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그저 하루치의 삶이 있었다

2026. 10. 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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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이 문장을 프라하의 블타바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침대 위에서 쓰고 있는 건 나의 또 다른 특징 때문이다.

십 대였던 오빠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노래를 부르려고 1절만 부르고 껐는데, 말하자면 동유럽에 왔으니 (중부유럽이라니까!) 클래식 공연 하나는 보고 가자는 어중이떠중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의 퀄리티가 좋을 리 없었다는 거다. (모두가 오! 나 이거 알아! 라고 할 만한 하이라이트만 3분 정도 연주하는 패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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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겁결에 프라하서 본 공연
관광객용 뻔한 레퍼토리를
매일 반복하는 연주자들
꾸준한 삶속 우주가 있다
이희주 소설가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이 문장을 프라하의 블타바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침대 위에서 쓰고 있는 건 나의 또 다른 특징 때문이다. 나는 귀가 얇다. 이왕 장거리를 가는 김에 일정을 조정하여 근처에 들를 생각은 없냐고, 프라하를 강추한다는 말에 대답했다. 그러면 한번 가볼까요?

그전까진 프라하에 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프란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들이 태어났다는 정도만 알 뿐 위치가 어딘지도 몰랐고(동유럽이 아닌 중부유럽이다), 유로를 쓰지 않는 것도 처음 알았고(코루나라는 화폐를 쓴다), 심지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기초적인 인사말도 몰랐다(안녕하세요는 '도브리 덴', 감사합니다는 '뎨쿠이'다.). 그 덕분에 백지에 정보를 채우기 위해 인터넷을 켰다가 비명을 꿱 질렀다. 이래서 싫은 거야! 그러니까 딱 하루 볼 수 있을 뿐인데 해야 할 게 너무 많았고, 이건 새삼 삶을 돌이켜보게 했다. 여행에서의 하루가 단 한 번만 있는 일이듯 인생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을 함부로 쓰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어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삶에서 그랬듯, 갈팡질팡하다가 보고 싶었던 발레가 매진되었다. 다른 것도 놓칠까 부랴부랴 아무 클래식 공연을 예매했다가 공연이 시작하고 오 분도 되지 않아 깨달았다. 아이고, 실패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영원회귀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행성이 있다면, 첫 번째로 태어난 행성에서 한 실수를 다섯 번째 행성에선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낙관주의자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비관주의자다. 그리고 비관주의자인 나는, 이전에도 반복했던 실패를 떠올렸다. 너무 잘하고 싶어서 흘려보낸 시간들. 수만 ㎞를 날아온 여행지에서 길바닥에 버린 시간들. 오래전 유행했던 말로 우리를 지구별 여행자라고 지칭한다면, 나는 그 여행의 실패자였다. 여권을 잃어버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공연은 어린 시절 친척 오빠들을 따라간 노래방을 연상케했다. 십 대였던 오빠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노래를 부르려고 1절만 부르고 껐는데, 말하자면 동유럽에 왔으니 (중부유럽이라니까!) 클래식 공연 하나는 보고 가자는 어중이떠중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의 퀄리티가 좋을 리 없었다는 거다. (모두가 오! 나 이거 알아! 라고 할 만한 하이라이트만 3분 정도 연주하는 패턴이었다.)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능성을 재다가 나쁜 선택을 하게 된 것이 후회스러웠고, 그러고 보니 산만한 관객들이나 금방이라도 거리의 사람들과 섞일 만한 캐주얼을 입은 연주자들도 미웠다. 꼭 클래식 공연을 보고 오라고 권한 음악애호가인 친구가 자신이 아는 연주자가 건반 하나하나를 심혈을 기울이며 누른다는 걸 열에 들떠 설명할 때의 모습도 떠올렸다. 저런 옷을 입고 일신우일신을 할 수 있을까? 일주일에 여섯 번, 같은 곡을 연주하면서도 음 하나하나에 정말 우주가 있다고 믿을 수 있으려나?

그러다 한 시간의 공연이 끝날 때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저게 우주적 행동이라면 그건 일주일에 여섯 번, 매일 같은 장소에서 연주를 하는 꾸준함에 달린 거라고. 낙관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되지 않고 삶을 사는 방법은 어쩌면 그것뿐인지 모른다. 우리가 몇 번째 행성에 사는지는 잠시 잊고 제 몫을 하는 일. 그저 꾸준히 사는 일.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행성의 하루는 다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건반 누르기. 하나의 음을 뱉기. 거기엔 낙관도, 비관도, 실패도, 성공도 없다. 그저 하루치의 삶이 있을 뿐이다.

[이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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