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은은한 광인의 나라... 고수의 글맛 보여주마” 서울대 김영민 교수의 ‘미친’ 글쓰기

김지수 작가 2026. 10. 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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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니? 인간에게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니? 개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구나 인간 중에는 연쇄 살인을 하는 이도 있고 꾹 참고 야근하는 이도 있고 마냥 걷고 싶은 이도 있단다. 너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냥 걸을 때가 있니?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은 날이 있니? 그런 날이 계속 이어지면 그는 어느덧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단다.'- 김영민 소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중에서.

"글쎄, 장르 불문 글을 전문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현대어로서 한국어를 쓴 게 1세기도 안 돼요. 오히려 한국어는 학대를 많이 당했고, 더 갈고 닦아야 할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미권 정치인들과 달리 한국 정치인들이 기자들 앞에서 농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면 더욱."

"글쎄, 나는 그랬어요. 부모라는 변수에서 빨리 벗어났고, 튀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압도적인 영향이라는 느낌을 평생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저도 그런 영향을 줄 생각이 없고요. 많은 사람에게 부모가 애증의 대상인 건 맞지만 부모를 원망하며 인생을 소진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빨리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요."

"모르겠어요.(웃음). 그런데 사랑받으려면 웃겨줘야 해요. 학생들 웃기기가 제일 어려워요. '날 좀 어떻게 해봐'라는 그 눈빛은 무시무시합니다 수업도 그렇지만, 제가 자부심을 갖고 학생들과 오랫동안 정성 들여 해오는 일은 따로 있어요. 방학 때 2주 정도 유럽으로 답사 여행을 떠나요. 6개월 전에 미리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면서 시뮬레이션을 한 후 합이 맞는 친구들과 떠납니다. 그렇게 놀며 공부하는 일이 즐거워요. 아무런 간섭없이, 교훈을 주겠다는 목적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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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 다 어딘가 조용히 미쳐 있어
스웩 넘치는 소설 ‘인생의 단 맛을 보여주마’
AI가 노벨문학상 타고, 책들은 자결하는 세상
인생은 허무하지만, 그럼에도 과정 즐겨야
창작의 고통 없어… 생각이 머리를 노닐어
성공의 증거는 서울대 졸업장 잊는 것
▲스웨그 넘치는 소설집 ‘인생의 단 맛을 보여주마’를 낸 서울대 김영민 교수/사진 제공=김영사

‘잘 지내니? 인간에게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니? 개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구나… 인간 중에는 연쇄 살인을 하는 이도 있고 꾹 참고 야근하는 이도 있고 마냥 걷고 싶은 이도 있단다. 너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냥 걸을 때가 있니? 세상 끝까지 걸어가고 싶은 날이 있니? 그런 날이 계속 이어지면 그는 어느덧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단다.’- 김영민 소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중에서.

창밖으로 북촌의 한옥이 보이는 고즈넉한 인터뷰 장소에 김영민 교수가 공룡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그가 수줍은 야성을 드러내 사진을 찍는 카메라를 손으로 할퀴지도 않아서 안도했다. 무엇보다 장시간의 인터뷰에 안성맞춤인 생크림 롤케이크를 사 오는 센스에 탄복했다.

내가 그의 정체성(교수와 작가와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비집고 들어가 고상한 헛소리를 던질 때마다, 김영민은 단 것을 오물거리며 낄낄거렸다.

그는 김영민이다. 서울대학교 정치사상사 교수이자, 몇 년 전 추석 시즌 발표해 대히트를 기록한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칼럼계의 아이돌’이란 칭호를 얻은(실제로는 서울대 소속 중장년돌) 글쓰기의 고수. 고난도의 풍자적 웨이브와 변칙적인 커브로 독보적 맥락의 춤선을 선보이는 당대의 문장 댄서.

사뿐한 발동작으로 무대에 올라 “교수가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못 서는 이유는 조교가 없기 때문”이라는 셀프 디스를 서슴지 않는 웅변가이자, 소설집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북토크에 거물 드라마 작가 박해영과 한창 폼 오른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을 초대해 컬트적인 열기를 분출시킨 출판계의 예능인.

지난 추석 즈음에 김영민 교수를 만나 다양한 질문을 던졌다. ‘서울대 교수란 무엇인가’ ‘인간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영피프티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란 무엇인가’...

공자부터 마키아벨리까지, 동서양의 정치사상사를 가르치는 고전적 스승이자, 중장년 포식자가 점거한 한국 사회를 정확하게 야유하는 ‘드립’의 철학자 김영민과의 대화.

▲첫 소설집을 두고 개가 달을 보며 짖을 때 숨 죽여 쓴 이야기라고 했다.

-개에게 쓴 첫 편지부터 로맨틱했습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을 정의라고 주장할 때, 나도 너처럼 물어뜯고 싶을 때가 있단다… 너나 나나 허공의 나비를 보면 저절로 시선이 머무는구나.’ 개에게 어떻게 이런 고백을…

“인간한테 하면 상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릴 테니까요. 개는 달을 보고 짖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글을 씁니다. 셰익스피어는 “너를 찔러 죽일 거야!”라고 하는 대신 “너는 나의 칼집이 될 것이다”라고 썼어요. 그게 인간 언어의 가능성입니다. 국회 방송에서 아무리 짖는 소리가 들려도…”

-이야기에 다 스웨그와 광기가 서려 있었어요. 안 웃을 도리가 없더군요.

“어딘가 다 조용히 미쳐있죠(웃음). 한국은 제정신으로는 살기 어렵고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미쳐있어요. 한편으론 과도한 정상성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제가 쓴 이 책의 카피는 이거였어요. ‘핥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아무도 꿀을 빨 수 없었다’...”

안경 너머 눈빛에 장난기가 찰랑거렸다. 정녕 핥을 수 없고 빨 수 없기에 글을 쓰는 것일까.

-며칠 전 전설적인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어봤습니다. 그 소재의 꺾기와 커브가 거의 댄스 장인의 수준이더군요. 처음엔 정체성에서 시작했다가 친구의 유치한 연애편지로 커브를 돌고 이어 ‘당숙이란 무엇인가’ ‘후손이란 무엇인가’ 불손의 리듬을 타는 대가족 랩 배틀까지, 이런 글은 어떻게 설계합니까?

“(미소 지으며) 저는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글을 씁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전쟁 준비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전쟁터 한복판으로 휙 던져놓듯, 칼럼도 그런 기법이 필요했어요.”

-그 뒤로 얻은 별명이 칼럼계의 아이돌 그리고 문장가들의 문장가… 이런 찬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가벼운 고백’에도 썼듯이 사람을 괴롭히는 건 저평가가 아니라 과대평가입니다. 과도한 칭찬을 해놓고 그에 미달한 모습을 보는 것. 특히 문장가들의 문장가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적들을 만들겠어요? 정곡에 꽂혀야 기분 좋은 것이지요. 하지만 책은 많은 이들의 생계가 걸려 있어서 저의 에고를 내세울 순 없죠.”

▲한국말을 가지고 경계없이 노는 김영민./사진 제공=김영사

-문장가라고 하면 미문을 쓰는 김훈, 정확한 서술을 하는 조지 오웰이 떠오르는데… 김영민에게 문장가는 누군가요?

“글쎄, 장르 불문 글을 전문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겠죠. 그런데 현대어로서 한국어를 쓴 게 1세기도 안 돼요. 오히려 한국어는 학대를 많이 당했고, 더 갈고 닦아야 할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미권 정치인들과 달리 한국 정치인들이 기자들 앞에서 농담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면 더욱.”

-‘외향인은 설친다. 설치류보다 더 설친다’ ‘원숭이는 일부러 나무에서 떨어질 때 인간이 된다’ 등등 ‘성찰적 드립’ 분야에서 당신은 최고입니다. 먹물 머금은 유머는 어떻게 터집니까?

“뇌가 그런 상태로 세팅되어 있어요. 다양한 텍스트와 경험을 때려 넣고 분방하게 놓아두면 그 요소요소가 화학작용을 일으켜요. 흥미로운 생각이 찾아와서 쓰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계속 다음 생각을 불러와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한 게 아니라 생각이 나를 하는 상태죠.”

김영민은 소설집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시트콤으로도 낭독극으로도 발전시킬 궁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다 시도할 수 있다고.

-문득 궁금합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성장했나요?

“그 시절에 부친은 대학교 교육을 받은 분이었고 집안에 전집류 책을 많이 들여놓는 분들이셨어요. 두 분 다 돌아가셨고, 특별히 제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어요. 굳이 따져보면 중학교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막 부임한 풋풋하고 열정적인 국어 선생님이었어요.

고교 시절엔 입시 공부하기 싫어해서 종로도서관에서 주 1회 하는 독서 모임에 다녔습니다. 나중에 미국 유학 가서 보니 그때 독서클럽에서 했던 방식이 큰 도움이 되더군요. 좋은 교육을 받은 셈이에요.”

▲칼럼계의 중년돌 김영민 교수. 자유를 위해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사진 제공=김영사

-자기 결정권이 희미한 성장기에 양육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글쎄, 나는 그랬어요. 부모라는 변수에서 빨리 벗어났고, 튀지 않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압도적인 영향이라는 느낌을 평생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저도 그런 영향을 줄 생각이 없고요. 많은 사람에게 부모가 애증의 대상인 건 맞지만 부모를 원망하며 인생을 소진하는 건 안타깝습니다. 빨리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요.”

-누군가에게 압도적 영향을 받지 않는 선생의 담력은 ‘무엇인가’라고 되묻는 공부법에서 나온 것인가요? 당신에게 무엇인가는 무엇인가요?

“공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는 기본기죠.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같아요. 소크라테스가 지나가는 젊은이를 불러 “자네 연애한다면서? 그러면 사랑이 뭔지 알겠네. 모르고 한다면 바보니까.” 그렇게 꼬드기며 사랑이 무엇인지 꼬리를 물고 캐묻습니다. 젊은이는 횡설수설하다 결국 자기가 사랑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나빠져서 돌아가죠. 플라톤의 ‘대화’가 다 이런 식이에요. 관습적인 앎에 질문을 던지는 데서 철학이 시작됩니다.”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이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 하니”라고 하거든 물어라. “가족이란 무엇인가”.’-’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 중에서.

-책 이야기로 들어가보지요. 인생을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빗댄 ‘낙하 중에 하는 말들’이 좋았어요.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라 울면서도 일하는 사람이 강한 거예요’라는 문장에서 울컥했습니다. 노년층을 지나며 ‘인생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 인생은 출마 선언 같은 겁니까? 아니면 잡담 같은 겁니까? 낙하의 목적은 아름다운 낙하 자체입니까?’라고 묻는 문장도… 이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어느 날 ‘태어나는 것이 낙하’라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낙하로 태어나 떨어지다 끝나는 게 인생 아닌가… 그렇게 머릿속에 쏟아져 내리는 헛소리를 받아썼습니다. 많이들 묻지요. 인생에서 목적은 내가 이룬 업적인지 살아온 과정 자체인지.

내 몸에 감긴 태엽이 멈출 때까지 그저 사는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권유합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과정을 즐기라고. 그렇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요. 선물처럼 좋은 결과가 주어지면 다행이고. 노벨상을 타면 좋겠지만 노벨상을 타기 위해 문학을 한다면 그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곱게 미친 글들의 향연. 한국 사회를 메타적 시선으로 재현한 시트콤 스타일의 소설집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노벨상을 풍자한 ‘스톡홀름 신드롬’ 얘기를 해보지요. AI가 노벨문학상을 타는 장면이 압권이더군요. 창조주인 배불뚝이 과학자가 말해준 수상 비결이 어찌나 아찔하던지요. ‘세계 명작을 빅데이터로 주입하고 주기적으로 전기 자극을 주었다’고. 설상가상으로 기계의 수상소감은 감격적이기까지 했어요. ‘수상의 기쁨을 인간들과 나누어서 기쁩니다. 인간이 창조한 내가 인간을 위로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진짜 이런 일이 펼쳐질까요? 쓰는 미래는 없어질까요?

“인공지능은 혁명입니다. 몇 달 전에 AI와 내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주어진 글을 첨삭 지도하는 대결을 했어요. 현장에서 내가 얘기했어요. 지금이니까 이런 행사도 할 수 있는 거라고. 기계와 내가 서로 다른 첨삭을 하는 걸 보는 것도 추억이 될 거라고요. AI는 괴물처럼 진화하고 있고 AI 이전과 이후를 경험한 세대는 우리가 마지막이 되겠죠.

더 이상 인간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건 의미가 없어질 거예요. 결과는 상관없어요. 오직 ‘과정이 있는 글인가’가 분별의 기준이 되겠지요. 굳이 자기 힘으로 애를 써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수고로움의 감수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남겠죠.”

-AI에게 “김영민 스타일로 써봐”라고 주문한 적 있습니까?

“시험 삼아 해본 적은 있어요. 지금은 썩 만족스럽지 않지만, 만약 훈련시킨다면 결과가 달라지겠죠. 그렇게 되면 점점 더 생산성은 무의미해질 거예요. 스스로 하고 싶어 했느냐 과정을 즐겼느냐만 남겠죠. 요리도 생산성을 따지면 매식하지 왜 집밥을 먹겠어요.”

-요즘은 쓰는 인간보다 읽는 인간이 사라지는 게 더 무섭습니다.

“격동의 시대예요. 읽는 근육이 소실되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종의 인간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가?’ 청소년들이 읽고 쓰는 즐거움을 알도록 교육을 설계하는 것이 시급한데, 걱정이에요.”

▲서울대 출신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원소윤과 대담 중인 김영민 교수.

-읽고 쓰는 근육을 유지하는데 ‘논어’나 스탠드업 코미디, 현대미술 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나요?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고 어떻게 나를 구원할지 모른다는 데 재미가 있죠. 내가 쓴 ‘논어란 무엇인가’ 책은 스탠드업 코미디와도 결이 닿아 있어요. 궁극적으로 현대미술가들이야말로 곱게 미친 자들의 전형입니다. 그들은 진부하다는 말을 가장 큰 욕으로 여겨요. 창의성을 수혈받고 싶으면 현대미술 전시회장을 가보세요.”

-어디에 시간을 쓸 때 가장 즐거운가요?

“공부. 공부하고 전시 보고 영화 보고 여행하고… 말했듯이 그 경험들이 머릿속에 있다 글이 됩니다. 술 먹고 네트워킹하는 시간에 독립 영화를 보고 예술가들을 만나죠.”

-영포티, 영피프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그냥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면 돼요. 어떤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고 거기에 넣으려 하거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다 무익한 노력입니다. 자기 인생을 살다 죽는 게 맞아요.”

-자기 인생을 사는 게 가장 힘든 예술 아닌지요?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남의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착각하며 살거나, 조직의 톱니바퀴로 살면서 버림받는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진심으로 내 욕망을 인정하고 구현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실례지만 자녀가 있습니까?

“없어요. 자식을 돌보면서 자기 인생을 산다는 건 또 엄청 난도가 높은 일이겠지요.”

▲공부하며 노는 게 가장 즐겁다는 김영민.

-학생들에게서 큰 사랑을 받고 있지요?

“모르겠어요.(웃음). 그런데 사랑받으려면 웃겨줘야 해요. 학생들 웃기기가 제일 어려워요. ‘날 좀 어떻게 해봐’라는 그 눈빛은 무시무시합니다… 수업도 그렇지만, 제가 자부심을 갖고 학생들과 오랫동안 정성 들여 해오는 일은 따로 있어요. 방학 때 2주 정도 유럽으로 답사 여행을 떠나요. 6개월 전에 미리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면서 시뮬레이션을 한 후 합이 맞는 친구들과 떠납니다. 그렇게 놀며 공부하는 일이 즐거워요. 아무런 간섭없이, 교훈을 주겠다는 목적 없이.”

그럼에도 학생들과 여행을 가면 반발씩 앞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젠 제가 요리하려고 새우 껍질을 까면 누군가 바가지를 가져다줍니다. 배려는 패스를 받기 위해 그 자리에 먼저 가 있는 축구선수의 움직임 같은 거니까.”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김영민은 자신의 업에 자긍심이 충만했지만, 주류 지식인으로 스스로를 놀려먹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농담이 나온다고 했다. 지난해 겨울, 김영민이 참여한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출연자들의 담력은 실로 놀라웠다. 그들은 죽을 날을 앞둔 자신의 시한부 인생을, 자식의 장애를, 남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감 없이 내어놓고 사람들의 배꼽을 털었다. ‘웃고 있어도 전두엽이 시큰해지는’ 희귀한 경험이었다. 코미디야말로 자기 불행을 해석하는 최고의 메타인지였고, 신파 없는 ‘역지사지’의 예술이었다.

-‘이것은 필멸자의 죽음일 뿐이다’에서는 ‘폐위된 왕처럼 대학을 떠나는’ 교수가 그려집니다. 남겨진 책들은 아무 연고도 없이 쭉쭉 찢어지면서 자해합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지식 사회의 파쇄 현장이 너무 정확한 유머로 표현돼서 놀랐어요.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다 웃기고 진지하고 가엾어요. 클로즈업해서 메타 인지로 보면 대학은 최고의 블랙 코미디 현장입니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종영 후 재충전 중인 박해영 작가와 대담 중인 김영민. 박해영 작가가 핸드폰이라면 자신은 핸드폰 거치대라고 몸을 낮췄다.

-열한 번째 이야기인 ‘어느 파일의 사랑 이야기’는 희한한 러브스토리더군요. 인간이 쓰고 저장한 원고 파일이 인공지능에 살해된 인간을 묻어주는 이야기… 파일은 고백합니다. ‘당신과 저는 서로를 독해하는 관계였어요… 인공지능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사탕발림으로 공갈빵처럼 부풀려진 당신의 자아는 제게 비친 당신의 자아와 같은 걸까요?...저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당신이 저를 다시 열고 당신만의 문장을 타이핑할 그날을.’ 김영민이 쓰면 왜 모든 이야기가 이토록 로맨틱해지는 걸까요?

“러브스토리니까요. 이런 러브스토리를 쓰면 후대가 짐작할 수 있겠지요. 인공지능 시대의 초입에 이런 흔적이 있었구나… 지금 혼란을 겪는 우리 세대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동물과 사물엔 섬세한 성정을 부여하고 먹물인 인간에겐 ‘할퀴다, 물어뜯다, 냄새 맡다, 핥다’ 같은 원초적 동사를 부여하더군요. 김영민의 글이 로맨틱해지는 지점은 그런 전복감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저 생각이 나를 한 것일 뿐입니다. 문장이 시도 때도 없이 습격하니까요. 언젠가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의 입장에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제가 창작의 고통이 없다고 얘기했던가요?”

-창작의 고통이 없다니 축복받은 인생이군요!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계란을 삶고 책상 앞에 앉아서 씁니다. 오전에 쓰고 오후에 읽고 저녁에 봅니다. 삶을 단조롭게 루틴화하면 에너지 효율성이 좋습니다. 뭐든 매일 하면 잘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일상에는 창작의 고통을 압도하는 다른 고통이 더 많아요.

기자님은 글 쓰는 게 괴로운가요? 그래도 마감은 하시지요? 직업 윤리는 중요한 거니까요. ”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창작이 고통이 없다’는 말은 초현실적으로(다른 말로 재수 없게) 들린다. 노벨상 수상 작가들조차 ‘수시로 자기 재능을 의심했다’고 고백할 때. 쓰는 모든 사람은 안도하니까(‘나만 힘든 게 아니군!’).

▲서울대 개교 80주년 기념일에 작심하고 ‘서울대란 무엇인가’ 칼럼을 써볼 계획이라는 김영민 교수./사진 제공=김영사

-이즈음에서 서울대 이야기를 해볼까요? 당신이 보기에 ‘서울대란 무엇인가요?’ 한국에선 서울대가 지닌 상징 자본의 크기만큼 선망과 조롱도 걷잡을 수 없지요.

“언젠가 졸업식 축사로 학생들에게 했던 말이 있어요.

‘서울대를 졸업했다는 게 인생의 자랑거리가 된다면 인생이 한심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증거다. ‘너희가 이 커뮤니티의 자랑스러운 일원이라는 걸 잊지 말라’는 교수들의 말은 개소리니 잊어라. 여러분이 인생을 측정하는 지표 중에 서울대 생각이 안 날수록 잘 살고 있는 거다. 부디 졸업장에 의지하는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지 말아라.’

서울대는 제게 20년 넘게 다닌 직장이고, 직장에 별다른 자부심은 없어요. 곧 80주년 개교 기념일이 다가오면, 그때 한번 작심하고 써볼까 합니다.”

-프로필에 서울대 타이틀을 떼지 않는 건 어떤 이유입니까?

“그건 마케터의 일이니까요. 프로필에서 하버드대 박사를 빼는 것도 힘들었어요(웃음).”

-절삭력 좋은 기요틴 같은 혀를 지닌 동어 스님, 영어는 잘해도 발음은 형편없는 대학생이었다가 논술학원 스타 강사가 된 장길산 씨 등 책 속 인물에서 다 당신 모습을 봤어요.

“나와 타인의 혼합물입니다. 실제로 제가 대학 다니던 80년대에는 영어 발음 좋은 걸 수치로 여겼고, 미제국주의자의 똥물이라고 커피 마시는 것도 부끄러워했어요. 저는 그랬던 한국 사회를 내 방식대로 재현하면서 ‘애증’을 다루는 중입니다. 증만 있으면 한국을 떠났을 테고 애만 있으면 자족하며 살 테지만, 지금처럼 놀리면서 해소되는 게 있습니다.”

-그게 김영민 월드의 감칠맛, 아이러니인가요?

“그렇죠. 결코 오디세이처럼 거창할 수 없는, 예컨대 ‘양식을 먹으러 떠났다 짜장면을 먹고 돌아오는’... 핵심은 짜장면을 먹었다는 게 아니라 예상치 못했던 다른 것을 얻고 늦게 돌아온다는 데 있어요.”

▲“삶 자체는 아이러니의 연속이에요. 양식을 먹으러 떠났다 짜장면을 먹고 돌아오는 격이죠. 예상치 못한 것을 먹고 늦게 돌아온다는 게 핵심입니다.”/사진 제공=김영사

-평소엔 언제 낄낄거리나요?

“이상한 생각이 나를 할 때. 이를테면 남성연대가 열었다가 망한 식당 이야기 ‘해운대숫소갈비’ 같은 글감이 떠오를 때.”

-과소평가되었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애초에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 각자 멋대로 평가할 테니까요. 평가에 연연하면 인생이 너무 번잡해질 뿐입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요?

“삶 자체가 아이러니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초지일관한 어떤 가치가 없습니다. 제가 살면서 돈, 권력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나보았지만 그들도 다 생로병사에 고통받는 보통 사람이더군요. 누군가는 ‘꿀을 빨고 있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선망하거나 시기하는 데 시간을 쓰지 말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게 훨씬 낫습니다.”

-허무주의자인가요?

“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주의자’가 되면 다른 복잡한 층위를 못 볼 가능성이 커져요. 해가 갈수록 삶에 대한 애착 유지가 중요한데, 허무와 냉소는 애착 유지에 도움이 안 됩니다. 다만 인생이 허무하다는 냉정한 사실을 응시하는 마음의 힘은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까? 요즘에도 아침에 죽음을 생각합니까?

“아니요. 과거엔 정말 치열하게 죽음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죽음이 나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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