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본을 올 줄이야, 꿈에나 생각이나 해서?”

고명효 2026. 10. 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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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 해녀의 바다 이야기] (2) 일본 바당으로 물질 떠난 춘숙 ②

제주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올해로 꼭 10년이다. 생계를 넘어 예술과 공동체 정신으로 이어져 온 제주해녀의 삶은 이제 세계가 주목하는 인류의 유산이 되었다. 해녀들의 터전인 바다는 모든 것을 내어주다가도 때론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1984년생인 필자 고명효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물질을 배웠다는 새내기 해녀다. 어머니도 할머니도 외할머니도 모두 해녀다. 그런 그녀가 제주의 바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모태 해녀의 바다 이야기'가 한 달에 한 번 독자들을 찾아간다. [편집자 글] 

제주에서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두시간 이면 일본에 도착하지만 미진이 사는 시마초고자까지는 차로 네시간을 더 가야했다. 그것도 이 길에 익숙한 사람이어야 가능한 시간이라며 미진이 공항으로 지인을 보냈다. 차를 타고 두시간 쯤 지나 아노역에 잠시 차를 세웠다. 오는 동안 내가 묻기 전에는 딱히 말을 하지 않던 춘숙이었다. 그저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다 이제야 실감이 나는지 먼저 입을 뗀다.

"다시 일본을 올 줄 이야, 꿈에나 생각이나 해서?"

춘숙이 처음 일본에 갈 때는 간단한 짐만 가지고 갔다. 살만한 곳인가, 살 수 있는 곳인가 보고 결정하고 싶었다. 그 정탐길에 미진을 만났고 함께 간 보목리 해녀들이 같이 살자고 부추겼다. 

'이정도면 더 바랄 것도 없지'

춘숙은 집으로 돌아가서 조금 더 큰 짐을 싸고 바로 일본행 비행기를 탄다.

제주해녀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지어주는건 미진의 일이었다. 봄 춘(春)자를 쓰는 춘숙에게는 하루코(はるこ)같은 이름이 맞았지만 하필 먼저 온 '춘자'가 있어 별뜻없이 없는 이름 중에서 골라 '기미코'가 되었다. 

미진은 본인도 물질을 하면서 여러 지역의 선주들과 소통하며 제주해녀들의 일자리를 찾아 주었고 특별히 춘숙이 제주로 돌아오는 날까지 모든 일을 살펴주었다. 

미진도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일본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20개월을 물질만 하다  오사카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말을 할 줄 몰라 돈을 못 쓴다는게 서러웠다. 그 길로 가라오케에 가서 한국노래 아래 나오는 히라가나 자막을 보며 글자를 익히기 시작했고 쉬는날마다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일본에 도착한 날이 일본의 명절인 오봉 기간이었다. 보통 8월 13일부터 16일까지인데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여행을 간다. 미진은 이 기간이 쉬는날이라 우리를 맞을 수 있다며 날짜를 꼭 맞추라고 신신당부했다. 일본의 해녀들도 모두 쉬는 때라 미진이 조합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시마초고자 앞바다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다음날부터 춘숙이 지냈던 시마까쓰라에서 물질을 할 수 있어서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에 멀리서 온 우리를 '관광'시켜 준다고 도바시에 해양민속박물관을 들렀다. 단층이지만 여러채의 웅장한 건물에 일본의 해녀인 '아마'의 도구부터 어선, 어구까지 촘촘하게 모아놓은 물건들을 보며 그야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길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저녁이 다 돼서야 그렇게도 궁금했던 해녀숙소에 도착했다. 

TV에서나 보던 일제 강점기 제물포의 모습과 닮은 어촌 마을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세트장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가는 날까지 다섯 명도 못 만났다. 

마을 언덕배기에 개울을 낀 집이었다. 제주해녀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은 미진이 일본사람에게 제주 사람들 욕 먹이지 않으려고 해녀들이 살다 간 흔적들을 몇 년간 정리하며 버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나무마루에 걸린 부엌마저 정갈한 모습이었다.

저녁 준비를 하던 미진이 일본어로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얼마 지나지않아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들 오야가다! 오야가다는 스승이나 우두머리, 특히 전통적인 장인을 부르는 "오야가타(親方, おやかた)"를 한국식으로 부르는 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오야가다는 연세가 아버지뻘이기도 했지만 집안의 어른처럼 해녀들을 대해 주었다고했다. 해녀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넉넉하게 큰 집을 내어주고 말일이면 어김없이 월급을 정산한 봉투를 나눠주었다. 물질을 쉬는날이면 심심한 해녀들을 위해 간식거리를 사다주기도 하고 딸이 운영하는 가라오케에 가기도했다. 아버지 오야가다의 어머니도 물질을 하다 돌아가셔서 그런지 몰라도 '해녀들은 신과 같다'는 말을 하시며 종종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아들에게 재산 중 일부를 다 쓸때까지는 해녀들과 이 일을 하라고 하셨다. 그 약속을 지키려 아들은 마지막 해녀인 미진과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들 오야가다도 미진도 마지막 날이 멀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여기가 나 자리여. 영 누우믄 화장실도 가깝고 잘도 좋안."

춘숙이 방을 손으로 나누며 말했다. 방에는 그 때 있던 버튼식 전화기도 그대로였다. 춘숙은 국제전화를 거는게 미안해서 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만 받았다. 물질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 하나있는 공중전화에 들러 제주로 전화를 걸곤 했다.

춘숙과 한방을 쓰는 정선과 옆방에 사는 언니 둘은 서귀포 보목에서 온 해녀들이었다. 언니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차려주었고, 막내였던 춘숙은 옆에서 거들고 설거지만 하면돼서 물질외에 신경쓸 일 없이 편안하게 살았다.

일을 마치고 자리에 누울때면 제주집 걱정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물건이라도 적게 잡은 날이면 짐싸고 가버릴까 조금만 더 돈을 벌다가야 하나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미진도 춘숙도 잠이 들었는지 작게 켜 둔 TV 소리만 들려온다. 

'오늘이 춘숙이 처음 일본에 물질하러 온 26년 전 그날이라면, 나도 오늘부터 우리 아이들과 남편을 두고 여기서 30개월을 보내야 한다면, 모르는 선배 해녀들과 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면'

마흔셋의 춘숙이 잠들지 못한 밤 올려다봤을 천장을 바라본다.

다음 날, 오야가다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배를 띄우고 5분 정도 갔을까. 미진과 춘숙이 익숙하게 배에서 뛰어내렸고 나도 카메라를 들고 따라 뛰어내렸다.

미진과 춘숙은 테왁을 잡고 각자 자리를 찾아갔고 혼자 물에 동동 남아 내 테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촬영만 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아무도 내게 테왁을 챙겨주지 않은 것이다. 처음엔 나도 카메라를 망사리에 놔두고 자맥질만 몇 번 해보았다. 붉은성게를 하는 날인데 제주에 많은 보라성게, 제주에서 한번 본적있는 갈색성게가 훨씬 많았다.

한 시간쯤 작업을 했을까. 미진이 자맥질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오분자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잘도 맛 좋아. 먹어봐."

춘숙은 어제 늦게까지 마신 술 때문인지 멀미가 난다며 안 먹겠다고 했고 내 오분자기를 손질해주며 말했다.

"잘 씹엉 먹어. 체 나매."

손바닥 반만 한 오분자기는 오동통했고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꼭꼭 씹어 삼켰다. 입안에 고소한 오분자기의 맛이 남아 뱃속이 따뜻해지더니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이게 대상군 해녀들 체력의 비밀이었나?'

좋아진 컨디션에 신이 나서 두 해녀를 쫓아다니며 촬영도 하고, 눈에 보이는 붉은 성게를 하나씩 잡아 춘숙의 망사리에 보탰다.

두 시간이 되자 정확히 오야가다가 배를 몰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얼마 전까지 미진이 작업한 곳이라 그런지 망사리가 많이 차지 않아 오야가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바다는 꽤 셌다. 보통 같으면 들어가지 않았을 바다인데, 멀리서 온 우리를 생각해 배를 띄워준 것이었다. 

물에서 나오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고무옷을 입은채로 불턱에서 성게 손질을 했다. 제주에서도 얼마전까지 한달 넘게 성게작업을 한 터라 내 손도 익숙하게 움직였다. 능숙한 해녀들이 모이니 금방 정리까지 마쳤고 바다 앞으로 가서 성게껍데기를 버리고 왔다. 돌아서면 바다, 돌아서면 해녀불턱, 또 돌아서서 가면 곧 해녀숙소가 있다. 춘숙과 해녀 예닐곱이 이 공간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그려진다. 이제는 미진 혼자서 사용하는 불턱에서 끝을 바라보며 스스로 정리해가야 한다. 부딪치는 것 없이 편할것 같다가도 바다 앞에 덩그러니 남은 불턱처럼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전화를 할 때마다 언제 올거냐는 질문에 모른다는 말만 하던 춘숙이 별다른 기별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온가족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지만 살가운 성격들이 아닌지라 반가운 마음도 보고싶었던 마음도 표현하지 않아 섭섭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엄마, 일본갈 때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간 거 알아?"

"게메 잘살멍 이시라 갔다오켜 말도 못 골앙 가젼게. 말 고를 저를이 어서나서"

말할 여유조차 없는 삶이었다니. 그래도 타지에서 고향의 동생을 만나고, 해녀를 귀하게 여기는 오야가다 아래서 밥을 차려주며 자기 방에서 함께 살자고 해준 선배 해녀들과 지냈던 곳을 보고 오니 안쓰럽기만 하던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1950년대 바다와 밭만 있는 제주 바닷마을에서 태어나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여자가 어떻게 배 타고 비행기 타고 육지물질을 가고 일본까지 갈 수 있었을까.

집에 있다고 해서 마냥 편한 삶도 아니었을테다. 물질은 물질대로 해야 했고, 밭일에 식구들 밥도 챙겨야 했을 것이며 사사로운 친정일에 시집일까지.

어쩌면 엄마에게 일본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길만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도전이었고, 그때마다 엄마는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고명효

대상군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물질을 배운 모태 해녀입니다. 출산 후 21일 만에 물질을 간 엄마를 찾아 울던 아기는 기어이 엄마의 바다로 따라갔습니다. 한숨에 소라 다섯 개를 잡는 게 보통 기분 좋은 물질의 수확인데, 소라 다섯 개와 맞바꾼 이야기들로 테왁망사리 가득 채우는 대상군을 꿈꿉니다. 해녀의 '눈'을 쓰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닷속을 톺아보며 테왁에 카메라를 달고 제주 바다의 오늘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