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빛과 소리로 표현한 '데이터-세계'

인현우 2026. 9. 3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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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을 누구나 말하는 시대가 왔지만, AI의 뒤엔 데이터가 있다. 인간은 세상의 지식을 머리에 다 담을 수 없어 기록을 남겼지만, 그렇게 쌓인 데이터 규모는 이미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선다.

원주율(π)이나 자연상수(ℯ)처럼 개념은 명확하나 불규칙하게 무한히 이어지는 숫자가 아주 작게 인쇄돼 화면을 뒤덮고, 단백질의 분자 구조를 이루는 데이터 세트는 프로젝터로 바닥에 투사돼 관람객의 몸 위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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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디어아트 작가 이케다 료지
제주 중산간 복합문화공간 '하우스오브레퓨즈'서 개인전
이케다 료지의 '크리티컬 패스'. 천장을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으로 채우고 양쪽 벽면을 거울로 구성한 길이 25m의 통로 설치 작품이다. 천장에 흐르는 데이터는 인간의 유전체 데이터로, 이 사이를 걷는 것은 '인류 역사의 데이터'를 걸어간다는 뜻이다. 하우스오브레퓨즈 제공

인공지능(AI)을 누구나 말하는 시대가 왔지만, AI의 뒤엔 데이터가 있다. 인간은 세상의 지식을 머리에 다 담을 수 없어 기록을 남겼지만, 그렇게 쌓인 데이터 규모는 이미 인간의 인지 범위를 넘어선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음악가이자 미디어아트 작가인 이케다 료지는 이 데이터를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보이고자 했다.

데이터를 숫자로, 다시 음향으로, 빛과 시각적 정보로 재해석한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그를 시사주간지 타임은 2025년 AI 분야의 주목받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고, 백남준아트센터는 올해 제9회 백남준예술상을 안겼다. 홍콩 비디오테이지 예술감독 엘렌 바우는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 인프라와 시스템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해 정보와 감시, 규모를 둘러싼 동시대의 문제를 공적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 왔다"고 평가했다.

이케다 료지의 '데이터. 텍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작품으로, 단백질의 분자 구조를 이루는 데이터 세트를 바닥에 투사해 데이터가 공간에 떠 있는 듯한 장을 형성한다. 하우스오브레퓨즈 제공

이케다 료지의 설치작품 10여 점이 제주 제주시 애월읍 중산간에 있는 전시장 '하우스오브레퓨즈' 지하의 약 1,000㎡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어두운 전시장 위로 발광다이오드(LED) 영상을 통해 교차하는 빛과 어둠의 패턴, 감성적인 가락 없이 고주파 소리와 웅웅거리는 저주파 소음으로 구성된 음향이 거대한 시청각적 장벽 안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입구의 '크리티컬 패스'는 인류 유전체 정보를 천장 위 영상에 흘려넣고 좌우로 거울을 설치했다. 생명체로서 인류가 겪어 온 진화의 경로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원주율(π)이나 자연상수(ℯ)처럼 개념은 명확하나 불규칙하게 무한히 이어지는 숫자가 아주 작게 인쇄돼 화면을 뒤덮고, 단백질의 분자 구조를 이루는 데이터 세트는 프로젝터로 바닥에 투사돼 관람객의 몸 위로 떨어진다.

이케다 료지의 '데이터-우주' 3부작은 자연의 미시세계, 인간 사회, 관측 가능한 우주에 이르는 거시세계의 자료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영상과 소리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하우스오브레퓨즈에서는 인간 사회를 다룬 2부가 상영된다. 하우스오브레퓨즈 제공

데이터를 통해 우주를 표현한 '데이터-우주'는 이케다의 대표작이다.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에서 처음 선보인 뒤 2년에 걸쳐 3부작으로 공개한 작품으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소립자 자료, 전 세계 네트워크 흐름과 기상 현상 자료,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천문학 자료가 음향과 영상으로 환산됐다. 미시세계와 인간 사회, 나아가 전 우주를 다루는 영상을 보며 누군가는 우주를 '느꼈다'는 쾌감을, 누군가는 불가해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법하다. 이번 전시에선 3부작 중 두 번째 편만 나왔지만, 대신 동일한 데이터를 활용해 만든 작품 '데이터그램'이 총 18개의 스크린에 걸쳐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재생된다.

이케다 료지가 22일 제주 제주시 하우스오브레퓨즈에서 열린 개인전 사전공개 행사에서 턴테이블 10개를 놓고 연주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케다의 사운드 아트는 멜로디를 배제하고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주파수 음향만을 논리적으로 배치한 전자음악이지만 이를 통해 청자가 그 데이터를 감각하고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하우스오브레퓨즈 제공

이번 전시의 특별한 점은 이케다가 작품을 구성하는 논리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사운드 오브 스테이츠'라는 평면작품은 백색소음·사인파·침묵·충격파라는 네 가지 음향의 기본 단위를 혼돈과 질서, 부재와 현존이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연결시킨다. 이케다가 보여주는 전자음악은 감정을 배제한 극단적 미니멀리즘의 산물이지만, 그 뒤에는 인간의 이해와 그 한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숨어 있는 셈이다.

전시 공간도 특별하다. 음악기획사 BANA와 F&B기업 브루클린더버거조인트의 합작으로 2024년 문을 연 하우스오브레퓨즈는 제주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는 젊은층을 겨냥한 복합문화공간이다. 관광용으로 개발되다 버려진 지 20년이 된 폐건물을 재구성해 전시장과 식당·카페·편집숍을 들여놓았다. 이케다는 서울을 비롯해 여러 전시장을 짚다가 찾아오기도 힘든 하우스오브레퓨즈를 개인전 장소로 낙점했는데, 도시라는 외부 자극이 매우 적은 외딴 공간이라는 점 때문에 매력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2027년 1월 18일까지.

제주=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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