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그림 그리던 작업실 옆에 미술관… 단색화 거장의 ‘비움의 공간’

변희원 기자 2026. 9. 3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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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희동 박서보미술관 개관
마지막까지 작업한 ‘묘법’ 3점 공개
내년 1월까지 베트남 작가와 2인전
지난달 개관한 박서보미술관에서 관계자가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전시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베트남 출신 프랑스 작가 도딘은 박서보가 2023년 별세 전 마지막으로 만난 해외 작가로,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언뜻 흡사해 보이는 회화적 공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축했다.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주택가 골목 안쪽에 흰색과 회색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외벽에 장식은 거의 없다. 층마다 둔 작은 정원으로 햇빛과 나무가 건물 안까지 스며든다. 전시실을 나서면 하늘이 잠깐 열렸다가 다시 흰 벽으로 이어진다. 단색화 대표 작가 박서보(1931~2023)의 이름을 건 ‘박서보미술관’이 지난 8월 개관했다. 때맞춰 국제갤러리에서는 작고 3주기를 맞아 50여 년에 걸친 작품 세계를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 ‘변하는 변하지 않는’(10월 18일까지)이 열리고 있다.

미술관은 작가가 생전 살며 그림을 그리던 작업실 바로 옆에 지어졌다. 최문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설계를 맡아 3년 만에 완공했다. 지하 2층~지상 3층, 연면적 약 2000㎡에 전시실 세 곳과 워크숍 공간, 야외 정원을 갖췄다. 애초 작은 기념관으로 구상했으나 작가가 폐암 판정을 받은 데다 고향 경북 예천에서 추진되던 공립미술관 건립마저 중단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서울 연희동에 개관한 박서보미술관 전경. /연합뉴스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은 3층 전시실 ‘큐브(Cube)’다.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을 반투명 유리가 둘러싸서, 걸러진 자연광이 실내를 고르게 채운다. 여기 걸린 대형 백색 ‘묘법’ 세 점(각 330×192㎝)은 작가가 “미술관이 생기면 걸겠다”며 생애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작품이다. 타계 직전까지 손을 대느라 서명도 남기지 못했다.

멀리선 흰 화면이지만 앞에 서면 달라진다. 한지의 골과 거듭 밀어낸 물감이 요철을 이루고, 빛의 각도에 따라 가는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작가가 말한 백색도 표백한 종이의 흰빛이 아니라 조선 백자의 회백색에 가깝다. 빛이 시시각각 바뀌니 그림도 하루 내내 표정을 달리한다.

개관전은 뜻밖에 2인전이다. 1945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해 온 흐엉 도딘을 불러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꾸렸다. 박서보 25점, 도딘 17점 등 회화 42점을 내년 1월 3일까지 선보인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미술관을 작가의 ‘성전’으로 만들 뜻은 없다며, 그가 이어온 연구와 교육, 동시대 미술과의 대화를 계속하는 곳으로 삼겠다고 했다.

두 작가의 방법은 정반대다. 박서보가 물에 불린 한지에 선을 긋고 밀어내며 자신을 덜어냈다면, 도딘은 광물 안료를 수십 겹 쌓아 색 속에서 빛이 배어 나오게 한다. 한 사람의 시간은 화면에 골로 패이고, 다른 이의 시간은 색층 아래로 가라앉는다. 지하 2층에선 두 작가의 1990년대 작품을 나란히 걸고, 지상 2층에선 박서보의 흑백 한지묘법이 강렬한 색채묘법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짚는다. 3층에서 두 사람의 백색 작품이 자연광 아래 다시 마주한다.

박서보가 평생 되풀이한 것은 ‘비움’이었다. 반복하는 행위로 욕망과 감정을 걷어내려 했다. 새 미술관도 작품을 빼곡히 채우는 대신 빛과 정원, 다른 작가의 자리를 남겨뒀다. 무엇을 더 보여줄 것인가보다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고민한 건물 자체가 그의 마지막 ‘묘법’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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