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이완의 흙 한줌](4)

뚜르륵, 뚜르르륵. 풀숲 어디선가 방울벌레가 운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번엔 뚤뚤뚤, 극동귀뚜라미가 뒤를 잇는다. 해거름녘, 손에 쥐고 있던 호미를 내려놓자 소리는 한층 또렷해진다. 누가 저 작은 소리의 주인일까. 완연한 가을이다. 조선 후기 ‘농가월령가’에도 가을 절기엔 어김없이 베짱이와 귀뚜라미 소리가 나온다. 그때도 계절은 ‘소리’로 도착했던 모양이다. 땅에 바짝 엎드려 흙과 살을 맞대온 농민의 몸은, 대지의 미세한 떨림에 먼저 반응한다.
어둑해진 밭에서 허리를 펴고 눈을 감는다. 귀는 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깨어나고, 앞뒤와 좌우,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다. 몸을 돌리지 않아도 발밑 흙 속 벌레의 기척부터 저 멀리 수숫대 부딪는 소리까지 사방이 한꺼번에 스며든다. 눈이 세계를 한 장면씩 잘라낸다면, 귀는 내가 서 있는 자리와 그 주변을 통째로 들려준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래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 감각은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밭두렁에 오래 머물러야 흩어져 있던 소리가 서서히 하나의 풍경으로 엮인다. 벼잎 스치는 소리, 논둑 풀벌레 울음, 가을바람이 논 훑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 농기계가 지나가는 소리까지. 처음에는 제각각 들리지만, 차츰 소리와 소리 사이의 관계가 드러난다. 말매미 소리가 잦아들면 애매미가 울고, 바람이 거칠어질수록 벼잎의 마찰음이 커진다. 농기계가 가까워지면 밭 전체의 공기가 달라진다. 작은 벌레 소리는 그 뒤로 묻힌다. 어떤 소리는 커지고, 어떤 소리는 밀려난다.
기계음이 지나가면 잠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는다. 그 텅 빈틈에서야 깨닫는다. 지워진 게 벌레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논밭에는 원래 다른 소리도 있었다. 슥슥 낫질하는 소리, 모를 심으며 주고받던 소리, 도리깨로 콩 터는 소리. 지금 그 소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옛날이야기가 됐을 뿐이다.
그 부재의 자리를 귀로 헤아린다. 나는 두겹의 소리를 겹쳐 듣고 있었다. 하나는 사라져가는 자연의 소리. 다른 하나는 이미 사라졌지만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이 땅에서 일했던 이들의 소리다. 지금 내가 밭을 긁던 호미에는, 밭에서 논으로, 다시 부엌으로 이어지던 여성들의 하루가 겹쳐 있었다. 그러니 무엇이 커졌는지 들을 때, 누구의 자리가 지워졌는지를 묻는 일이었다. 풀벌레 울음 사이로 낫질과 다듬이질의 빈자리가 들릴 때, 내가 누구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서 있는지가 비로소 단단해졌다.
사라진 것을 듣는 이 서늘한 감각은, 기실 땅에 기대 살아온 이들이 절기의 변화를 읽어내던 가장 정확한 방식이기도 했다. 뻐꾸기 소리가 뜸해지면 여름이 깊어진 것이고, 들끓던 매미 울음이 어느 날부터 서서히 잦아들면 가을이 무르익어갔다. 그러다 풀벌레 울음이 멀어지며 허공에 틈이 생길 때, 농부는 서리가 다가옴을 짐작했다.
자연과 멀어지며 자기 자신과도 멀어져
레이첼 카슨은 1962년 <침묵의 봄>에서 살충제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할 때 과학적 수치와 연구 결과만을 앞세우지 않았다. 책의 첫 장에서 그는 봄이 왔지만,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을을 그려 보였다. 무너지는 세계를 귀로 경험하게 한 셈이다. 카슨은 감각과 이야기의 언어를 통해 대중에게 생태계의 변화를 전달했다. 바로 그 지점은 당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그의 주장은 비과학적이라는 공격을 받았으며, 과학자로서의 전문성도 의심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문제 제기는 이후 과학적 검토와 환경정책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생물에게 소리는 곧 삶을 이어가기 위한 신호이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철 따라 짝을 찾고, 영역을 알리고, 위험을 감지하려면 서로의 신호를 들어야 한다. 같은 공간에 여러 생물이 살아가는 만큼 소리가 겹치기도 하지만, 생물들은 주파수와 시간대, 공간을 달리하며 각자의 신호를 구분해 전달한다. 생태학에서는 이러한 소리의 분화를 ‘음향적 지위(acoustic niche)’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서로 다른 생물들이 소리의 주파수와 시간, 공간을 나눠 사용하며 같은 환경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나눈다는 뜻이다.
사람도 뱃속에서부터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몸을 만들고, 세상에 나온 뒤에도 수많은 진동과 울림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소리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어릴 적에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귀를 쫑긋 세웠는데, 언제부턴가 그 많던 소리가 배경이 됐다.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직장에서는 회의하고, 집에서는 뉴스를 틀어놓는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배운 것은 ‘잘 듣는 법’이라기보다 ‘덜 듣는 법’에 가까웠다. 쓸모없어 보이는 소리를 거르는 그 선택적 듣기야말로, 지금의 위기를 가능하게 만든 감각 훈련이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지역에서 공동체 상영으로 다큐멘터리 <나무의 노래>를 보았다. 영화는 한 사람이 자연과 맺어온, 오래된 감각을 스크린 위에 천천히 펼쳐놓는다. 시어로 가득한 계절과 눈물이 날 만큼 찬란한 숲, 요정이 노닐 듯한 그 화면은 그저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다. 인간이 온몸의 감각으로 나무와 주고받던 대화가 이토록 촘촘했다는 증거다. 우리는 한때 그 대화의 일부였다. 자연과의 대화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멀어졌다. 그러고도 무엇을 잃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삶의 언어로 기후를 얘기해야
이 상실의 상실을 짚어내는 이는 뜻밖에도 고종황제의 후손이다. 그는 기후변화에 나무들이 빠르게 반응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그처럼 나무의 노래를 듣고, 그 예민한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위기를 미리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른들은 벼가 익어갈 때면 알곡이 차오르는 기척을 들었다고 한다. 그 소리는 오래 논을 지켜본 이들에게는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생명의 쇠퇴를 읽어낼 우리의 감각마저 무뎌지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이 생존의 위협을 절감하기도 전에 존재들은 이미 조용히 세상에서 지워진다. 한때 분명히 있었지만, 이제는 텅 빈 자리로만 남은 그 흔적을, 우리는 늘 뒤늦게야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변화를 기억하고, 그들의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물어야 한다.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비인간 생명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세대의 이해가 우리의 결정안에서도 고려될 수 있도록. 전문 용어가 아닌 삶의 언어로 기후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아직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몫까지 헤아리고, 그 침묵을 끝내 정책안으로 포함하는 일. 그것이 바로 흙 위에서 다시 세워야 할 기후정의일 것이다.
<이완 여성 농민·생태활동가 402s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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