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서 태어나 경북 예천 정착한 억척 여성 분투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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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중심 중의 중심'으로 김일성광장과 외무성이 있는 중구역 중성동에서 중앙당 간부 맏딸로 태어났다.
탈북 여성은 대개 중국 남성의 보호를 받지만, 탈북 남성은 신고 대상일 뿐이다.
특별히 많이 탈북해서라기보다는 중국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남성보다 몇 배로 높기 때문이다.
하나 남은 여섯 살 아래 남동생도 중국으로 탈북했다는 말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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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중심 중의 중심’으로 김일성광장과 외무성이 있는 중구역 중성동에서 중앙당 간부 맏딸로 태어났다. 아무 걱정 없는 인생을 살 줄 알았지만 30대에 굶주림에 시달리다 중국에 팔려 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느덧 60대가 돼 뿌리내린 곳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이다. 식당도 하고, 농사도 짓고, 인력사무소도 하면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살고 있다. 경작하는 논밭만 100마지기(약 6만6000㎡·2만 평). 벼와 콩, 참깨, 감자, 양파 등 다양하게 재배하고 있다.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소원이 있다. 통일이 되면 소유한 차량 6대에 직접 생산한 쌀을 가득 싣고 평양에 가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꿈이다. 그것이 굶다가 세상을 떠나 관도 없이 묻힌 어머니, 역시 아사한 오빠, 그리고 탈북 후 생사를 모르지만 죽었을 확률이 큰 남동생 영혼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그런 소원이 남아 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주저앉을 수가 없다. 휴대전화는 오늘도 쉼 없이 울린다.
“네, 김려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교사가 정한 47명의 운명
김려원 씨는 1962년에 태어났다. 1978년, 16세에 노동자가 되기까지는 그나마 북한 ‘황금기’라 배고픈 기억이 없었다.
함흥 출신 부친은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가 중앙당 간부로 발탁돼 평양에 올라왔다. 중앙당 공급은 좋았다. 식구 수에 맞게 지급된 기름과 사탕이 남아 주변에 나눠 줄 정도였다.
김 씨는 ‘평양성 중심’이라는 뜻인 중성동 중앙당 아파트에서 태어나 보통문인민학교와 창전중학교를 다녔다. 평양 중심에 살다 보니 집단체조나 김일성이 참가하는 ‘1호 행사’에 자주 동원됐지만, 주변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살았기에 불만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다. 매년 한두 달씩 지방으로 농촌 동원을 나가면 학급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중학교 5학년 졸업반 때인 1978년 무참히 깨졌다. 당시까진 북한 의무 고등교육이 5학년까지였다. 그의 학년은 한 반이 50명 안팎인 8개 반이 4개 반씩 남자 반과 여자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어느 날 한 반을 노동 현장에 ‘집단 진출’시키라는 당의 지시가 하달되자 김 씨의 담임교사가 “우리 반이 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1976년 8월 자신들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평양에서 출신 성분이 나쁜 사람이나 장애인들을 대거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평양 시내 공장을 돌릴 인력이 크게 부족해지면서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 여러 공장으로 보냈다.
불행하게도 김 씨 담임선생은 결혼 전에 노동당원이 되고 싶어 안날이 났다. 당의 관심이 쏠린 이때야말로 잘 보일 기회라고 판단해 학생 집단 진출을 의논하는 회의에서 제일 먼저 자원했다. 자신의 학급 47명 학생 의견 같은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함께 노동 현장으로 진출하자는 제자들 제안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학생들을 평양방직공장에 떠밀어 보낸 뒤 그 교사는 학교에 남았다.
학부모들은 난리가 났지만, 당의 결정에 감히 불만을 터놓을 순 없었다. 당시만 해도 평양에선 한밤중 한 가족을 차에 태워 지방으로 보내 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그 가족은 왜 추방되는지도 몰랐다. 구실이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식이라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김 씨 삼촌도 지방으로 쫓겨 갔다. 담배를 말아 피운 신문지가 문제였다. 거기에 김일성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평양 시내 각 학교에서 뽑힌 학생들은 고무공장, 전구공장, 곡산(穀産)공장 등으로 집단 배치됐다. 김 씨는 원래 그해 9월에 졸업해야 했지만 졸업을 6개월 앞두고 미리 졸업장을 받은 뒤 노동자가 됐다.
학생 집단 진출은 여론이 안 좋아 이듬해엔 한 반을 통째로 보내라는 방침은 사라졌다. 하지만 김 씨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그가 집단 진출에 걸리지 않았다면 대학에도, 요리학교에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 결혼으로 탈출한 직장
김 씨 반 여학생들은 한날한시에 평양방직공장 후처리(제품 최종 포장)공장에 배정됐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들고 대동교를 건너 공장에 출근하는 일과가 반복됐다. 10대 후반 김 씨에겐 지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공장을 탈출하는 유일한 방도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결혼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북한 당국은 여성 결혼 연령을 25세 이후로 정하고 그 이전에 결혼하겠다고 하면 ‘사상투쟁회의’를 소집해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며 결혼 등록을 막았다.
결혼 연령까지 일하려면 9년을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다행히’ 김 씨는 7년을 일하고 23세 되던 1985년 결혼했다. 그를 좋아한 남자가 방직공장 직장 사로청(조선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 비판 회의를 주도하는 청년 간부가 남편이 되니 결혼 문제는 조용히 처리됐다. 공장에 집단 진출한 동창 47명 중 각종 능력을 총동원해 25세 이전에 결혼한 여성은 3명밖에 없었다.
군사분계선 근처 군 특수부대에서 11년을 복무하고 이 공장에 집단 배치된 남편은 김일성광장 무도회 행사 때 만난 김 씨에게 반해 버렸다. 9살 연상이어서 김 씨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결혼하면 공장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유혹이 더 컸다. 결혼 직후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던 김 씨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남편은 능력이 있었다. 결혼 뒤 남편 역시 5월1일경기장 음향사로 직장을 옮겼다. 음향사는 국가에 등록된 직업일 뿐이고 실제론 개인 자전거를 고쳐 주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가끔 몰래 사금(沙金) 장사에도 손을 댔다. 개인간 금 거래는 중범죄로 간주돼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떨어지는 돈이 많았다.
남편이 돈을 잘 버니 살아가는 데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1993년 남편이 안전부에 체포됐다. 계속 자전거를 바꾸고 외화벌이 상점에도 다니는 남편을 안전부는 ‘수입 대 지출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시 대상에 올렸고 결국 사달이 났다. 남편은 비사회주의적 경제활동을 했다며 함북 청진으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
김 씨도 청진에 같이 가야 했다. 하지만 바람까지 피운 남편을 따라 지방에 갈 생각은 없었다. 김 씨 가족도 “이번 기회에 헤어지라”고 성화였다. 김 씨의 첫 결혼은 그렇게 끝났다.

● 당원증을 안고 죽은 사람들
31세에 혼자가 된 김 씨는 중구역 경상동 옥류관 바로 앞에 있는 한 온밥(온반)집에 취직했다. 평양에서 여성이 식당에 취직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의 요리 실력이 반영됐는지 취업에 성공했다. 먹을 것을 주무르는 식당에서 일하면 배고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1995년 시작된 ‘고난의 행군’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쌀과 고기 등 식당 운영에 필요한 재료가 공급되지 않자 온밥집은 문을 닫았다. 고난의 행군 시기 평양에는 문 닫는 식당이 적지 않았다. 김 씨는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무엇이든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는 남편 때문에 얻어들은 지식이 있는 사금 장사를 택했다. 평안북도나 자강도 등 깊은 산골에서 사람들이 몰래 강에서 채취한 사금을 사서 녹인 다음 덩어리로 만들어 신의주에 가서 파는 일이었다.
금 밀수출도 여러 단계를 거쳐 이뤄진다. 유통망은 사금 캐는 사람, 넘겨받는 사람, 덩어리로 가공하는 사람, 덩어리를 밀수업자에게 전달하는 중간책, 최종적으로 중국에 밀수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초기엔 먹고 살 만큼 돈을 벌었다.
하지만 1996년 치명적인 사기를 당했다. 북한 화폐가 휴지나 다름없다 보니 금 거래는 달러로 이뤄졌다. 김 씨가 받은 대금 200달러가 위조지폐였다. 그에겐 전 재산이었다. 사기당한 돈을 돌려받을 방법도 없었다. 북한 시장에선 100달러 위조지폐가 진짜 미화 10달러에 팔린다. 돈을 찾겠다고 미친 듯이 돌아다니다 보니 위폐와 바꾼 20달러도 금방 없어졌다.
‘이젠 내가 굶어 죽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당시 신의주역 앞에는 자고 나면 굶어죽은 시신들이 생겨 났다. 시신이나마 사람들에게 발견되고 싶어서였는지, 역에 나오면 먹을 것을 주는 마음 착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아사 직전의 사람들이 신의주역으로 몰려왔다.
사기를 당하고 1년쯤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던 김 씨도 어느 날 신의주역 앞에 나가 앉았다. 그때 본 시신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노동당원증을 펼쳐 가슴 위에 부여잡고 죽은 시신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죽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당에 충성을 다했다”고 증명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평생 충성을 바쳤지만 자신들을 굶어 죽게 만든 노동당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까. 김 씨는 지금도 그 답을 모른다.

●“함께 중국에 가요.”
삶의 희망을 버린 그에게 젊은 여자가 다가왔다.
“저기요, 이렇게 죽지 말고 중국에 같이 가요. 거기 가서 몇 달만 일하면 큰돈을 벌 수 있어요.”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래, 중국이 있었구나.’
여자인 것이 다행인 시대도 있고 다행인 나라도 있다. 당시 북한이 그랬다. 누구도 역 앞에서 굶어 죽는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여성은 달랐다.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탈북 여성은 대개 중국 남성의 보호를 받지만, 탈북 남성은 신고 대상일 뿐이다. 중국에 와서 ‘나도 여자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탄하는 탈북 남성이 많다.
중국에 사는 탈북 여성 인권은 참혹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탈북 남성에겐 인권이 문제가 아니라 생사가 문제였다. 지금까지 한국에 온 탈북민 3만5000여 명 가운데 4명 중 3명 이상이 여성이다. 특별히 많이 탈북해서라기보다는 중국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남성보다 몇 배로 높기 때문이다.
김 씨는 그 여성과 함께 압록강 근처 혜산으로 이동했다. 1997년 9월 압록강을 넘을 때 일행은 그를 포함해 8명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탈북은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 장백현의 한 움막에 머물면서 인근 집 농사를 도와주기로 했는데 일행 중에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가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를 순찰하던 공안이 들었다. 8명은 중국을 경험할 새도 없이 체포돼 혜산으로 북송됐다.
1997년은 북한 사람이 대거 탈북하던 시기였다. 중국에 연줄도 없이 무턱대고 도강했다가 잡혀서 되돌아오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북한 보위부도 매일 쏟아지는 북송 탈북민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사람들을 가두고도 먹일 식량이 없었다.
심문해 봐야 탈북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다수라 난감해했다. 탈북하지 말라는 것은 앉아서 굶어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압록강을 건너가자마자 잡힌 탈북민에겐 비교적 관대했다. 물론 보위부의 관대함은 거리에 시신이 뒹굴던 1995년~1998년 정도였고 이후엔 다시 악랄한 본성으로 되돌아갔다.
김 씨는 사흘 체류가 인정돼 약 두 달간 강제노동만 하고 석방됐다. 갈 곳은 없었다. 불과 3일 경험에 불과했지만 그가 본 중국은 풍요로운 나라였다. 다시 중국에 가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 두 번째 북송
그해(1997년) 12월 그는 다시 강을 넘었다. 이번엔 중국 조선족 인신매매에 걸렸다. 굶주린 사람에게 인신매매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쩌면 삶의 유일한 동아줄이기도 하다.
중국에 넘어온 그와 다른 여성 한 명은 브로커를 따라 보름이나 산길을 걸어 연길 안도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을 넘겨받은 사람은 안도현 공안국 공안원이었다. 연길 공안원 가운데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인 북한 여성 매매에 발을 담근 사람이 많았다. 공안원은 김 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를 산둥에 사는 자신의 사촌 형에게 4000위안에 팔았다.
브로커를 따라 간 곳은 땅콩 주산지인 외진 농촌이었다. 주변 환경은 더럽고 음식도 맞지 않으며 TV조차 없는 허름한 집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한족과 살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나마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기에 마음을 붙이려 했다. 김 씨는 7개월쯤 머무르면서 직접 뜨개질해 번 돈으로 라디오부터 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한국 소식은 그에게 더 큰 꿈을 갖게 해 줬다.
마을에 어느 정도 적응돼서 보니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집 주변 도보 30분 거리 안에 자신처럼 팔려온 북한 여성이 6명이나 있었다. 그중 3명이 잡혀 북송됐다. 불안 속에서 더 머물고 싶진 않았다.
그는 다른 탈북 여성에게서 “청도라는 곳에 가면 한국 기업이 많은데, 그곳에서 일하면 훨씬 안전하고 돈도 많이 번다”는 말을 들었다. 김 씨는 그녀를 따라 청도로 도망쳤다.
청도에 있는 한국 신발공장을 찾아가 사정하려 했다. 그런데 입구 경비를 서던 남성이 “탈북자가 도시에선 살기 위험하다”며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하청 공장을 소개해 주었다. 김 씨와 다른 탈북 여성은 거기에 취직했다. 김 씨는 월급 600위안을 받으며 식당에서 일했다. 농사보단 식당 일이 더 나았고 돈도 벌 수 있으니 도망친 것이 참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8개월쯤 지났을 때 같이 온 여성이 청도에 다시 갔다가 공안에 붙잡힌 것이다. 그가 공안을 끌고 공장에 오는 바람에 김 씨도 체포됐다. 1999년 12월 31일이었다.
감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2000년 1월 1일 새해를 맞았다. 설날 특식 같은 것은 없었다. 빵을 뜯으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새천년 첫날 역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 가족의 비참한 죽음
2000년 2월 19일 그는 청도에서 체포된 다른 탈북민 8명과 함께 신의주로 북송됐다. 한 차례 북송 경험이 있던 김 씨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그 사흘 전 생일을 맞은 김정일이 갑자기 “사람들이 굶어 죽게 돼 중국에 넘어간 것에는 국가 책임도 있으니, 이제부터 (중국에서) 북송되는 사람은 한 달 동안 교육만 시키고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물론 이 즉흥적인 지시는 또 다른 즉흥적 지시로 바뀌기 마련이다. 북송된 탈북민이 혜택을 본 시기는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 지시는 북한에 있었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입증된 사람에게만 해당됐다.
김 씨는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넘게 구류장에서 조사받았다. 그가 체포된 청도에는 한국 기업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위원들은 김 씨에게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만났느냐” “한국 기업에서 일했느냐” 등을 집요하게 캐묻고는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사정없이 때렸다. 그렇게 고문당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청도 공장 식당에서 일하면서 받지 못한 월급이 수천 위안이나 됐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꼭 중국에 가서 밀린 월급을 받으리라. 그 돈이면 다시 북한에 와도 든든한 장사 밑천이 될 수 있다.’
그해 5월 2일 보위부가 집에 가라며 그에게 여행증을 내밀었다. 석방된 그에겐 온 가족이 잘못됐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양 살던 어머니는 그가 중국으로 건너간 이듬해인 1998년 굶어 죽었다고 했다. 관을 살 돈도 없어 시신을 이불에 싸서 묻었다고 했다. 오빠 역시 굶어서 숨졌다. 하나 남은 여섯 살 아래 남동생도 중국으로 탈북했다는 말만 들었다. 김 씨는 지금도 남동생 소식을 모른다. 체포돼 북한에 다시 끌려간 사람 명단에 이름도 없어 죽었을 확률이 높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혈육은 북한 어느 지방에 간 여동생뿐이었다.
땅을 치고 통곡해도 되돌릴 수 없는 운명이었다. 북한에 있었다면 그 역시 땅에 묻혔을 것이다. 막 자리 잡은 중국에선 고향에 돈을 보낼 길이 없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다시 혜산으로 갔다. 6월 세 번째로 압록강을 넘었다. 이번 탈북은 어디로 갈지 목표가 분명했다. 수천 위안을 받을 것이란 희망도 있었다.
갖은 고생 끝에 일하던 공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주변에 물어보니 그새 회사는 부도가 나서 망했다고 했다. 돈을 받아내야 할 사람들도 다 사라졌다. 밀린 월급 받는 꿈을 꾸며 반년의 수감 생활을 버텼는데 꿈이 사라지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기만 할 수는 없었다. 새 일을 찾아야 했다. 중국어도 어느 정도 가능해서 조선족이라고 거짓말할 수 있었다. 조선족으로 신분을 속이고 찾은 첫 번째 일은 청도 어느 한국 공장 식당 주방 일이었다. 당시 조선족이 귀해서 취직할 수 있는 한국 공장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하루 만에 도망쳤다. 한국 기업이라 점심으로 계란볶음밥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만들었는데, 밥 먹던 사람들이 “이거 북한식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에 겁에 질렸다.
한국식 요리를 만들지 못하면 자리 잡기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한식 가르치는 사람을 찾아내 보름 동안 배웠다.

● 49세에 도착한 한국
두 번째 취업은 성공이었다. 한국 액세서리 회사로 한국인 4명과 조선족, 한족으로 구성된 직원 12명에게 밥을 해 주는 자리였다.
비로소 일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해주는 식사가 맛있다고 소문이 나자 한국인 사장이 찾아와 밥을 먹었다. 그리곤 그에게 보조원 한 명을 붙여 줄 테니 직원 80명인 식당에서 일해 달라고 제안했다. 월급이나 처우가 훨씬 좋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직원들은 한국인 일본인 조선족 한족이 모두 있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 회사에서 2006년까지 6년 동안 일했다. 돈을 벌어 월셋집도 잡을 수 있었고 한국 위성TV 안테나까지 설치해 사람답게 살았다. 물론 탈북민 신분이라 안전하지는 않았다. 위성 안테나를 보고 공안이 검문하러 와서 정신없이 도망간 적도 있었다. 어느 날 한 조선족 직원이 김 씨가 사 놓은 컴퓨터가 욕심 나 그를 공안에 신고했다. 큰 위기였다.
신분이 드러났으니 청도엔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사장은 저장성 이우에 호텔을 운영하는 한국인 지인이 있으니 그곳에서 일하라고 소개해 주었다.
이우에서의 생활도 좋았다. 세계 최대 도매시장이 있는 도시라 한국인이 많이 찾아왔다. 그는 그 호텔 한식부 책임자로 일했다. 사장은 그의 안전을 위해 호텔방을 숙소로 제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에서 사는 방법을 체득했다. 경제적 형편도 나아졌다. 한국으로 출발한 2009년까지 9년 동안 그는 3만 위안(약 560만 원)을 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탈북민 신분이었다. 오래전부터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가 이우에서 알게 된 다섯 살 아래 탈북 여성이 2009년 먼저 한국으로 갔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하나원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 난 무사히 왔으니 그 길로 언니도 오면 될 것 같아. 내가 전화번호를 줄 테니, 여기에 전화하면 한국으로 데려와 줄 거야.”
그렇게 한국행 길을 개척해 준 그 동생은 한국 사회에서 단 하루도 살지 못한 채 하나원에서 숨졌다. 원래 심장이 많이 나빴는데 하나원에 온 뒤 심장 수술을 받다가 끝내 소생하지 못한 것이다. 김 씨는 42세에 하늘나라로 간, 어쩌면 그에겐 은인인 그 동생을 자주 생각한다.
2009년 여름 한국으로 가기 위해 오랫동안 정든 곳을 떠났다. 한국행도 쉽진 않았다. 중국 곤명에 가서 자신의 차례가 오길 반년이나 기다려야 했고, 태국으로 넘어가서도 그곳 감옥에서 오래 있어야 했다. 2009년은 한국에 온 탈북민이 2927명으로 정점을 기록한 해였다. 탈북민 행렬은 곳곳에서 적체가 됐다. 오랜 기다림 끝에 김 씨는 2010년 9월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2011년 2월 하나원을 졸업했다. 49세에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했다.

● 칭찬받는 예천 며느리
거주지를 정할 때 그는 서울에 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평양에서 자란 기억 때문일까, 도시 생활이 싫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충북 충주였다. 탈북 여성이 많이 고용되던 고속도로 요금소가 첫 직장이었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45km 떨어져 있었다.
일하는 것보다 출퇴근이 더 힘들었다. 어느 날 큰맘 먹고 오토바이를 샀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니 동료들이 기겁하며 왜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면 안 되는지 설명해 줬다. 오토바이 출근은 그렇게 하루 만에 끝났다.
월급 210만 원을 받았지만, 그에겐 중국에서 갖고 온 밑천 3만 위안이 있었다. 운전면허증을 따서 값싼 차를 사고 나니 회사 다니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첫 직장은 3년 다니고 퇴사했다. 한국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니 식당을 했던 경험을 살려 독립한다면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는 경기 이천시로 옮겨 가 중국식당을 열었다. 나름대로 장사가 잘 됐다.
몇 년 뒤 그에게 중매가 들어왔다. “언제까지 여자 혼자 살 거냐. 남자를 만나 의지해 사는 것이 좋지 않겠나. 경북 예천이란 곳에 네 살 연하 ‘돌싱’ 남성인데 거기에서 함께 사는 게 좋을 것이다”라는 설득에 넘어갔다. 돌아보니 20년 넘게 혼자 살아왔다. 가족이란 안식처가 그리웠다.
남편 될 사람에게 요구 조건 한 가지를 내걸었다. 예천에서도 식당을 운영하겠다는 것. 상대는 흔쾌히 동의했다.
2017년 그는 예천으로 이주했다. 남편은 집 빼곤 아무 재산이 없었다. 남편은 시부모 땅 네 마지기(약 2650㎡·800평)에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빚도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싸움도 많이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 씨는 소머리국밥 집을 차렸다. 능이오리백숙, 오리주물럭도 인기 메뉴였다. 식당이라도 차려 몰두하니 견딜 만했다. 술을 달고 살던 남편은 결혼하고 몇 년 안 돼 간경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21년 세상을 떠났다. 결혼 생활 4년 만에 남편이 숨지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집 며느리는 조만간 다른 데로 가겠군.”
하지만 김 씨는 떠나지 않았다.
“남편 때문에 늘 속상했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있어요. 남편 덕분에 예천이라는 전혀 모르는 동네에 자리 잡게 됐잖아요. 60 가까운 나이에 또 어디를 떠돈다고 생각해 봐요. 저는 예천에 뿌리를 묻을 겁니다.”
김 씨는 예천에 9년째 살고 있다. 올해 86세와 82세인 시부모 모시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틀에 한 번씩 시부모를 찾는 며느리를 보며 동네 사람들은 이제 “저런 며느리가 또 어디 있겠냐”며 수군거린다.
“제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낸 것이 천추의 한이 돼서 시부모님에게나마 못다 한 효심을 쏟고 싶어요.”
그는 지역 노인 봉사에도 열심이다. 어르신들을 태우고 좋은 곳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식당에서 만든 음식을 갖고 찾아가기도 한다. 그가 바닷물을 이용해 직접 만든 두부는 두부는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이런 봉사활동이 인정돼 2024년 서울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한국노인복지봉사회와 한국언론사협회 등이 주관하는 ‘대한민국 사회공헌상’을 받았다.

● 벼에 얹은 통일의 꿈
남편이 세상을 뜨자 농사일도 그의 몫이 됐다. 그는 태어나서 농사란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농사 방법을 물으며 논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남긴 큰 빚도 어떻게든 갚아야 했다. 농사로는 어림도 없었다. 김 씨는 경작하는 논도 늘려 나갔다.
현재 그가 임대한 땅은 100마지기나 된다. 논이 60마지기, 깨밭이 15마지기다. 하루에 혼자서 농약을 100통 가까이 치곤 쓰러지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외국인 노동자를 쓸 수밖에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외국인을 고용해 쓰자, 주변에서도 외국인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인력사무소를 차리자는 생각으로 이어져 또 하나의 사업이 됐다.
농사와 식당, 인력에 몸을 갈아 넣다시피 일한 결과 2024년 남편 빚을 다 갚았다. 어깨에서 큰 돌덩이를 떼어낸 양 감개무량했다.
아직 행복이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최근 그는 2년 동안 공사 현장에 인력을 파견하고 그 대가인 1억5000만 원을 받지 못해 재판을 시작했다. 빚 다음에는 체불이란 장벽을 만난 것이다. 역경을 넘고 또 넘는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60세가 넘으니 점점 일이 힘에 부친다. 하나둘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일 기쁜 순간은 음식 주문이 들어올 때다. 이때만큼은 몸이 날 것처럼 가벼워진다.
“어머니와 오빠를 굶주림으로 잃다 보니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죠. 식당에서 음식 남기는 것을 아직도 못 봐 줘요. 손님이 능이오리백숙 같은 것을 먹다가 남기면 저는 꼭 포장해서 들려 보내요. 집에 가서 마저 먹으라고요.”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수십 년 경력 요리사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농촌에서 하는 식당이 잘 되는 데는 한계가 있어 문을 닫게 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각종 차량을 6대 보유하고 있다. 평소 타고 다니는 차, 농사일에 쓰는 차, 인력을 태우고 다니는 차 등 용도가 다양하다. 그 차량들에 그는 꿈을 싣고 살고 있다.
“제가 통일을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분위기로는 못 볼 것 같아요. 평생 쉬지 않고 숨차게 달려왔는데 여전히 혼자네요. 돈을 쌓아 둘 이유도, 유산을 남길 이유도 없어요. 그나마 꼭 부여잡고 살고 싶은 한 가지 꿈은, 만약에 제가 통일을 맞게 된다면 저 차들에 제가 지은 쌀을 가득 싣고 고향에 가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그의 사무실 주변 논에서는 벼들이 누렇게 익어 가고 있었다. 그 벼들이 평양 사람들 밥상에 오르는 날이 올까. 예천 논에서 익어가는 벼 이삭들엔 오늘도 누군가의 꿈이 얹어져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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