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미공개 회고록에 담긴 문세광 사건…“일본 공동수사 제의, 내가 막았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 수용하려 했으나 김기춘 반대
“일본 수사관 오면 문세광 진술 바뀔 우려”

중앙정보부 소속 검사로,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수사한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당시 일본의 공동수사 제의를 자신이 반대해 무산시켰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혔다. 신직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일본 수사관이 육 여사 피격범으로 검거된 문세광을 직접 조사하면 기존 진술이 바뀔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주간경향이 입수한 김 전 실장의 미발간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에 담겨 있다. 2009년 10월 제작된 이 회고록은 정식 출판되지 않았고 일부 친지와 지인에게만 배포된 걸로 알려져 있다. 2017년 이 미발간 회고록의 존재와 일부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으나, 문세광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수사 과정은 당시 다뤄지지 않았다.
주간경향은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싸고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의 배후와 수사 과정에 대한 논란이 다시 제기된 후 회고록의 관련 부분을 검토했다. 김 전 실장은 영화에서 범인을 직접 신문한 중앙정보부 소속 검사 ‘김학수 검사(박성훈 역)’의 실제 모델이다.
회고록에서 주목할 부분은 417~418쪽에 등장하는 한일 공동수사 제의와 거부 과정이다. 김 전 실장은 일본 언론이 문세광의 권총 절도 사건을 보도하면서 현장에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공범 가능성을 제기했다고 기록했다. 실제 일본 측은 한국 수사를 신뢰하기 어렵다며 일본 검사와 수사관을 파견해 공동수사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은 공동수사 제안을 반대했다.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이유는 수사 주권이었다. 한국이 재판권을 가진 사건에 일본 수사관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는 주장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문세광의 진술이 바뀔 가능성이었다. 김 전 실장은 문세광이 이미 범행을 자백했는데 일본 수사관이 참여해 진술이 바뀌면 한국 수사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김 전 실장 의견에 신 부장도 동의했다. 김 전 실장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김포공항 귀빈실에서 대기하던 김영선 주일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공동수사 제안을 거절하도록 했다.
문세광 조사를 둘러싸고 정부 기관 사이의 알력이 벌어진 사실도 공개돼 있다. 사건 발생 다음 날 열린 청와대 대책회의에서 김치열 검찰총장은 중앙정보부의 수사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 신 부장은 대책회의에서 돌아온 뒤 김 전 실장에게 직접 조사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문세광 사건의 배후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수사 결과를 내놓았었다. 한국 수사당국은 북한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사건에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일본 경찰은 문세광이 권총을 훔친 사실은 확인했으나, 조총련 연관설에 대해선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일본 경찰청이 발간한 1975년 경찰백서에는 일본 경찰이 범행 자금의 출처 등을 규명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 전 실장은 회고록에서 문세광의 자백 경위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사건 다음 날인 1974년 8월 16일 신 부장의 지시로 문세광을 조사하게 됐다고 기록했다. 당시 문세광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장시간 조사했는데도 범행 동기와 배후에 관해서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고 김 전 실장은 주장했다.
이에 김 전 실장은 여름휴가 중 읽었던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암살자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김 전 실장은 문세광도 소설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작품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문세광이 소설을 읽었다고 대답하자 김 전 실장은 소설 속 암살자와 문세광을 연결하는 질문을 던졌다. 문세광이 호응하면서 범행 이야기를 꺼냈다고 김 전 실장은 주장했다. <암살자(들)>속 김학수 검사도 <자칼의 날>을 매개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자랑한다.
김 전 실장은 자신이 문세광을 조사하는 동안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CCTV를 통해 조사 상황을 지켜봤다고 회고했다. 김 전 실장이 문세광에게 권총을 훔친 파출소 내부와 관련 물품을 버렸다는 장소를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김 전 실장은 문세광의 자술서와 그림을 일본 측에 전달했고, 일본 경찰이 실제로 강에서 권총 관련 물품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영화 <암살자(들)>은 육 여사 시해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관여됐으며, 윗선이 있었다는 식으로 묘사해 보수층으로부터 역사 왜곡 비판을 받고 있다. 김 전 실장은 최근 발간된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문세광은 분명한 단독범이고, 공범 의혹은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며 중앙정보부가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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