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 단풍이 끝나가던 늦가을 설악산 산행길이었다. 해발 1080m 희운각대피소 부근을 지날 때였다. 잎을 떨군 나무들 사이에서 유독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한 그루가 시선을 붙잡았다.
점점이 박힌 붉은 열매가 자연이 내린 보석처럼 보여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곁에 있던 후배가 거침없이 다가가 비닐봉지 가득 열매를 따 왔다. 설악동 근처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는 익숙한 고향의 가을 풍경이었겠지만, 내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은 나무와의 첫 만남이었다. 후배는 그 열매가 마가목이라며 "술 담가 둘 테니 내년에 마시자"고 말하고는 배낭에 넣었다. 지금은 국립공원에서 이런 채취가 금지돼 있지만, 당시에는 산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 흔했다.
잎떨어진 마가목에 붉은 열배들만 남았다. 사진. 국립생물자원관
마가목은 껍질은 약재로, 열매는 차나 술을 담그는 데 쓰여온 우리 나무다. 훗날 어디선가 마가목술을 맛본 적이 있지만 특별한 기억은 남지 않았다. 다만 수피가 예로부터 기관지 질환이나 기침, 관절 등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깊은 산속 마가목들은 수난을 겪었다. 지난해 7월에는 태백시 함백산 일원에서 수십 년생 마가목 89그루가 무단 벌채된 채 발견됐는데, 수피가 통째로 벗겨진 모습은 참혹했다.마가목이라는 이름은 봄에 돋아나는 새순이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솟는 모습에서 비롯돼 '마아목(馬牙木)'이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마가목 열매는 녹색에서 주황으로 그리고 빨간색으로 익어간다. 사진. 정정현
추석이 지난 9월 마지막 날, 일산 호수공원 주변 도로에서 다시 마가목을 만났다. 한 그루의 가지마다 열매가 녹색에서 주황색으로, 다시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섞여 있었다.
가을 열매가 붉은빛을 띠는 것은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다. 하지만 화려한 색깔에 비해 맛이 특별히 좋은 열매는 드물다. 전 국립수목원장 이유미 씨는 화려한 색과 진한 맛을 동시에 갖추려면 나무가 치러야 할 에너지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겉모습으로 새를 유혹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지대에 살던 마가목들을 개량시켜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사진. 정정현
열매가 너무 맛있으면 새들이 한자리에서 몽땅 먹어 치우고 그 주변에 배설할 가능성이 높지만, 상대적으로 덜 맛있는 열매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조금씩 먹게 돼 씨앗이 더 멀리 퍼질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어미 나무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 씨앗에게는 생존을 위한 중요한 전략이다.
단풍빛도 고운 마가목 잎. 사진. 정정현
30년 전 설악산 고지대에서 만났던 마가목은 이제 도로변이나 공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조경수가 됐다. 고지대에서 묵묵히 살아가던 나무의 기품과, 그때 후배가 건네던 붉은 열매의 온기가 문득 겹쳐진다.
하지만 산에서 살던 나무를 우리 곁으로 데려온 것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나무도 저마다 살아갈 자리가 있다. 모든 생명이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할 때,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