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방선주 선생, 현대사 연구 새 지평 열어준 든든한 등대이자 참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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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주(1933~2026.9.9) 선생님을 1991년 초 미국 워싱턴국립기록관(WNRC)에서 처음 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 연구자가 그 문서관에 출몰하는 게 흔치 않아서 지도교수님 추천서를 들고 나타나 가르침을 구하는 젊은 연구자가 선생님 눈에는 조금 느닷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편의 글은 커밍스와 미국 학계가 활용한 미국 쪽 자료, 북한 문서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비판적 독해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그들의 연구와 결을 달리하는 관점과 이해 방식, 나아가 새로운 연구 과제와 전망을 제기했다.
선생님은 미국 정부와 군부가 쏟아내는 허다한 문서들을 한국인의 입장과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였고, 그 존재만으로 필자는 물론 여러 후학에게 커다란 자극과 격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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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자료 해제한 1980년대 두 논문
미·북 자료 비판적 독해에 큰 기여
1989년 출간 ‘재미한인 독립운동’은
연구 수준 크게 높인 이정표적 작업
일본군 ‘위안부’ 발굴 자료와 논문은
실체적 진실 규명에 실질적인 도움
국편에 320개 상자 분량 자료 기증
정리되는 대로 온라인 공개 예정
방선주(1933~2026.9.9) 선생님을 1991년 초 미국 워싱턴국립기록관(WNRC)에서 처음 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 연구자가 그 문서관에 출몰하는 게 흔치 않아서 지도교수님 추천서를 들고 나타나 가르침을 구하는 젊은 연구자가 선생님 눈에는 조금 느닷없었을 것이다. 피차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 날 이후 문서관 경내 벤치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시간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화는 1년 내내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문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선생님께서 필자를 멀리 일 떠났다 돌아온 사람처럼 맞아주셨다. 부친 방지일(1911~2014) 목사님이 2014년 소천하기 전만 해도 1년에 한 번씩은 한국을 찾으셨고, 오랜만에 상경하신 부모님 맞이하듯이 반가운 해후를 이어갔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만 해도 뵙거나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늘 질문거리를 준비하셨고, 장수 집안이라 오래 사실 거라며 구상 중인 연구계획의 단초도 들려주곤 하셨다. 서거 소식을 접하니 아쉬움과 애석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한편으론 사모님 정금영 여사를 여읜 것이 2년 전 딱 이맘때라 두 분이 서로 손을 놓지 못하시는 게 아닌가 싶다. 두 분이 천성의 온화함과 후덕함으로 늘 주변을 따듯하게 챙기셨다. 이승에서 못다 한 얘기를 나누시며 계속 그리 지내실 것 같다.
선생님은 1933년 7월15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나셨다. 1937년 어린 나이에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산둥성 칭다오에서 성장했다. 조부 방효원 목사와 가친이 모두 산둥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부친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중국인들과 함께 했고, 교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는 물론 국공내전기, 중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칭다오에 남아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형사들이 들이닥쳐 서가의 책들을 일일이 뒤져보다 집어 던져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든 얘기, 일제가 패망한 뒤 귀국하기 위해 칭다오로 몰려든 조선인들을 부친의 주선으로 미군 상륙함에 실어 보낸 일화, 중국 정부가 수립된 뒤 곤궁에 처한 당신 가족을 위해 교인들이 담장 너머로 먹거리와 양식을 던져놓고 가곤 했다는 추억을 들려주셨다. 주민과 교인의 존경을 받던 목사님을 중국 당국도 어찌하지 못했지만, 선생님 가족은 1957년 홍콩을 거쳐 한국으로 귀국했다.


선생님의 학문 여정의 출발점은 중국과 한국의 고대사였다. 한국에 정착한 뒤 숭실대 사학과에 편입하여 1960년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대전대 전임강사로 일했다. 1964년 하버드 옌칭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초빙되어 도미했으나 편한 길을 포기하고 시애틀의 워싱턴주립대학에 입학했다. 1971년 그 대학에서 두 번째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1977년 중국 서주(西周)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갑골문 등 고대 중국 언어, 중국 한국의 선사문화, 고대의 민족 교류와 민족어 연구 등 1960-70년대에 발표한 다수의 논문은 지금도 진가를 인정받는 글들이고, 당시의 문제의식과 주제들을 이후에도 계속 살펴보셨다.

1970년대 전반과 중반은 선생님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지도교수의 도를 넘는 갑질로 힘들었고, 가정을 이룬 뒤라 가족의 생계도 마련해야 했다. 어려운 와중에도 지미 카터 대통령 선거운동을 열성적으로 도왔다. 카터 대통령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인권외교를 제창했고, 박정희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신음하는 고국의 상황을 모른 체할 수 없었고, 상황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리하셨을 것이다.
1979년부터 국립문서관에서 한국현대사 관련 자료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 해방 직후 남한 점령 미군사령부 군사실 자료에 대한 해제를 1986년, 1987년 잇달아 발표했다. 두 편의 글은 국내 현대사 학계에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이 번역되어 마침 불기 시작한 현대사 연구 붐을 북돋웠지만 국내 학계는 정작 그 책이 인용한 미군 정보자료와 노획 북한 문서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두 편의 글은 커밍스와 미국 학계가 활용한 미국 쪽 자료, 북한 문서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비판적 독해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그들의 연구와 결을 달리하는 관점과 이해 방식, 나아가 새로운 연구 과제와 전망을 제기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전반에 주한미군 정보일지, 방첩대 보고서, 하지(John R. Hodge) 장군 문서, 노동 관련 보고서, 사법부 법해석 보고서, 빨치산 자료, 북한 경제통계, 조선공산당 문건 등 선생님이 발굴한 자료들을 편집한 다수의 자료집이 간행되었다. 미·소 양군 점령하 남한과 북한의 정치, 사회, 경제 및 6·25전쟁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 자료들이었고,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는 과정과 전쟁의 실체적 진실을 해명하는 데 필요한 핵심 자료들이었다. 그의 땀과 노력으로 현대사 연구의 튼튼한 자료 기반이 만들어졌고, 그 자료들을 활용해서 현대사 연구가 한 단계 더 전진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1980년대부터 해방 이전 미주 한인사회와 한인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논구한 저서와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박용만, 이승만, 한길수, 김호철, 서광범, 변수 등 주요 인물 연구, 한인 이주사 및 한인사회 연구, 아시아-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한인독립운동 연구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 1989년에 간행한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은 그 백미였다. 선생님이 발굴한 미국 정보기관이나 정부, 군부 문서들과 직접 발품을 팔아 미주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들을 활용해서 집필했다. 미주 한인사회와 한인독립운동 연구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연구 방향을 제시한 이정표적인 작업이었다.


선생님의 활동이 왕성했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전반은 탈냉전이라는 세계사적 변화의 와중이었고, 국내외적으로 과거사 청산과 역사 인식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진 시기였다. 선생님이 발굴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 노근리 사건 관련 기록, 문경 석달리 사건 관련 문서와 선생님이 집필한 ‘위안부’ 관련 논문은 해당 사안의 실체적 진실을 해명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고, 한국의 과거사 청산과 정리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어찌 보면 고인의 인생 여정이 출발점에서부터 그를 국제적 감각을 가진 학자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중국에서 성장 과정, 한국과 미국에서 수학(修學) 경험, 미국에서 그의 활동 경험은 당대의 한일관계와 한중관계, 한미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의 학문은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를 구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한일관계, 한미관계, 남북관계의 큰 틀 위에서 한국인들이 품었던 열정과 그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고인을 ‘한국 현대사 사료 전문가’로 칭하지만 그가 역사학자로서 그 이상의 혜안과 지혜를 학계에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미래를 투시하기 위해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고인 덕분에 우리 사회는 현대사 연구를 위한 든든한 등대를 하나 가지게 되었다.
선생님은 미국 정부와 군부가 쏟아내는 허다한 문서들을 한국인의 입장과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존재였고, 그 존재만으로 필자는 물론 여러 후학에게 커다란 자극과 격려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수집한 자료와 책이 모두 국내로 이관되었다. 320개 상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아드님 방수호 판사와 가족의 뜻을 받들어 국사편찬위원회가 기증을 받았고,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주요 자료를 온라인으로 제공할 계획이다. 아무쪼록 후학들이 그 자료들을 잘 활용하여 그가 지핀 등대 불빛이 더 멀리, 더 넓게 비치도록 만들기를 바란다.
정용욱/서울대 역사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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