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책들, 삶을 완성한 책들…그 숲에서 거닐다

한겨레 2026. 9. 28. 20:3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나는 우리의 전통적 가르침이었던 유가(儒家) 전적들을 접하기 위해 다소 이색적인 경로를 밟았다.

당시 '월든'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에게 그분도 이 책을 읽었는지 물어본 일이 있다. 학문에 직결된 일은 아니지만, 명색이 연구를 함께한다는 자가 고등학생들이나 읽을 책의 내용을 들고 와서 뭐 대단한 이야기나 되듯 떠벌렸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하지만 그 후 나는 이 일을 떠올리면서 지도교수가 오히려 교육의 희생자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단순하게 살아갈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사회비판적 활동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과 그 부인이 자본주의적 생활을 강요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가 나름의 만족한 삶을 이뤄 나가는 생활 기록이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길을 찾아서 - 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12화 유가 경전과 고전 명작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나는 우리의 전통적 가르침이었던 유가(儒家) 전적들을 접하기 위해 다소 이색적인 경로를 밟았다. 앞선 글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내 선조의 한분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우주설’(宇宙說)이라는 책을 우격다짐으로 읽어 내던 가운데 한문 해독 능력을 부수적으로 익혔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문 해설서에 해당하는 조두현의 ‘한문입문’ 등 당시에 나와 있던 작은 책자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는 독자적 학습에 의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이 시기에 내가 서울대학교에 재직했다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일반인은 쉽게 출입할 수 없는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에 들어가 그간 제호로만 알고 있었던 ‘우주설’의 전문을 찾아내어 복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교직원 신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또 읽어 나가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아무 때고 규장각의 전문 사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보기에 따라 이러한 내 학습은 학문의 순서를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여헌의 학문은 바로 내가 태어난 고장의 학문일 뿐 아니라 내 가문의 학문이니 이것부터 익히고 외래의 학문인 물리학을 비롯한 서구 학문에 접근해 가는 것이 바른 순서일 텐데, 거꾸로 우리 학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외래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뒤늦게 내 고장 내 가문의 학문을 무슨 별난 세계의 일이나 보듯이 기웃거리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학문적으로 일단 서구인이 되어 서구 학문의 시각에서 내 문화적 뿌리인 우리 학문으로 역행해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후에 학술 논문 ‘조선 후기 초 지식 계층의 자연관’, ‘한국문화’ 제11호(1990)를 비롯해 내 저서(‘삶과 온생명’, ‘공부 이야기’, 그리고 최근에 쓴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등) 여기저기에 소개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말고도 이 책을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얻은 바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우선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그간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우리의 전통 학문, 곧 성리학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접근하게 되었다. ‘우주설’이라는 책은 자연과학적·철학적 주제인 ‘우주’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은 전통적인 성리학이며 우주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자신의 성리학을 요약 정리한 책이기도 하다.(실제로 이 책은 ‘여헌성리학’이라는 제호로 출간된 8권의 책 가운데 마지막 권에 해당한다.)

또 한가지 부수적으로 얻게 된 수확은 이를 계기로 한문 원전에 직접 접근할 용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후 ‘주역’을 비롯한 ‘태극도설’ 등 유교의 전적뿐 아니라 노자와 장자의 글 등 다양한 동양 고전들을 최소한 원전을 음미해 가며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내게는 커다란 지적 희열이며 학문적 자산이다. 예를 들어, 나는 ‘주역과 양자역학의 비교 검토’(‘삶과 온생명’ 제2장)라는 논문도 썼는데, 이는 주역 관련 원전들을 직접 해독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는 불교에 대해서도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번에도 우리 토착 문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선(禪·Zen) 불교에 대한 스즈키 다이세츠의 책들(‘Essays in Zen Buddhism’ 등)을 통해서다. 선불교라 하면 일찍이 삼국시대 이래 바로 우리 땅에 들어왔고 우리 땅이 오히려 본고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미국 등에서 활동한 일본 출신 학자의 영어본 책을 통해 그 개요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 후 한문을 익힌 덕택에 지금은 불교의 ‘대승기신론’ 등 한자로 된 불교 전적을 원문을 참작하여 읽고 있다.

사람들이 경전 다음으로 높이 평가하는 책들이 이른바 고전이고 명작이다. 이들은 대개 문학 작품을 비롯해 우리 마음의 양식이 되어 주는 책들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읽은 고전과 명작의 분량은 무척 빈약했다. 마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전공 자체가 자연과학 분야인데다가 책을 충분히 읽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당시엔 읽을 만한 좋은 책도 그리 많이 출간되지 않았다.

지금 기억을 떠올려 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 일부 영문 작품들을 국영 대역으로 읽었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 그리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들을 읽었다. 지드의 ‘좁은 문’과 릴케의 시에 대해서는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프랑스어와 독일어 원전을 꼭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후 프랑스어를 조금 공부하기는 했는데 지드 작품에 대한 열의가 이미 식었고, 독일어판 릴케 시집도 두권을 샀으나 감명을 주었던 시들은 그 안에서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한편 당시 신간으로 나왔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손에 땀을 쥐고 읽었는데 결말이 너무도 허전해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문학 작품보다는 좀 더 삶에 직결된 책들을 읽었다. 그중 하나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가 월든이라는 호숫가 숲속에 들어가서 혼자 힘으로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나는 그만 흠뻑 취하고 말았다. 당시 ‘월든’을 읽고 감동한 나머지 내 박사학위 지도교수에게 그분도 이 책을 읽었는지 물어본 일이 있다. 그는 그저 무덤덤하게 자기는 고등학교 때 읽었노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학문에 직결된 일은 아니지만, 명색이 연구를 함께한다는 자가 고등학생들이나 읽을 책의 내용을 들고 와서 뭐 대단한 이야기나 되듯 떠벌렸으니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하지만 그 후 나는 이 일을 떠올리면서 지도교수가 오히려 교육의 희생자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쩌면 그는 고등학교에서 ‘읽기 과제’로 이 책을 읽었을지 모른다. 그 후, 별 감명도 없이 숙제를 했다는 심정으로 내던진 것은 아닐까? 정말 이 책이 고등학생에게 절실한 느낌으로 다가올 책인가? 만일 내가 10대에 이를 읽었더라도 그렇게 감동을 받았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 지도교수는 너무 일찍이 이 책을 접했기에 오히려 그 진정한 의미를 영영 놓쳐버린 게 된다.

내가 젊은 시절에 읽었던 또 하나의 책이 후에 국내에서 ‘조화로운 삶’이란 제호로 번역된 니어링 부부의 ‘리빙 더 굿 라이프’(Living the Good Life)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단순하게 살아갈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사회비판적 활동으로 교수직을 박탈당한 지식인과 그 부인이 자본주의적 생활을 강요하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가 나름의 만족한 삶을 이뤄 나가는 생활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특히 두가지가 인상에 깊이 남았다. 그 하나는 생계를 위한 활동은 오직 오전 시간에만 국한하고 오후는 완전히 비워 자기 나름의 창조적 취미 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저녁 식사는 오로지 야채와 과일만으로 하고 곡물이나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은 이러한 생활이 젊을 때는 가능하겠지만,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후 다른 글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남편 스콧 니어링은 100살까지 건강히 자급자족 생활을 지속하다가, 100살 생일이 되던 날, 더 이상의 생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식사를 단절함으로써 조용히 생을 마쳤다고 한다. 결국 책이란 단순히 출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자신의 생애를 통해 마지막까지 이를 입증함으로써 완성된다는 교훈을 여기서 찾는다.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