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치매가 있어도 ‘내가 할 일’이 있다…14년 이어진 일본의 특별한 카페
손님 아닌 카페의 주인으로…접객·배식하고 지역주민과 관계 맺으며 역할 이어가
한국도 기억다방·초록기억카페 확대…‘정해진 프로그램 참여’ 넘어 일상의 역할 만드는 과제

치매 진단을 받은 뒤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좋아하는 것이 있고, 잘하는 것이 있으며,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에 있는 '오렌지살롱 이시쿠라 카페(オレンジサロン 石蔵カフェ)'는 이러한 생각을 10년 넘게 실천해 온 곳이다.
카페의 출발점은 국가 정책이나 전문가가 설계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치매 진단을 받은 한 당사자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힌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들은 치매 당사자·가족 지원단체가 그의 바람을 실제 역할로 연결할 방법을 찾았고, 지역사회가 힘을 보태면서 카페가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에서도 치매 당사자가 음료를 만들고 손님을 만나는 '기억다방', '초록기억카페' 등 사회참여형 사업이 확대되고 있다. 운영 형태만 보면 일본의 인지증카페와 닮은 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시쿠라 카페가 14년 동안 이어온 과정을 살펴보면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당사자를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원하는 역할에서 출발해 지역사회가 이를 함께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치매 당사자에게 참여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서 나아가, 그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필요한 역할을 갖도록 하고 있는가.
■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한 당사자의 말에서 시작된 카페
이시쿠라 카페는 일본에서 비교적 일찍 만들어진 인지증카페로 2012년 7월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에 문을 열었다. 치매 당사자와 가족을 지원해 온 지역단체가 중심이 돼 사용하지 않던 석조 창고를 카페로 바꿨고, 지방정부와 지역 자원봉사자들도 힘을 보탰다. 건물은 우쓰노미야 지역의 특산 석재인 '오야석(大谷石)'으로 지은 오래된 창고다. '이시쿠라(石蔵)'는 '돌로 지은 창고'를 뜻한다.
구체적인 계기는 '인지증인과 가족의 회' 도치기현 지부가 운영하던 당사자·가족 모임에서 나왔다. 아내와 함께 참여하던 당시 70세의 치매 당사자가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갖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운영진이 이를 실현할 방법을 찾으면서 카페 설립으로 이어졌다.
중요한 것은 카페가 만들어진 뒤 그의 위치였다. 치매인은 서비스받는 이용객으로 앉아 있지 않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마스터'가 됐다. 손님의 주문을 받고 음료와 케이크를 나르는 역할을 맡았다. 다른 당사자들도 각자의 상태와 능력에 따라 식기를 정리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등 카페 운영에 참여했다.
일본 내각부는 이 사례에 '역할을 인식해 책임감이 생겼다(役割を認識して責任感が生まれた)'라는 제목을 붙였다.
당시 카페는 월 2회 문을 열었으며, 한 차례 운영할 때마다 치매 당사자와 가족, 지역주민 등 약 30명이 찾았다. 운영에는 관련 단체 관계자와 치매 교육을 받은 주민으로 구성한 '인지증서포터', 자원봉사자 등이 참여했고, 지역에서 생산한 채소를 활용한 점심도 제공했다.

■ 14년이 지나도 이어지는 '역할'
이시쿠라 카페가 주목받는 이유는 일회성 실험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카페는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치매 당사자와 가족뿐 아니라 지역주민과 자원봉사자 등이 함께하는 지역의 교류 공간으로 자리를 이어가고 있다.
29일 일본 여성생활잡지 〈크루아상〉이 소개한 이시쿠라 카페의 모습에서도 초기의 철학은 이어지고 있다. 당사자들은 접객이나 음료 제공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고, 요리를 좋아하는 지역주민은 점심 조리에 참여한다. 농가에서는 채소와 쌀을 제공한다. 때로는 밖에서 체조를 하거나 하천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활동도 한다.
카페라는 물리적인 공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다. 일본에서는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답게 머물 수 있는 곳을 '이바쇼(居場所)'라고 표현한다. 우리말의 '있을 곳', '내 자리'보다 조금 넓은 의미다.
이시쿠라 카페는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역할'을 더한다. 치매 당사자는 보호받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손님을 맞고 음료를 나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맡는다. '내가 있을 곳'인 이바쇼이자 동시에 '내가 할 일이 있는 곳'인 셈이다.
치매 당사자만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다. 요리를 잘하지만 자신의 솜씨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던 지역주민에게도 새로운 역할이 생긴다. 농산물을 제공하는 주민, 자원봉사자, 카페를 찾는 손님까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치매 당사자를 일방적으로 돕는 구조가 아니라, 당사자와 주민이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나누며 관계를 이어가는 지역의 일상이다.
■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시쿠라의 또 다른 특징은 '항상 가족과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카페 외에 당사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살롱도 운영한다. 가족이 이동을 도와주더라도 활동에는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이 참여한다.
가족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내면 보호하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이 운영진의 생각이다. 동시에 돌봄을 담당하는 가족에게는 잠시라도 자신의 시간을 돌려준다.
이는 단순한 가족 휴식 프로그램과 다르다. 당사자에게는 '가족이 없는 나의 시간'을, 가족에게는 '돌봄자가 아닌 나의 시간'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일본 정부가 현재 강조하는 '공생(共生)'의 방향과도 연결된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공생을 치매가 있어도 존엄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며, 치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 한국도 '치매인이 일하는 카페'가 있다
한국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시의 '기억다방'과 '초록기억카페'다. 기억다방은 경도인지장애 또는 경증 치매인이 직접 바리스타로 참여하는 사업이다. 이동식 카페에서 시작해 치매안심센터 안의 고정형 카페로도 확대됐다. 주문과 다른 음료가 나오더라도 자연스럽게 이해하자는 운영방식을 통해 치매에 대한 시민의 인식을 바꾸는 목적도 갖는다.
최근에는 초로기 치매 당사자의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내세운 '초록기억카페'가 확대되고 있다. 서울시는 2024년 강서구를 시작으로 도봉·양천에 이어 2026년 성북구에 4호점을 열었다. 당사자들이 스마트팜에서 작물을 기르고 음료를 제조·판매하며 바리스타나 '주스 마스터'로 활동한다. 지점별로 약 10명의 초로기 치매 당사자가 참여한다.
서울시가 내세우는 방향도 치매 진단 이후 상실하기 쉬운 사회적 역할과 주체성을 회복하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데 있다. 실제 서울시는 초기 사업에서 자기효능감과 우울감, 가족의 돌봄 부담 등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 닮았지만 다른 출발점
이시쿠라 카페와 한국의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기억다방과 초록기억카페는 기관이 마련한 공간과 프로그램에 당사자를 참여시키는 형태다. 초록기억카페 역시 서울시가 자치구 치매안심센터를 중심으로 확대하고 있다.
반면 이시쿠라 카페의 출발 순서는 달랐다. 당사자가 먼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지역의 치매 당사자·가족 지원단체가 그 요구를 실현할 방법을 찾았고, 지방정부와 지역주민이 힘을 보탰다.
상향식(bottom-up)과 하향식(top-down)이라는 말만으로 양국의 모든 치매 정책을 나눌 수는 없다. 일본에도 행정 주도 사업이 많고, 한국에서도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는 시도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발점의 차이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좋은 사업이 만들어져도 공모사업이나 예산, 수행기관, 사업기간에 따라 운영 규모와 지속성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당사자 중심'을 표방하더라도 실제 현장에서는 전문가가 미리 설계한 프로그램에 당사자가 참여하는 방식에 머무를 수 있다.
당사자가 프로그램의 대상인지, 자기 삶과 지역 활동을 함께 결정하는 주체인지의 차이다.

■ '12주 프로그램'을 넘어 일상으로 이어지려면
초록기억카페의 운영방식을 보면 이 차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서울시가 앞서 공개한 사업은 스마트팜 원예 프로그램 주 1회와 카페 운영을 통한 사회참여 프로그램 주 2회를 결합한 12주 과정으로 운영됐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고립을 줄이고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만드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실제 서울시는 참여자의 우울감과 자기효능감, 가족의 부양 부담 등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음 과제는 이러한 경험을 정해진 프로그램 기간을 넘어 지역의 일상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다. 정해진 기간과 방식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과 한 사람이 오랫동안 같은 지역에서 역할을 이어가는 삶의 구조는 같지 않다. 치매 당사자의 사회참여를 일상으로 만들려면 카페와 같은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과 함께 동네 카페와 식당, 도서관, 마트, 복지관, 공원, 주민단체와 기업 등 기존 지역사회 안에서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과정도 필요하다.
그 역할도 반드시 '일자리'일 필요는 없다. 식물을 돌볼 수도 있고, 책을 정리할 수도 있다. 동네를 청소하거나 음식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안내하거나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들려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치매가 생긴 뒤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지역사회에 남아 있는가다.
■ 치매인을 위한 장소에서 '치매인과 함께 사는 동네'로
한국의 치매 정책은 지난 수년 동안 치매안심센터를 중심으로 검진과 상담, 인지프로그램, 가족지원과 사례관리 등 다양한 서비스를 확대해 왔다. 이제 초록기억카페처럼 당사자의 사회참여를 정책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다만 이시쿠라 카페가 보여주는 핵심은 비슷한 시설이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누가 사업을 설계하고 당사자를 참여시킬 것인가를 넘어, 당사자가 원하는 삶과 역할에서 출발해 지역사회가 이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에 있다.
2012년 한 치매 당사자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먼저 그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어떻게 지역 안에서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와 역할은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한국이 참고할 지점도 여기에 있다. 치매 당사자를 위해 무엇을 만들어줄 것인가에 앞서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것',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을 넘어 '스스로 역할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 한시적인 사업에 그치지 않고 '그 역할을 지역의 일상에서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치매친화사회는 치매인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많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단을 받은 뒤에도 가고 싶은 곳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며, 무엇보다 '내가 할 일이 있는 동네'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어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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