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무형유산을 찾아서]⑥ 정윤석 국가무형유산 강진칠량옹기장 보유자
서울 방황 뒤 귀향…20세에 기술 완성
플라스틱·김치냉장고·청자 바람에도
전통 기법·수작업 원칙으로 가마 지켜
초심 이어받은 아들, 예술 승화 노력도

전남 강진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도자 문화의 맥이 유구하게 이어져 온 고장이다. 강진읍에서 마량면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따라 칠량면 봉황리에 들어서면, 7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옹기의 역사가 펼쳐진다. 정윤석 국가무형유산 강진칠량옹기장 보유자는 산업화와 플라스틱 용기의 등장, 청자 복원 사업의 여파 속에서도 기계 제작을 거부하고 100% 수작업과 전통 기법을 고수하며 칠량 봉황리의 옹기 역사를 홀로 지켜낸 장인이다. 남도일보는 일평생 옹기에만 매달려온 그의 굴곡진 일생과 장인정신, 그리고 그의 아들로 이어지는 칠량 옹기의 과거와 현재를 다뤄본다.
◇옹기의 바다 봉황리, 소년을 장인으로 부르다
소년 정윤석에게 고향 봉황리는 온통 '옹기' 그 자체였다. 마을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항아리를 씻는 아낙들의 손길, 옹기 배에 단지를 실어 나르는 이웃들의 풍경은 그가 태어나 가장 먼저 본 세상이었다. 차지고 철분 많은 흙이 지척에 널려 있고, 완성된 독을 싣고 남해안과 제주로 떠나는 범선들로 항구가 활기를 띠던 칠량의 700년 옹기 역사는 소년의 삶을 자연스럽게 옹기장이의 운명으로 끌어당겼다.

◇방황 뒤 운명처럼 움켜쥔 물레
그러나 장인의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 터진 6·25 전쟁으로 2년 늦게 졸업장을 쥔 그에게 가난은 중학교 진학을 가로막았다.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무작정 상경해 낯선 서울 땅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며 고단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지만, 소란스러운 타향에서 극심한 혼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과학이 입증한 '숨 쉬는 오지그릇'의 비밀
본래 옹기는 유약을 입히지 않은 '질그릇'과 잿물 유약을 바르고 구워 광택이 나는 '오지그릇'을 통칭하지만, 근대 이후 오지그릇을 주로 지칭한다. 정 장인에게 장독대는 단순한 그릇을 넘어, 자식의 무사태평과 가족의 안녕을 비는 어머니들의 간절한 기도가 이어지던 신성한 장소였다. 장 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들고 정치가 문란해지면 술 맛이 변한다 여길 만큼, 정 장인이 빚은 옹기는 서민들의 삶을 품어 안았다.

◇ "모두가 떠날 때 자리를 지켰다"
1970~80년대 플라스틱 상용화와 정부 주도의 청자 복원 사업 바람이 불면서 봉황리에 20여 가구에 달하던 옹기 가마는 1989년 정 장인의 공방만을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인플레이션과 유통 구조의 폐단 속에서 살림은 늘 쪼들렸지만, 정 장인은 지혜와 집념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중간 상인의 폭리를 줄이기 위해 남해안 섬들과 제주도, 부산, 마산 등지로 직거래 판로를 개척하며 공방 운영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물레 너머 이어지는 고집스러운 흙의 정신
평생 물레를 돌리며 칠량 옹기의 명맥을 지켜온 정윤석 보유자는 어느덧 여든을 훌쩍 넘겼다. 이로 인해 예전처럼 매일 작업 전반을 전담하진 않지만, 시연 행사나 주요 작업이 있을 때면 여전히 작업장으로 나가 손끝의 감각을 살리며 중심을 잡고 있다.
그의 곁은 약 30년 동안 아버지 밑에서 전통 기법을 수련해 온 막내아들 정영균 이수자가 지키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수작업 원칙을 몸소 지키는 동시에, 옹기 전통 기술에 기반한 '달항아리'를 선보이는 등 700년 전통 기술을 예술적 작품의 영역으로 넓히는 도전도 함께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칠량 봉황리 가마 앞을 지키는 정윤석 장인은 자신의 삶과 칠량 옹기의 나아갈 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전통 옹기 마을이기 때문에 원칙대로 해야 한다는 주의 아래 수작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끝까지 초심을 잊지 않고 옹기를 만드는 이 마을의 명맥을 잇고 싶습니다."
/박정석 기자 pj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