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원전 안 짓겠다면 없던 일로"… 美에 '배수의 진'을 쳤다

손현덕 기자(ubsohn@mk.co.kr) 2026. 9. 23. 16:0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9·11테러가 벌어진 지 25주년이 되는 날, 사고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멀지 않은 캔터 피츠제럴드 사무실.

"전 세계에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나라는 모두 6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한국입니다. 이 중 중국과 러시아는 아예 대상에서 제외지요. 일본은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참사 사고 이후 단 1기도 건설한 적이 없습니다. 15년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생태계가 완전 무너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프랑스는 노형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원가 경쟁력 면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에서 프랑스를 이긴 것도 이 이유에서지요."

미국과 일본의 원전 합의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선 플랜B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내용인즉, 미국 내 웨스팅하우스 원전 건설액이 총 800억달러 이상이 되는 투자 결정이 확정되면,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의 일정한 경제적 이익 및 지분 참여 권리를 갖는 조항이 들어 있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韓美 피말린 대미투자 手싸움 현장

세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9·11테러가 벌어진 지 25주년이 되는 날, 사고 현장인 그라운드 제로에서 멀지 않은 캔터 피츠제럴드 사무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30년 넘게 최고경영자(CEO)로 있었던 회사다. 9·11이면 운명을 달리한 그의 가족과 동료들을 위해 자선행사를 벌이는 곳에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과 마주했다. 이날 아침 공식 추모식에 참석한 김 장관은 행사 직후 러트닉 장관 승용차에 동승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것. 두 사람 모두 10개월 이상을 끌어온 협상을 끝낼 때가 됐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날 직접 대면 이후에도 피 말리는 협상이 화상으로 몇 차례 이뤄지긴 했지만 큰 골격은 뉴욕 회동에서 다 맞춰졌다.

여러 가지 매듭지을 일이 있었다. 열거하자면 사업 아이템별로는 세 꼭지. 대미투자 1호라고 알려진 텍사스주 가스복합화력발전소 그리고 미국 내 원자력발전소 8기 건설과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사업 참여였다. 그리고 소위 '상업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이 프로젝트들의 수익성을 담보하는 게 몇 꼭지 있었다. △투자 손익을 어떻게 정산할지 △최초의 송금은 얼마 언제 할 것인지 △자금 투입은 어떤 방식으로 할지 △우리의 안전장치는 어떻게 확보할지 △한국 기업의 참여는 어느 정도 폭으로 할지 등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미세 조정의 이슈였지 협상의 결정적 문제는 아니었다. 핵심은 단 한 가지. 바로 한국형 원전의 건설이었다.

경주 APEC에서의 폭탄주 회식

김 장관과 러트닉 장관의 샅바싸움은 작년 10월 말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이보다 3개월 앞선 7월 30일 한미 양국은 관세 협상의 큰 틀에서 대미투자 2000억달러, 조선협력 1500억달러라는 큰 그림에 합의를 했다.

그 후 10월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 직후 결과물이 나왔다. 그리고 2주 후인 11월 14일 소위 공동팩트시트(Joint Fact Sheet)를 서울과 워싱턴에서 동시에 발표하게 된다. 당시 이 협상을 막후에서 주도한 김용범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기자들에게 농담처럼 "이 정도면 프로의 향기가 나지 않나"라고 자랑한 문서였다.

관세 협상 초창기 때부터 한미 간 무역 이슈는 모두 "나에게 말하라(Talk to Me)"고 자신하던 러트닉 장관. 그는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한 직후 저녁 경주 시내 고깃집에서 기자들의 눈을 피해 김 실장과 김 장관을 만났다. 이제 3개월을 끈 협상이 마무리됐으니 회포를 풀자며 한국식 바비큐를 곁들인 술자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건 큰 틀의 제도적 합의. 진짜 협상은 이로부터 3개월 후인 2026년 2월경부터 시작됐고 그로부터 8개월간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했다. 김정관·러트닉의 지루한 협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협상이 늘 그렇듯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었다.

원전 건설은 한국이 최고

당시 산업부는 대미투자 아이템을 선정하는 데 있어 나름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우리가 미국에 투자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아이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게 미국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게 있고 미국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서로 맞아떨어지는 걸 해야 합니다."

그의 속내는 내심 원전에 있었다. 국내 20여 개 대기업을 접촉해 어떤 사업이 유망한지 파악해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전은 산업부가 직접 메뉴판에 올려놓았다. 이 당국자는 설명을 이어간다.

"전 세계에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나라는 모두 6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한국입니다. 이 중 중국과 러시아는 아예 대상에서 제외지요. 일본은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참사 사고 이후 단 1기도 건설한 적이 없습니다. 15년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건 생태계가 완전 무너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프랑스는 노형이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원가 경쟁력 면에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수주에서 프랑스를 이긴 것도 이 이유에서지요."

이제 남는 것은 미국.

"미국은 물론 자체적으로 원전을 지을 능력이 있습니다. 미국에 원전 기술이 없는 게 아니죠. 웨스팅하우스라는 세계적인 원전 기업도 있고 AP1000이라는 원자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소위 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 중 EP, 즉 설계와 구매입니다. 문제는 짓는 능력, 즉 건설의 C입니다. 오랫동안 신규 원전 건설이 끊기면서 공급망과 숙련 인력, 대형 프로젝트 관리 역량이 약해졌습니다. '원전 르네상스'라고 하는 2000년대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4기가 거의 동시에 착공됐습니다. 조지아주의 보글(Vogtle) 3·4호기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버질 C 서머(V C Summer) 2·3호기입니다. 보글은 결국 원전을 짓긴 했습니다만 예정보다 2배나 되는 14년이 걸렸고 비용도 예상보다 2.5배나 더 들어갔습니다. V C 서머는 2017년 웨스팅하우스의 파산이 겹치면서 그해 7월 아예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최근 공사 재개 움직임이 있습니다만…."

그는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판단했다"면서 "미국에서 원전을 짓는 경우 우리가 칼자루를 쥐게 되는 것이고 당연히 우리 기업의 참여는 물론 수익성 보장도 가능하다고 봤다"고 말했다.

스텝이 꼬이는가 싶었는데

그런데 일본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미국은 우리보다 앞서 일본과 대미투자협정을 맺는다. 그게 경주 APEC 직전의 일이다.

미국은 일본과 작년 7월 총 5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를 약속하고 같은 해 10월 양국이 공동팩트시트를 공개했다. 여기에 원전 프로젝트가 구체화된다.

핵심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웨스팅하우스 AP1000 대형 원전, 또 다른 하나는 BWRX-300이라고 하는 300메가와트(㎿)짜리 소형모듈원전(SMR)이었다. 일본은 이 같은 원전 프로젝트를 포함한 에너지 인프라 투자에 전체 투자의 60%에 해당하는 3320억달러를 제시한 것이다.

우리의 스텝이 꼬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심 자신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의 원전 합의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선 플랜B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일본은 원전 중 SMR만 진정성이 있습니다. 대형 원전은 불확실합니다. 짓더라도 미국형 원자로인 AP1000을 짓는데 탈원전(?) 공백을 메우기가 힘들다고 본 것입니다. 원전이라고 하면 미국은 결국 한국에 손을 내밀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이런 생각에 이른 데는 핵심적인 원인이 있는데 그게 바로 웨스팅하우스의 상장(IPO) 이슈였다"면서 "이걸 이해하게 되면 왜 미국이 한국의 대미투자 자금을 원전으로 끌고 오려고 하는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진다"고 말한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재 웨스팅하우스는 미국 회사가 아니다. 캐나다 회사다. 주주는 단 두 곳. 최대주주는 브룩필드(Brookfield) 컨소시엄으로 여기에는 자산운용사와 재생에너지 기업들이 포함돼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 뿌리를 둔 세계적인 대체자산 운용그룹. 51%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49%는 캐나다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우라늄·핵연료 기업 카메코(Cameco)가 보유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의 운명이 좀 기구하다.

1999년 영국 국영 원전 기업인 BNFL(British Nuclear Fuels)이 미국 CBS로부터 원전 사업 부문을 약 11억달러에 인수한다. 7년 뒤인 2006년에는 도시바가 다시 54억달러에 사들이고, 경영 악화로 10여 년 뒤에 파산보호신청을 하게 되자 이를 캐나다에서 82억달러를 주고 100%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원전 사업이라는 게 그렇듯이 민간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핵심 특허 기술이라는 게 미국 정부에 있다. 비록 소유권은 캐나다에 있지만 미국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기업이다. 더더욱 대주주인 캐나다 기업은 원전 설계나 운영과는 관련이 없는 금융회사였다. 그래서 몸값이 올랐을 때 팔고 투자금을 회수하는 게 목적이었다. 지난 7월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기업공개를 신청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는데 그게 미국 정부와 캐나다 주주가 맺은 전략적 파트너십 계약이다. 내용인즉, 미국 내 웨스팅하우스 원전 건설액이 총 800억달러 이상이 되는 투자 결정이 확정되면,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의 일정한 경제적 이익 및 지분 참여 권리를 갖는 조항이 들어 있다. 작년 10월 28일 미국 상무부와 브룩필드 간에 이런 조건부 계약을 맺은 것.

계약서에는 이 밖에도 △신규 원전 프로젝트 금융 주선 △인허가 및 정부 승인 촉진 △원전 공급망 및 전문인력 육성 지원 △웨스팅하우스 기술의 해외 수출을 위한 외교 정책 지원 등이 포함돼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 기업공개가 성공해야만 거액이 들어올 수 있는 구조였다. 이 그림에 반드시 필요한 나라가 있는데 그게 한국이었다. 한국이 참여해야 공모가가 높아진다고 시장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관여한 핵심 관계자는 "미국이 자체적으로 원전을 짓는대도, 설사 일본이 들어온다고 해도 주식시장은 반응하지 않는다"며 "유일하게 시장을 움직이는 건 대한민국, K원전"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심전심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생각대로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기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국이었다. 여름께 대미투자 아이템을 논의하는 테이블에 원전이란 메뉴가 올라갔다.

김 전 실장은 "원전을 포함시킨 건 신의 한 수였다"면서 "대강 세 가지 근거가 논의됐다"고 말한다. 첫째, 원전을 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으며 둘째, 2000억달러를 채우는 데는 규모도 규모지만 실체가 있는 원전이 가장 적합하며 셋째, 원전을 지을 경우 장기적 이익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

한국은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 시점에서 한국은 오랫동안 묶여온 원전 수출의 족쇄를 풀어야겠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게 다름 아닌 한국형 원전의 미국 내 건설. 이게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다름 아닌 타협협정(Settlement Agreement·SA)이었다. 작년 1월 한전·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지식재산권 분쟁을 끝내면서 체결한 50년을 기본 유효기간으로 하는 합의문. 체코 원전을 수주하기 위해 우리는 '독약'을 삼켰다.

이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는 미국 내 한국형 원전을 짓는 것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외에 원전을 수출할 경우에는 상당한 규모의 웨스팅하우스 물품을 구매해야 하고 기술사용료를 지급해야만 했다.

우리는 그동안 K원전을 한국의 독자적 기술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으나 미국 에너지부의 판단은 웨스팅하우스의 원천기술이 포함됐다는 것. 여기서 그 유명한 '아곤 굴욕'이 나온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4년 8월 한국이 체코 두코바니 원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한국형 원전에 미국 기술이 포함됐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아곤국립연구소에 용역을 맡긴다. 아곤이 어떤 곳인가? 원자폭탄 개발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으로 방향을 튼 미국 원자력 연구의 산실이다.

아곤은 용역 결과 "한국형 원전에 웨스팅하우스 기술이 포함돼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후 워싱턴에서 한국 산업부·한전·한수원 관계자들을 불러 "반박해보려면 반박해보라"며 고압적으로 따졌다. 우리는 한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SA 족쇄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우리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나 합의를 거부하면 수출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할 판이었다.

우리 정부는 이참에 이 족쇄를 풀려고 했다. 웨스팅하우스와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이슈지만 미국 정부의 힘을 이용하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배수의 진을 쳤다.

"K원전을 미국에서 짓자. 이거 안되면 협상은 없던 일로 하겠다"고. 러트닉 장관은 8기 모두를 미국형 원전인 AP1000으로 하자고 맞섰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김 장관. 그는 이 대통령의 프랑스 국빈방문 수행을 마친 뒤 유럽 현지에서 뉴욕으로 날아간다. 그러곤 운명의 9·11 회동을 마주하게 된다.

[손현덕 주필]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