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 중요한 건 답이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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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은 과작(寡作) 감독이다.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한국 영화 지형 안에서 굳건하게 솟아있음을 알리는 영화다.
이창동은 언론시사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타인의 삶을 그리는 창작자에게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그들로서 할 수 있을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거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고 지금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이창동의 영화가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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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이창동은 과작(寡作) 감독이다. 《초록물고기》(1997)로 데뷔한 이래 30년간 내놓은 작품 수가 고작 7편. 그러나 양에 대한 아쉬움을 질로 압도한다. 7편 중엔 졸작도 흔한 평작도 없다. 모든 작품이 독창적이며, 인간의 피와 살이 느껴지는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개인을 그리되 개인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 인간을 통해 사회를 비춰보고, 인간을 이해하려 하며,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끈질기게 질문한다. 한국 영화가 꽃을 피우는 데 이창동이 비옥한 거름 역할을 했다는 건, 추측이 아니라 팩트다. 《가능한 사랑》은 이창동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한국 영화 지형 안에서 굳건하게 솟아있음을 알리는 영화다. 그 어떤 장르적 문법에 기대지 않고도, 그의 카메라는 보는 이의 마음을 휘젓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여기 자라온 환경도, 사고방식도 너무 다른 두 커플이 있다. 먼저 노동자인 호석(설경구)과 미옥(전도연) 부부. 호석은 《어쩔수가없다》의 만수(이병헌)만큼이나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큰 인물이다. 아들 이름을 '철'로 지을 만큼 업이 곧 정체성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호석이 어느 날 정리해고를 당한다. 호석은 이에 반발하며 해고된 동료들과 옥쇄파업으로 맞섰지만, 구속까지 당하면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마스크 제조업체에 다니는 아내 미옥은 그런 남편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해고 노동자 부부와 그들을 찍은 부르주아 부부
그 반대편에 부르주아 부부가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대형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자산가 상우(조인성)다. 영화는 접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두 커플 사이를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다리를 놓는다. 노동자 다큐를 준비 중인 예지에게 호석-미옥 커플은 너무나 담고 싶은 피사체다. 예지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자 노력한다. 그런 예지에게 상우는 "메소드 연기 잘한다"며 뼈 있는 말을 한다. "그 사람들하고 너는 다른데, 너는 같다고 생각하잖아"라는 상우의 날 선 분석에 예지는 항변한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거야." 과연 예지의 사랑은 성공할 수 있을까.
《가능한 사랑》은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영화다. 이창동은 10년 전, 해고 노동자와 관련한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테스트 촬영까지 했지만 막바지 단계에서 포기했다. 관객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자신이 노동자들의 고통을 다룰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도 작품을 접게 한 이유였다. 꺼내지 못한 채 묵혀둔 이야기는 단편영화 《심장소리》(2022)에 녹아들었다. 《심장소리》는 타워크레인에서 농성하는 아버지와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둔 아이가 28분 동안 절박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이야기다. 그렇게 갈무리될 것 같았던 해고 노동자 이야기는 공동 각본을 쓴 오정미 작가가 다큐멘터리스트 부부의 이야기를 겹쳐보자고 제안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재탄생했다.
해고 노동자 서사에, 그들을 찍는 부르주아 부부가 레이어로 한 겹 덧입혀지면서 영화는 감독이 처음 구상한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세계로 한 단계 점프한다. 《가능한 사랑》에는 호석 부부를 찍는 '내부 카메라'와 그런 예지를 찍는 '외부 카메라'가 있다. 흥미로운 건 전자다. 예지가 찍는 내부 카메라는 이창동 내면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즉, 예지는 '이창동의 분신'이자 '창작자 윤리'의 의인화다. 이야기에 대한 욕망 앞에서 창작자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카메라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얼마나 담을 것인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더 나아가 그 고통을 담아낼 자격이 있는가. 예지를 통해 이창동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돌아본다.
압구정 출신이나 세탁소집 딸이었다는 이유로 예지는 자신의 계급을 저평가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일 뿐, 유학까지 다녀온 예지와 봉제 공장에서 같은 시절을 보낸 미옥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결정적으로 예지는 노동자 계급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적어도 타인의 처지를 염려할 만큼 세심한 사람이었다면 노동자 계층을 인터뷰하러 가면서 500만원 넘는 가방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지는 노동자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그것은 사실처럼 보이긴 하나, 종국엔 실패한다. 그녀가 나빠서가 아니다. 무지해서다. 그래서 무례를 범한다. 아주, 우아하게. 이창동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예지를 통해 자신 또한 몰라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지 염려한다. 동시에 반성한다. 통렬하게.
'산 자'와 '죽은 자'
창작자 윤리를 비중 있게 다루고는 있으나 이 영화가 가장 강력하게 질문하는 건 파업 투쟁 과정에서 패배해 집단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노동자들이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느냐다. 이 질문 앞에서 가장 고군분투하는 인물은 호석이다. 호석이 겪는 신체적 트라우마는 공권력의 폭력에서 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부순 건 공권력이 아니다. 그건 함께 투쟁했던 동료들이다. 더 정확하게 군홧발에 짓밟히는 그를 두고 도망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이다. 그 일을 계기로 호석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한다.
구조조정은 어제의 동료들을 '산 자'(남은 자)와 '죽은 자'(해고된 자)로 가른다. 구조조정은 단순히 일을 잃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처럼 지냈던 관계가 깨지는 일이며, 삶이 전혀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일이다. 이창동은 해고자들이 심리 상담을 받는 장면을 정면에 배치해 이를 강조한다. 회사에 남은 동료를 마주칠까봐 아파트 엘리베이터 타기가 두렵다는 사람부터, '노동 귀족'이라고 조롱받다가 이젠 '빨갱이'로 손가락질 받는다고 마음을 뜯는 사람까지. 과거의 연대가 증오로 바뀐 현실이 잔인하기 그지없다.
봉준호의 《기생충》이 놀라웠던 건, '갑(지상 부잣집 가족)'과 '을(반지하 가난한 집 가족)'의 싸움인 줄 알았던 영화에 제3의 '을(지하, 세상에서 배제된 가족)'이 들어오면서 '을'과 '을'의 경쟁으로 흐름을 바꾸는 기세였다. 박찬욱 역시, 《어쩔수가없다》에서 같은 처지 사람을 살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중산층의 암담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바 있다.
이창동의 시선 또한 다르지 않다. 1980년대, 정치사회적으로 부조리한 시대에 예술을 시작한 이창동에게 분노의 방향은 분명했다. 선과 악도 대체적으로 혼동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예술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누가 내 편이고 네 편인지 불분명한 시대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분노는 갈 길을 잃고 차곡차곡 쌓여 '분노 사회'를 낳았다. 이런 사회에서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이창동은 예지의 시선으로 돌아와 다시 또 자문하는 듯하다. 이창동은 언론시사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타인의 삶을 그리는 창작자에게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그들로서 할 수 있을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거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고 지금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답을 찾지 못했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답이 아니라 답을 찾으려는 그 행위 자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소방공무원 등의 건강 문제를 연구해온 '사회역학자' 김승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이창동의 영화가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질문을 포기하지 않기에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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