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피로의 시대, 현대미술 전시가 향하는 두 개의 길

이규현 2026. 9. 2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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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올여름 열렸던 전시 '피렌체의 로스코(Rothko in Florence)'는 올해 전세계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가장 많이 받은 전시 중 하나였다. 기차역 앞에 있는 스트로치 궁전 미술관(Fondazione Palazzo Strozzi)을 중심으로 산 마르코 수도원과 로렌치아나 도서관까지 3곳에서 펼쳐지면서 도시 전역을 순례길로 바꾸어 놓은 이 전시는 현대미술의 관람객에게 15세기 수도사들의 묵상을 경험하게 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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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요즘 유럽 전시회는···

‘묵상’과 ‘자연’을 경험하기 위해 줄 서는 관람객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올여름 열렸던 전시 '피렌체의 로스코(Rothko in Florence)'는 올해 전세계 평단과 관객들의 찬사를 가장 많이 받은 전시 중 하나였다. 기차역 앞에 있는 스트로치 궁전 미술관(Fondazione Palazzo Strozzi)을 중심으로 산 마르코 수도원과 로렌치아나 도서관까지 3곳에서 펼쳐지면서 도시 전역을 순례길로 바꾸어 놓은 이 전시는 현대미술의 관람객에게 15세기 수도사들의 묵상을 경험하게 한 시도였다. 스트로치 궁전 미술관의 본전시에는 관람객들이 연일 건물 밖까지 줄을 섰고, 산 마르코 수도원의 어두운 방 안에서는 수도사들이 프라 안젤리코의 벽화 앞에서 기도했듯 오늘날의 관람객들도 로스코의 회화 앞에서 침묵했다. 온갖 스펙터클을 손안에서 다 볼 수 있는 현대 관람객들이 왜 여기까지 가서 이미 고전이 된 로스코의 색면화 앞에 경의를 표했을까? 손안의 알고리즘과 생성형 AI에 지친 시대에 관객들은 인간의 감각을 회복하는 미술 전시에 다시 감동하는 것이라고 세계 언론은 진단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스트로치 궁전 미술관에서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열렸던 '피렌체의 로스코' 전시. / Ⓒ 이규현

올여름 유럽 미술계를 달군 화제의 전시들은 ‘숭고와 자연으로의 회귀’ 그리고 ‘신체와 촉각으로 직접 하는 경험’을 가리키고 있다. 스크린이 줄 수 없는 두 가지 선명한 방향이다. 첫째, 로스코 전시의 성공에서 볼 수 있듯이, 관객들은 다시 미술 본연의 멋인 ‘숭고함’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원한다.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산 조르조 마조레 섬의 치니 재단 미술관(The Fondazione Giorgio Cini)에서 열린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전시 '골든 히어로즈(Golden Heroes)'는 숭고함에 충격이 더해져 관객들이 말을 잃게 만들었다. 바젤리츠의 대표적인 스타일, 즉 거꾸로 뒤집힌 거대한 인간 형상에 황금빛 물감이 두텁게 엉겨 붙으니, 전시장은 AI의 가상세계가 결코 만들 수 없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바젤리츠가 생의 마지막까지 이 시리즈에 몰두하다 베니스 전시를 앞두고 작고해서 이 전시는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거장이 마지막까지 붙들었던 대형 캔버스 앞에서는 죽음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치니 재단 미술관에서 올해 5월부터 9월까지 열린 게오르그 바젤리츠의 '골든 히어로즈' 전시 전경. / Fondazione Giorgio Cini 제공

베니스 카 파카논(Ca’ Faccanon)에서 열린 한국미술의 대가 심문섭의 개인전 '자연으로부터 빌려온(Harnessed From Nature)' 또한 미술이 원래 추구하던 ‘자연으로의 회귀’를 강조했다. 작가는 자신을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자가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조력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통영 바다의 생명력을 담은 대형 회화 연작 ‘제시(The Presentation)’와 흙, 나무, 돌, 쇠를 툭 갖다 놓은 반(反) 조각(anti-sculpture) 작품들은 이런 주제를 잘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베니스 카 파카논에서 열린 심문섭의 개인전 ‘자연으로부터 빌려온’의 전시 전경. / © 정준모

신체와 촉각으로 직접 경험하는 미술 전시

디지털 피로의 시대에 현대미술 전시가 향하는 두 번째 길은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특히 ‘촉각’을 강조하는 전시다. 스마트폰 화면 터치가 수동적 소비라면, 이런 전시는 관객이 직접 와서 자신의 몸을 전시 안에 넣어 개입해야만 하는 적극적 소비다.

베니스의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a dell'Accademia)에서 올해 10월 19일까지 열리고 있는 세계적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전시 '에너지의 변환(Transforming Energy)'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과거와 현재, 물질과 비물질, 신체와 영혼의 만남을 주제로 삼는데, 관람객들이 수정과 돌 등으로 만든 설치물을 통과하거나 침대 같은 오브제 위에 누워서 이른바 ‘에너지 전달’을 직접 경험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전시의 큐레이터 샤이 바이텔은 “이번 전시는 미래의 미술관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을 위한 ‘변화의 순간(transformative moment)’이다. (베니스의 전통 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도록 이끌고, 관람객들이 자신의 신체로 전시 공간을 직접 점유하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올해 10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 '에너지의 변환'에서 관객들이 작품 속에 들어가 체험하는 모습. / 아카데미아 미술관 제공

이탈리아 밀라노의 프라다 재단 미술관(Fondazione Prada)에 설치된 카르스텐 횔러(Carsten Höller)의 작품 ‘거꾸로 매달린 버섯방(Upside Down Mushroom Room)’도 좋은 예다. 관객은 암흑의 통로를 손으로 더듬어 전시실에 들어가며,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천천히 회전하는 버섯들 아래에 서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는다. 가상현실(VR) 기법이 대체할 수 없는 물리적인 경험이다.

이탈리아 밀라노 프라다 재단 미술관에 설치된 카르스텐 횔러의 작품 '거꾸로 매달린 버섯방'에 관객이 앉아서 감상하고 있다. 관객은 암흑의 통로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통과해 전시실에 도달하며,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천천히 회전하는 버섯들 아래 서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는다. 현대미술에 흔한 가상현실(VR) 기법이 대체할 수 없는 물리적인 경험을 준다. / Ⓒ 이규현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역시 이런 충격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선사했기에 현지에서 호평받았다. 일본관 퀴어 아티스트 에이 아라카와-나시(Ei Arakawa-Nash)의 전시 '풀 아기, 달 아기(Grass Babies, Moon Babies)'에서는 관객이 입구에서 실제 영아 무게와 비슷한 5kg짜리 아기 인형을 받아 안고 전시장을 돌게 되어 있다. 작가가 동성 배우자와 함께 쌍둥이 부모가 된 자신의 실제 삶을 관객에게 경험해보라고 권하면서, 육아의 현장을 예술적 경험으로 변환한다.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작가 에이 아라카와-나시 '풀 아기, 달 아기' 전시 전경. / Ⓒ 이규현

현대미술이 이제 부지런히 해야 할 역할은 스크린 밖의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 디지털 과잉과 피로 속에서 인간의 생생한 감각을 일깨우고, 숭고함과 자연 속에서 인간 본래 자리를 되찾는 미술의 고전적인 힘을 보여주는 전시들이 그래서 지금 평단과 관객들에게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피렌체=이규현 이앤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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