기가 천천히 번져왔을 때야 나는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내려놓은 머리는 전에 없이 무거웠다. 사람에게서 표정이 지워지고 나면 남는 것은 무게와 체온, 숨, 그리고 소금기 머금은 물기뿐이다.
여자는 깨어 있기 싫을 때 나를 찾아왔다. 세상에서 잠시 지워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억울한 날에는 이를 악물었고, 계속 뒤척이며 울음을 삼키는 날에는 목덜미가 뜨거웠다. 몹시 지친 날에는 머리를 '놓는' 대신 거의 '떨어뜨리듯' 내게 파묻혔다.
아일랜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넘게 좁은 시트에 갇혀 있던 여자는 곯아떨어졌다. 여자의 잠든 모습은 그녀가 견딘 긴 하루의 고백이다. 표정이 사라지고, 미간이 풀리고, 침을 흘리고, 때론 어린아이처럼 웅크리고, 그리고 머리의 무게로 말한다. 잠들 때면 늘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였고, 깊이 가라앉을수록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나만 침대 한쪽에 덩그러니 남겨두곤 했다.
그런데 지금, 입술을 조금 벌린 채 나를 누르고 있는 것은······ 나인가.
나는 여자의 뒤통수를 받치고 있었다. 동시에 여자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어떤 무게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나 평생 자신의 잠든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는 법인데, 여자는 침대 위에 누운 자신의 지친 얼굴을 낯선 유체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상하다.
누군가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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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에는 왜 가는 거야?
갑자기 휴가를 내자 부장이 물었다. 여자는 그냥 여행이라고, 바람과 오래된 성벽을 보러 간다고 했다.
정말일까.
여자는 자신이 뱉은 말조차 뒤늦게 의심하곤 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에요.'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남자가 남긴 그 말 때문이었다. 얼마 전 타로수비학 줌파티 화면 너머에서 '0번 바보(The Fool)' 카드를 들고 나타난 남자. 일면식도 없는 남자의 말 한마디를 믿고 아일랜드행 비행기를 탄다?
그럴 수 있나?
여자는 그럴 수도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사는 일에 매번 목적과 의미를 붙이는 일이 지겹다기보다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야말로 삶의 무게 따위가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낡은 봇짐 하나를 어깨에 지고 낭떠러지 끝에 서서 위태롭게 웃는 카드 속 남자. 그의 등 뒤로 고대 마법서와 연금술, 황금새벽회의 암호 같은 말들이 흘러갔다.
화면 속에서 여자는 퉁퉁 부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사람들이 보는 내 얼굴이 저렇구나. 자기 얼굴을 똑바로 보는 일이 언제나 무서웠다. 비디오를 끄자 검은 화면 위에 여자의 이름만 하얗게 떠올랐다. 묘비명 같았다.
잠깐 졸다가 깨어 보니 남자는 아일랜드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화면에서 사라졌다. 줌파티가 끝난 뒤에도 남자의 말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일랜드로 떠난다.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여자는 남은 연차와 휴무를 끌어모아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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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허 절벽에 서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거나,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벌어질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개구리로 변신하지도 않았고, 목구멍에서 마법의 흰토끼가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남자가 0번 바보 카드처럼 배낭을 메고 떠도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과 관광객들뿐이었다. 사람들은 절벽 아래 물결 따라 출렁이는 빈 배를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었다.
바람에 밀려 휘청거리던 여자는 절벽 가까운 바위에 주저앉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절벽의 허공이 거꾸로 여자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남자 역시 이 바람 속으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여자는 생각했다.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길을 잃은 게 아니에요.
잠시 엉뚱한 부빙에 올라타
얼음과 함께 떠돌았을 뿐이에요.
남자의 인스타그램에는 사진도 없이, 아무 설명도 없이 세 줄 글이 올라와 있었다. 여자가 호텔 침대에 벌렁 드러눕는 순간, 모허 절벽이 다시 여자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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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머리가 왜 이렇게 무겁지……. 여자는 잠꼬대처럼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다. 여자의 머리가 나를 조금 더 깊이 꺼지듯 눌렀다. 참 이상한 일이다. 사람은 머리를 어딘가에 내려놓은 뒤에야 자기 머리의 무게를 알아챈다. 평생 목 위에 얹고 다니면서도 그 무게를 모른다.
나는 여자가 쓰러진 만큼 낮아진다. 울면 젖고, 뒤척이면 밀리고, 끌어안으면 몸통을 내주고, 주먹으로 누르면 찌그러지며 여자의 몸부림을 받는다.
여자는 웅크린 가슴에 나를 끌어안았다.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아닌, 아주 느리지만 여자의 심장이 뛰는 박동 소리였다.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며 여자는 생각했다. 자신이 커다란 바퀴벌레로 변하지도 않았고, 침대 밑에 벗어놓은 양말이 악어가 되지도 않았고, 아일랜드 요정이 침대 탁자에 놓인 목걸이를 훔쳐 가지도 않았다. 벽도 장롱도 그대로였다. 창문 옆 작은 서랍장도 눈에 익었다. 며칠 동안 묵었던 아일랜드의 호텔과 방 안의 가구가 다르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집에 돌아왔구나. 나는 침대 위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아니, 여자가 미끄러진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머리가 놓여 있던 곳이 움푹 패 있었다. 손을 대보니 체온처럼 미지근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자국은 사람의 머리 모양이 아니라 낭떠러지 끝에 남겨진 작은 빈자리처럼 보였다.

여성경제신문 김정묘 작가·시인·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kkmyo@hanmail.net

김정묘 작가·시인·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시와 소설을 쓰며, 명상과 소리선, 글쓰기를 접목한 '글테라피' 문학치유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글쓰기 명상'을 통해 참여자 내면의 소리를 회복하도록 돕고 있다. 시집 <하늘연꽃> 외, 소설집 <지금산에 사는 벽려씨>, 산문집 <마음 풍경> 외, 숏-필름(미니픽션 영상) - <오래된 어제> <뼈의 내력> <새의 길> <빗소리> 등이 있다. 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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