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시론] 반도체 호황이 안긴 ‘뜻밖의 선물’…곳간부터 채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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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내년도 국세수입을 584조4000억원으로 전망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날 세수 가운데 최근 10년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162조3000억원은 '미래대응기금'에 넣는다.
금융위기나 전쟁, 팬데믹이 닥쳤을 때 재정 여력이 있는 정부는 과감하게 대응할 수 있다.
우리도 무엇이 일시적 세수인지를 정부 혼자 정하는 것은 피하도록 하고, 기금을 꺼내 쓰는 조건을 미리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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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법무법인 세종 고문))
정부는 내년도 국세수입을 584조4000억원으로 전망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날 세수 가운데 최근 10년 내국세 추세를 웃도는 162조3000억원은 '미래대응기금'에 넣는다. 45조4000억원은 청년·성장동력·지방·교육에 투자하고, 12조5000억원은 국채 발행을 줄이는 데 쓰며, 104조4000억원은 여유자금으로 남긴다. 아직 걷히지 않은 세수에 근거한 계획이지만, 반도체가 우리 재정에 드문 여유를 준 것은 분명하다.

이때 경계할 것은 일시적 소득을 항구적 소득으로 착각하는 일이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어서 호황기에 급증한 법인세는 불황이 오면 급감한다. 반면 정부 지출은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어렵다. 한번 생긴 사업의 수혜자는 이를 자신의 권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때 이런 걱정을 시대착오로 여긴 주장이 현대화폐이론(MMT)이다. 자국 통화를 발행하는 정부는 파산하지 않으므로 국가부채를 가계의 빚처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회계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 경제이론이 되지는 않는다. MMT도 재정 확장의 한계는 인플레이션이며, 물가가 오르면 세금을 올리거나 지출을 줄이면 된다고 본다. 그러나 선거를 치러야 하는 정부의 '경기가 과열되면 제때 증세할 것'이라는 약속을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정책 결정자의 유인을 빼놓은 처방을 완결된 경제이론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인플레이션에는 공급 충격도 컸지만, 수요를 억제해야 할 때 재정을 긴축한 나라는 드물었다. 조정은 대부분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에 맡겨졌고, 금리가 오르자 국채 차환 비용이 불어났다. IMF에 따르면 세계 정부부채는 2025년 GDP의 94%에 육박했고, 이자 지출은 4년 새 GDP의 2%에서 3% 가까이로 늘어났다. 예산 제약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저금리 뒤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부채가 적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는 이자 절감이 아니라 선택권에 있다. 금융위기나 전쟁, 팬데믹이 닥쳤을 때 재정 여력이 있는 정부는 과감하게 대응할 수 있다. 낮은 부채는 위기 때 행사하는 옵션이다. 고령화와 국방, 에너지 전환을 앞둔 한국에서 이 옵션의 가치는 특히 크다.
그렇다면 104조4000억원은 쌓아두는 것이 나은가, 국채를 갚는 데 쓰는 것이 나은가. 빚을 갚은 정부도 위기 때 다시 빌릴 수 있다. 그러나 위기 때 한꺼번에 국채를 쏟아내면 금리가 뛰고 시장이 흔들린다. 그 순간 바로 쓸 수 있는 현금의 가치는 크다. 운용수익률이 국채 금리보다 다소 낮다면 그 차이는 이 선택권을 사는 보험료다. 다만 보험은 필요한 만큼만 들어야 한다. 위기 대응에 필요한 규모를 넘는 적립금은 빚을 갚는 데 쓰는 편이 낫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금의 크기보다 옵션을 행사하는 조건이다. 칠레는 독립된 전문가들이 장기 구리 가격과 잠재생산을 추정해 경기순환적 세수를 구조적 세수와 구분하고, 앞의 것은 쓰지 않는다. 노르웨이는 석유기금의 장기 기대수익률만큼만 예산에 쓴다. 우리도 무엇이 일시적 세수인지를 정부 혼자 정하는 것은 피하도록 하고, 기금을 꺼내 쓰는 조건을 미리 정해야 한다. '미래'라는 이름만 붙여 현재 지출을 미래 투자로 둔갑시켜서도 안 된다. 사회적 수익률이 분명한 투자만 하고, 나머지는 재정 여력을 키우는 데 써야 한다.
반도체 호황이 준 것은 돈만이 아니다. 예상치 못하게 닥쳐올 수도 있는 충격에 대비할 선택권을 살 기회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을 얼마나 빨리 쓰느냐가 아니라, 그 선택권을 얼마나 싸게 사서 오래 지키느냐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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