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이 바라본 인류의 아이러니 ‘가능한 사랑’ [함상범의 옥석]

함상범 2026. 9. 2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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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안에서 해고는 생존과 직결된다. 해고 노동자를 '죽은 자', 회사에 남게 된 사람을 '산 자'로 표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예지의 카메라를 통해 해고 노동자, 즉 '죽은 자'들의 아픔이 생생히 드러난다.

'기생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경제적 계급의 차이에 집중했다면, '가능한 사랑'은 계급 간의 관계성에 더 포커스를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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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사랑. 사진| 넷플릭스


[스포츠서울 | 함상범 기자] 자본주의 안에서 해고는 생존과 직결된다. 해고 노동자를 ‘죽은 자’, 회사에 남게 된 사람을 ‘산 자’로 표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죽음 앞에 선 노동자들의 결기는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패배 후 후유증 역시 전쟁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여기 패잔병 부부가 있다. 기업 사냥꾼들의 몰염치한 행위에 저항해 자리를 지키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정부로부터 짓밟혀 아픔이 지속되고 있다. 친한 후배를 구해주고 대신 경찰에게 밟혀 몸이 성치 않게 된 호석(설경구 분)은 그 상처 때문에 웃음도 미래도 잃었다. 호석의 아내 미옥(전도연 분)은 그저 조용히 그 옆을 지킬 뿐이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PD 부부가 있다. 자본주의 내 최상위 포식자다. 굳이 전쟁을 치를 이유 없이 늘 높은 곳에 서 있다.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약자를 대변하고자 하는 예지(조여정 분)와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 분)는 우연히 호석 부부를 만난다. 그들의 고통을 담아내겠다는 목적으로 가까워진다.

‘가능한 사랑’ 스틸컷. 사진 | 넷플릭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영화다. 자본주의 내 계급을 표현하면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 곁의 계급은 무엇인가?’ ‘극단적인 부는 어떻게 되물림 되는가?’ ‘계급 간의 진정한 사랑은 가능한가?’ ‘부자와 빈자의 행복은 자본의 크기에 비례하는가?’ ‘구조조정이란 전쟁이 남긴 가장 극심한 고통은 무엇인가?’ 등 수많은 물음표를 남기고, 또 은은히 연출자의 판단을 담는다.

영화는 네 남녀가 얽히며 빚어내는 관계의 복잡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돈에 짓밟힌 해고 노동자의 상처를, 아이러니하게도 부자의 돈으로 찍어야 하는 다큐멘터리의 제작 과정이 대표적이다. 빈부격차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갑과 을의 위치가 수시로 뒤집힌다. 부부 관계에서조차 보이지 않는 권력 차이가 드러난다. 아주 작은 대사와 설정으로 관객의 예상을 비껴가지만, 그 모든 과정엔 설득력이 있다.

카메라는 예지가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겉보기엔 정적인 흐름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스크린 속 날것의 감정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다루는 주제는 묵직하고 복합적이지만, 이야기의 호흡만큼은 이창동 감독의 역대 작품 중 가장 대중 친화적이다.

대규모 파업의 이면을 파고든 시선도 예리하다. 예지의 카메라를 통해 해고 노동자, 즉 ‘죽은 자’들의 아픔이 생생히 드러난다. 진짜 비극은 해고 그 자체가 아니었다. 기술력만 빼먹으려던 ‘천한 자본’의 편에 선 정부에 절망하고, 회사에 남은 옛 동료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30초 남짓한 시간에 피가 마른다. 해고된 뒤 변해버린 친구들의 시선 앞에서 오히려 선한 웃음을 지어야 했던 굴욕감이 상처를 더 깊게 후벼 판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절규는, 고용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시대에 커다란 깨우침을 남긴다.

‘가능한 사랑’ 스틸컷. 사진 | 넷플릭스


극의 중심을 장악하는 건 상처받은 빈자의 세계를 구축한 전도연과 설경구다. 마음이 아픈 호석 대신 파업 전후의 아픔을 전달하며 극을 이끄는 미옥 역의 전도연은 모든 순간 펄떡이며 살아 숨 쉰다. 닳을 대로 닳은 베테랑이 어떻게 매번 입체적인 캐릭터로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지 경외감마저 든다. 수더분한 일상을 살며 때론 수줍게 흔들리다가도, 지켜야 할 것 앞에선 기개를 뿜어내고 끝내 사랑스러운 미소까지 건네는 다채로운 얼굴은 ‘역시 전도연’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여기에 설경구의 뚝심이 동행한다. 첫 장면부터 슬픔과 광기의 눈빛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죽을 각오로 용기를 내 ‘인간에 대한 환멸’을 토해낼 땐 관객의 숨통마저 옥죈다. 일찍이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로 거장의 뮤즈였던 설경구는, 왜 자신이 여전히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지를 극단적인 절절함으로 증명해 낸다. 클래스가 다른 두 배우의 앙상블은 경이롭다.

이들과 충돌하는 다큐멘터리 부부, 조여정과 조인성은 자본주의 최상층의 서늘한 민낯을 영리하게 그려낸다. 예지 역의 조여정은 특유의 맑은 얼굴을 무기로 삼았다. 약자를 향한 시혜적인 동정을 마치 메소드 연기처럼 뽐내고 만다. 더 잔인한 이기심을 순수한 얼굴로 투명하게 그려낸다. 이 부분에선 대항마가 없는 톱티어다.

그 곁의 상우를 연기한 조인성은 알파메일 그 자체다. 겉으로는 젠틀하고 부드러우나, 그 이면에선 타인을 향한 영혼의 온기가 배제된 까끌까끌하고 차가운 자본의 속성을 은은하게 뿜어낸다. 크게 잘못한 것 없지만 묘하게 재수 없는 인간의 서늘한 습성을 제대로 구현한다.

‘가능한 사랑’ 스틸컷. 사진 | 넷플릭스


‘기생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경제적 계급의 차이에 집중했다면, ‘가능한 사랑’은 계급 간의 관계성에 더 포커스를 맞췄다. 부자의 어설픈 동정이 빈자에게 폭력이 되진 않는지, 빈자가 어떻게 하면 당당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인간 사회에서 진짜 상처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등 단 한 마디로 쉽게 내릴 수 없는 통찰이 가득 담긴 ‘철학서’와 닮았다. ‘기생충’과 다른 방향으로 오래 회자되고 기록될 만한 명품의 탄생이다. intellybeas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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