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엔 관대, 네 편은 검열…진영의 무기 된 표현의 자유

남윤호 2026. 10. 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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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호의 아메리칸 오디세이] 백악관 ‘기자 출입금지’와 언론의 이중성
미 법원 결정으로 CNN·MS나우·폴리티코 등 3개 언론사 기자들의 백악관 출입이 재개된 지난달 24일, CNN 수석기자 베시 클라인이 백악관의 브리핑룸을 지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가짜뉴스 보도를 이유로 이들 언론사의 백악관 출입을 금했었다. [AP=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죽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 이후 유행처럼 번진 말이다. 민주당 정치인과 주류 언론이 툭하면 사용했다. 이를 주제로 한 스티븐 레비츠키, 티모시 스나이더 등의 책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은 2024년 대선 때 “트럼프가 또 이기면 이게 마지막 민주 선거가 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그래서인지 진짜 그런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9월엔 트럼프 대통령이 눈엣가시 같은 세 매체의 백악관 출입을 금지하자 또다시 민주주의의 사망 선고가 소환됐다. 트럼프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논리다. 백악관출입기자단(WHCA)이 공식 항의했고, 폭스뉴스·ABC·CBS·NBC는 풀(pool) 취재를 보이콧했다. 백악관에서 쫓겨난 CNN·MS나우·폴리티코는 소송을 통해 곧 복원 명령을 받아냈다. 트럼프 1기인 2018년에도 CNN 기자 짐 아코스타의 출입을 정지시켰다가 법원 명령으로 되돌린 적이 있다. 무리한 제재와 거센 반발, 그리고 법원의 개입. 워싱턴DC에서 자주 보던 순서였다. 모두의 예상대로 트럼프의 결정엔 제동이 걸렸다. 민주주의가 죽었다는 주장과는 다르게 말이다.

미국에서 수정헌법 1조에 규정된 표현의 자유는 거의 성역에 가까운 권리다. 국가의 상징인 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조차 표현의 자유로 보호받는다. 트럼프의 변덕이나 짜증으로 억누를 수는 없다. 그래서 흔히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만개시킨다고들 한다. 더 많고 자유로운 말이 더 나은 민주주의를 만든다는 믿음이다.

그게 정말일까. 꿈 깨자. 둘 사이에 아름다운 예정조화란 없다. 진영논리가 덧씌워지는 순간, 표현의 자유는 모두가 아니라 ‘우리 편만의 자유’로 전락한다. 자유에도 문지기가 생기는 순간이다.

파라마운트의 CNN 인수 딴지 건 민주당
백악관 브리핑룸의 기억을 조금만 되살려 보자. 2023년 바이든 정부도 데일리콜러, 뉴욕포스트, 폭스뉴스 라디오 등 보수 매체의 대통령 행사 취재를 제한했다. 같은 해 백악관은 출입 규정도 바꿨다. ‘전문적 행동’이라는 주관적 기준을 넣어 출입기자들을 심사했다. 그 뒤 상시 출입증 보유자는 1417명에서 975명으로 442명이나 줄었다. 지금 트럼프에 맹렬히 맞선 WHCA는 당시 수많은 동료들이 출입증을 잃는 걸 보고도 ‘중립’ 의견을 냈다. 진영논리 아니면 설명하기 어려운 이중성 아닌가.

표현의 자유를 진영의 무기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종종 있다. 자기편의 표현은 최대한 자유롭게 풀어놓되 반대편의 입은 틀어막자는 선택적 자유다. 트럼프 시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민주당과 좌파 진영에서 그런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지난 7월 캘리포니아 등 민주당이 집권한 12개주의 검찰총장들은 파라마운트의 워너브러더스 인수를 막는 반독점 소송을 냈다. 트럼프와 가까운 데이비드 엘리슨 회장의 파라마운트가 보수 언론인 배리 와이스를 CBS 책임자로 영입한 데 이어 CNN(워너브러더스)까지 거느리게 되는 상황이었다. 코네티컷 검찰총장은 CBS와 CNN의 분리매각까지 요구했다. 결국 지난달 소송을 끝내는 조건으로 두 방송의 편집 독립성을 감독하는 외부 위원회 설치가 들어갔다. 반독점 소송의 합의에 뉴스 감시가 끼어든 것이다. 우파로 확장될 표현의 자유에 민주당 측이 미리 제동을 건 셈이다.

노골적으로 검열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클린턴 정부의 노동부 장관 로버트 라이시는 2024년 칼럼에서 일론 머스크의 체포를 촉구했다. 머스크의 X가 게시물을 제대로 검열하지 않아 가짜뉴스와 선동이 판친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민을 좀 덜자”라고도 했다. 트럼프와 마가(MAGA)를 겨냥한 말이었다.

진보 법학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표현의 자유를 포함해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헌법을 확 바꾸거나, 그러지 못하면 저항하자고 한다. 기존 헌법을 무시하는 선동에 가깝다. 이름은 그럴듯하다. ‘민중적 헌법론(popular constitutionalism)’이다. 하버드대의 마크 투쉬넷 교수가 2023년 바이든 정부에게 보낸 공개서한에 그 핵심이 담겨 있다. 트럼프가 만들어 놓은 보수 우위 대법원이 헌법을 잘못 해석한다면, 그에 불응해 행정부의 해석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그럼 미래의 공화당 정부에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진보 판사가 헌법을 잘못 해석할 경우 보수 행정부 해석대로 밀어붙이라고 하겠나. 표현의 자유라지만, 학자적 양심으로 봐주기엔 선을 넘지 않았나.

언론은 이미 진영논리에 물들어 있다. 지난 5월 미국 연방법원 판사 로이 알트먼은 뉴욕타임스(NYT)의 이스라엘군 성범죄 의혹 보도가 증거 검증을 외면한 편향적 보도라고 비난했다. 현직 법관이 실명 기고로 언론을 비판하는 건 드문 일이다.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NYT의 선택적 잣대는 과거에도 종종 드러났다. 2020년 6월 BLM(흑인생명이 소중하다) 시위가 폭동으로 번질 때였다. 공화당 톰 코튼 상원의원이 군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회복하자는 글을 기고했다. 이에 사내외 좌파의 비난이 쏟아지자 글의 게재를 결정했던 에디터 제임스 베넷이 사직했다. NYT는 “우리 기준에 맞지 않아 게재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과글까지 내보냈다.

3개월 뒤 NYT는 ‘홍콩은 중국이다, 좋건 싫건’이라는 홍콩 관리의 글을 실었다. 홍콩 민주화 시위를 비난하고 중국 정부의 진압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공권력으로 질서를 찾자는 건 코튼과 다르지 않았다. 중공의 주장은 맞고, 미 육군 출신 상원의원의 주장은 안 된다는 건가. 앞서 2008년 대선 즈음 NYT는 민주당 버락 오바마의 글을 받은 반면, 공화당 존 매케인(1936~2018)의 글은 수정 의견을 달아 돌려보냈다. 점잖게 말해 선택적, 대놓고 말해 편파적이다.

요즘은 귀를 의심할 만한 내용까지 나온다. 지난 4월 문화 에디터 나자 슈피겔만 주재의 NYT 팟캐스트는 아마존 계열의 식료품점 홀푸드에서 물건 슬쩍하는 걸 ‘마이크로루팅(micro-looting)’으로 합리화했다.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가 대자본가라는 점에서 그의 기업을 상대로 한 절도는 정치적·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듣고 있자면 비평가 헨리 멘켄(1880~1956)이 민주주의를 ‘헛소리의 향연(carnival of buncombe)’으로 조롱한 게 떠오른다. 쉽게 말해 ‘아무 말 대잔치’다. 트럼프 시대의 혼란스러운 보도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나.

2020년 위스콘신주의 폭동 현장에서 ‘대체로 평화로운 시위’라는 자막을 달고 내보낸 CNN. 불타는 배경과 자막이 따로 논다. [사진 CNN 캡처]
표현의 자유를 침묵의 자유로 확장시킨 언론도 있다. 2020년 대선 직전 조 바이든의 차남 헌터의 동업자 토니 보블린스키가 바이든 일가의 부패 스캔들을 폭로할 때였다. CNN은 정확히 그의 기자회견 시각에 바이든의 가족사를 담은 휴먼 다큐멘터리를 편성했다. 보블린스키 회견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CNN은 BLM 시위 때 폭도의 방화 현장을 ‘대체로 평화로운 시위’라고 전하며 표현의 자유를 과시한 바 있다.
공화당에 비판적인 NYT, 중국은 옹호
신좌파의 사상적 대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1967년 베를린에서 학생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어]
이쯤 되면 신좌파의 사상적 대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1898~1979)의 ‘억압적 관용’에 더 가깝다. 좌파엔 관용, 우파엔 불관용으로 대하자는 그의 발상은 21세기에도 낯설지 않다. 이런 구조에서 선택적 표현의 자유는 좌파의 진지전을 위한 강력한 포격 지원이다. 그들은 그 탄막을 방패 삼아 사회적 터부를 하나하나 허물며 지배의식의 고지를 향해 전진한다. 자신의 진지엔 도덕적 금기와 법률적 금지라는 철조망을 둘러친다. 표현의 자유가 헤게모니 쟁탈전의 무기가 되는 것, 이게 민주주의의 또 다른 현실이자 역설이다.

표현의 자유가 진실을 구현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하기 짝이 없다. 민주주의는 도덕적으로 옳은 결론이나 공정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설득할 기회를 열어줄 뿐이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에 수반하는 위험을 알고 있었다. 헌법의 설계자 제임스 매디슨(1751~1836)은 “공기가 불길을 키우듯 자유는 당파를 키운다”고 일찌감치 지적했다.

문제는 자유와 질서의 균형엔 영원한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각양각색의 충돌하는 자유 속에서 어떻게 조화와 질서를 이룰 것인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선 어디까지 타협해야 하는가. 원칙을 지키려면 어디쯤 선을 그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애초에 우아한 균형을 약속한 적이 없다. 그저 자유와 질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시계추라고나 할까. 법학자 조나단 털리는 “민주주의는 열린 사회와 그로부터 비롯한 결과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혼란과 갈등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여, 민주주의가 우리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민주주의를 견디려면 어느 정도 달관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자유는 구경꾼에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싸울 각오가 더 중요하다. 백악관에서 쫓겨난 기자들이 권력에 맞선 것도 그런 각오였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어쩌면, 여전히 싸우려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인지 모른다.

◆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가 현지에서 전합니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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