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사는 세상] “호기심은 삶의 원동력”…‘1988년 노벨화학상’ 로베르트 후버 교수

황지원 기자 2026. 9. 3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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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지성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노벨상. 로베르트 후버 교수(89)는 식물 광합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198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5년 뒤 후버 교수는 동료인 하르트무트 미헬, 요한 다이젠호퍼와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그가 노벨화학상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후버 교수는 그제야 무언가를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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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사는 세상] (28)로베르트 후버 교수
유년 시절부터 화학에 큰 재미
‘광합성 반응중심’ 연구에 매진
수백번의 실패에도 거듭 시도
단백질 3차원 구조 밝힌 공로
1988년 ‘노벨화학상’ 품 안에
구조생물학·신약 개발에 기여
제자 양성·강연 등 한국과 인연
“인재 키울 국가 지원·교육 필요”
식물 광합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198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로베르트 후버 교수.

인류 지성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노벨상. 로베르트 후버 교수(89)는 식물 광합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198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아흔을 코앞에 둔 나이지만 여전히 연구소와 기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를 독일 뮌헨 막스플랑크 생화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후버 교수는 1937년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2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그가 살던 곳 근처에서도 매일 공습이 이어졌다. 늘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렸다. 공습 경보가 울리면 가족과 함께 방공호로 숨어야 했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이 끝나고 10세가 돼서야 처음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는 화학에 큰 재미를 느꼈다.

“화학물질의 복잡한 구조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학교와 집에서 혼자 실험하고 화학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고학년이 돼선 학교 화학 선생님보다 아는 게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틀린 설명을 했을 때 바로잡은 적이 있는데 달가워하지 않으셨죠.”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뮌헨공과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72년 막스플랑크 생화학연구소 부문장을 맡았다. 1976년에는 뮌헨공대 화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그의 연구분야는 X선을 이용해 단백질이 어떤 모양으로 이뤄졌는지 밝히는 ‘단백질 결정학’이었다. 1980년대초부턴 오랜 난제였던 ‘광합성 반응중심’에 집중했다. 식물이 빛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는 광합성을 한다는 건 알려져 있었지만 분자 수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는 수수께끼였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실험 결과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거나 실패하는 일이 연이었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 다시 시도하기를 수백번. 마침내 1983년, ‘광합성 반응중심’의 복잡한 3차원 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결과는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는 구조생물학 발전에 이바지했고 이후 신약 개발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5년 뒤 후버 교수는 동료인 하르트무트 미헬, 요한 다이젠호퍼와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정작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땐 별로 놀라진 않았다. 몇달 전 이미 묘한 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초, 스웨덴의 한 생물물리학자가 후버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도 비슷한 분야를 탐구한다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헤어질 때 뜻밖의 부탁을 했다. 후버 교수와 공동 연구자의 사진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가 노벨화학상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후버 교수는 그제야 무언가를 짐작했다. ‘아, 노벨상을 받게 되겠구나.’

수상을 예상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동료에게도, 가족에게도. 그해 10월, 마침내 노벨위원회의 전화를 받았다.

“연락받고 굉장히 기뻤어요. 하지만 단 한번도 노벨상을 목표로 했던 적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의미 있는 문제를 찾아내고, 그 답을 구하는 데 몰두하는 거예요. 좋은 결과가 나오고 가치를 인정받으면 상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죠.”

수상 후에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자전거를 타고 매일 연구실로 출근했다. 다만 방송국에서 찾아와 자전거를 타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으려 하자 조금 부끄러웠다고 웃으며 회상했다.

바뀐 점이 있다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강연하고 바이오기업과 협력할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한국도 그가 자주 찾은 나라다. 그의 연구실 벽에는 1998년 서울대학교 초청 강연을 소개하는 커다란 포스터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증, 한국 서예가가 쓴 달력이 걸려 있다. 한국인 박사 과정 제자도 3명 뒀다. 2명은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가 됐고, 1명은 독일에서 바이오기업을 이끌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행사를 마친 뒤 자전거 여행을 했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고생한 게 기억에 남는단다.

후버 교수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적 공통점도 언급했다. 각각 한국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어려운 상황을 딛고 각자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는 것이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연구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며 ‘한반도 통일’이 과학 발전의 초석이 될 거라고 내다봤다.

한국에선 기초과학보다 의대로 인재가 몰리는 현상이 걱정스럽다. 후버 교수는 독일에서도 의대의 인기가 높지만 화학이나 물리학을 공부하려는 학생이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는 기초과학이 발전하려면 국가가 충분히 지원하고,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호기심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지금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는 원동력 역시 호기심이다. 연구소와 설립에 참여한 바이오기업을 오가며 젊은 과학자와 의견을 나누고 고객을 만난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발견에 귀 기울이고 이를 자신의 연구에 접목하려고 한다.

노학자에게 남은 꿈은 무엇일까. 뜻밖에도 그의 대답은 학문에 관한 것이 아닌 세계 평화였다.

“어린 시절 전쟁을 직접 겪었기에 그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또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져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거예요. 이젠 총부리를 거두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너, 나, 우리를 모두 품에 안는 인류애를 실천해야 합니다.”

[용어설명] 광합성 반응중심의 3차원 구조
1988년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로베르트 후버(앞줄 가운데). 왼쪽은 공동 연구자인 요한 다이젠호퍼, 오른쪽은 하르트무트 미헬. 막스플랑크협회
광합성 반응중심은 식물이나 광합성 세균이 빛을 받아 그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의 핵심 역할을 하는 단백질 복합체다. 빛을 흡수하면 반응중심 안에서 전자가 이동하며 에너지를 저장하기 위한 일련의 반응이 시작된다. 로베르트 후버 교수 연구팀은 X선 결정학을 이용해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원자가 입체적으로 어떻게 배열됐는지 밝혀냈다. 그 결과 빛을 흡수한 뒤 전자가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하고 어떻게 빛 에너지가 화학 에너지로 전환되는지 구조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뮌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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