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눈치 안 보고 하루 보낸다”…경마장 향한 노년의 주말

이강산 기자 2026. 9. 2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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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가 경마공원역에 멈추자 객실에 앉아있던 노년 남성들이 잇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처음 경기 과천시 렛츠런파크 서울(경마공원)을 찾은 기자는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처럼 노년층에게 경마공원은 접근성이 좋고 비교적 긴 시간 머무를 수 있으며, 별도의 회원 가입이나 프로그램 신청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여가 공간이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자 방문객들이 하나둘 경마공원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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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원 입장료·무임 전철…경로당 대신 마권 쥔 백발 남성들
‘1100만 고령사회’ 겉도는 복지 인프라…갈 곳 없는 황혼의 시간

(시사저널=이강산 기자)

9월13일 오전, 서울 지하철 4호선 열차가 경마공원역에 멈추자 객실에 앉아있던 노년 남성들이 잇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처음 경기 과천시 렛츠런파크 서울(경마공원)을 찾은 기자는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앞서 내린 머리가 희끗한 남성들을 따라가니 곧바로 경마공원 입구가 나왔기 때문이다.

9월11일 경기 과천시에 위치한 경마장(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노인들이 경마를 즐기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9월11일 경기 과천시에 위치한 경마장(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노인들이 경마를 즐기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9월11일 경기 과천시에 위치한 경마장(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노인들이 경마를 즐기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경마장 메운 노년층…"운 좋으면 용돈도"

이날 렛츠런파크 서울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나 젊은 연인 방문객도 적지 않았다. 포니랜드에는 망아지를 구경하려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몰렸다. 하지만 관람대와 경마 관련 시설 주변에서는 60·70대로 보이는 남성들이 단연 눈에 많이 띄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경주 정보가 빼곡하게 적힌 경마정보지와 펜을 손에 들고 있었다. 같은 방문객들이지만 연령에 따라 경마공원을 즐기는 방식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경주가 끝날 때마다 관람대에서는 다음 경주를 준비하는 모습이 반복됐다. 정보지를 펼쳐 출전마 기록을 살피거나 펜으로 표시하는 이들이 있었고, 경주 결과를 놓고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혼자 온 방문객도 적지 않았다. 한 경주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다음 경주를 기다리는 노년층이 곳곳에서 보였다. 오전부터 폐장 무렵까지 열린 11개 경주를 모두 보며 머무르는 이들도 있었다.

렛츠런파크 서울의 입장료는 2000원이다. 65세 이상은 수도권 전철을 무임으로 이용할 수 있어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고령층은 교통비 부담도 사실상 없어 접근성이 좋다. 입장료와 교통비만 놓고 보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장시간 머물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날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만난 박호열씨(71)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한 번씩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박씨는 "서울에서 가깝고 지하철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 교통비도 안 든다"며 "큰돈 안 들이고 쾌적하게 있기도 좋다"고 말했다. 이어 "운이 좋으면 돈도 따지 않나. 딱히 돈 벌 일도 없는데 (경마로 돈을 얻으면) 용돈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박씨는 경마공원이 여가 공간으로서 장점이 많은 곳이라고 했다. 그는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과 달리 정해진 프로그램을 신청하지 않아도 원하는 시간에 와서 경주를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았다. 또 박씨는 "혼자 와도 주변에 비슷한 연령대 방문객이 많다"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애쓰지 않아도 여러 사람 속에서 몇 시간이고 보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한국마사회는 경마장의 이용층을 넓히기 위해 가족과 젊은 층을 겨냥한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해피빌 1층에는 토·일요일 20~40대를 주 이용층으로 하는 '놀라운지(NOL LOUNGE)'가 마련돼 있다. 실내외 관람석과 초보경마교실 등을 갖췄고 굿즈도 판매한다. 이처럼 노인 위주라는 기존 이미지를 바꾸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였지만, 이날 기자가 머무른 시간 동안 관람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띈 이용층은 노년 남성이었다.

6월18일 부산 부산진구 백양노인회관에서 열린 '제5회 대한노인회 부산진구지회장배 보드게임대회'에서 관내 경로당 대표 어르신들이 루미큐브 게임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행성 우려 있으나…"경로당 원하지 않아"

문제는 경마장이 단순한 여가 공간이 아닌 사행성이 결합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경마는 돈을 걸고 결과에 따라 배당을 받는 사행산업이다. 마권 구매 상한은 1인 1경주 10만원이지만,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여러 발매창구나 무인발매기를 통한 반복 구매 등으로 상한선 준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례가 있다고 지적해 왔다. 접근성이 좋고 적은 비용으로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장점과 별개로, 베팅이 반복될 경우 과몰입과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경마공원을 온전히 '건전한 여가 공간'으로 보기는 어렵다.

경마정보지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철우씨(75)도 이런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씨는 "물론 경마도 도박이니 건전한 여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걸 여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집에만 죽치고 앉아있는 것 외에 시간 보낼 만한 일이나 공간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며 "경로당이니 노인복지관이니 있다고는 해도 거기서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가고 싶다는 마음도 안 든다"고 했다.

이처럼 노년층에게 경마공원은 접근성이 좋고 비교적 긴 시간 머무를 수 있으며, 별도의 회원 가입이나 프로그램 신청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여가 공간이었다. 다만 문제는 노년층의 체류 수요가 경마공원으로 향하는 것이 기존 노인 여가 정책이 실제 수요를 받아내고 있지 못하는 방증은 아닌지 정부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오후 5시가 넘어서자 방문객들이 하나둘 경마공원을 빠져나갔다. 경마공원역 인근 포장마차에서는 몇몇 노년 남성이 술잔을 앞에 두고 이날의 경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마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역 앞에서 다시 경주 이야기를 이어간 뒤 귀가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만난 노년층에게 경마공원 방문은 단순히 몇 차례 마권을 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닌 주말 하루를 보내는 일정에 가까워 보였다.

고령층이 시간을 보낼 공간에 대한 수요는 앞으로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올해 65세 이상 인구는 약 1112만5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21.6%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국내 노인들은 여가에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하고, 현행 노인복지법은 아직도 노인여가복지시설을 노인복지관과 경로당, 노인교실로 한정하고 있는 등 문제가 산적해 있다.

정책과 수요 엇박자…"선택권 넓혀야"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월평균 여가비는 전체 평균 18만6900원이었지만 60대는 17만9200원, 70세 이상은 10만2300원으로 낮아졌다. 30대가 23만1200원으로 가장 높았던 것과 비교하면 70세 이상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선진국에 비해 낮다 보니 대부분의 노인은 생계비에 돈을 쓰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여가비 지출액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또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는 노인복지관 459곳, 노인교실 1100여 곳, 경로당 6만 곳 이상이 운영되고 있다. 복지부는 경로당까지 포함하면 시설의 절대적인 수가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문제는 시설의 숫자와 실제 이용 수요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같은 노인이라도 연령과 건강 상태, 소득 수준, 과거 직업과 인간관계에 따라 원하는 여가 방식이 다른데, 정책은 여전히 복지관·경로당 등 정해진 시설을 중심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시설 수와 실제 이용률 사이의 차이는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서 경로당 이용률은 26.5%로 2020년 28.1%보다 낮아졌다. 반면 친목단체 참여율은 같은 기간 44.1%에서 54.2%로 높아졌다. 노년층의 사회활동 방식이 기존 시설 밖으로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지역에 따라 여가시설의 운영 여건도 다르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역별 재정 여건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있고, 다양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노인여가복지시설 지원이 지자체로 이양돼 지자체가 지역 수요와 재정 여건 등을 고려해 설치·운영하는 만큼 프로그램의 종류와 접근성에서도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경로당에 건강·교육 프로그램을 연계하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스마트경로당'을 확대하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다만 노인복지관은 취미·교육뿐 아니라 상담, 건강 관리, 식사 지원, 사회 참여와 돌봄 연계 등 여러 기능을 함께 수행한다. 여가 수요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만큼 새로운 취미나 소규모 모임, 체육·문화 활동까지 모두 흡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때문에 노년층의 여가를 복지시설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접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도서관과 체육시설, 문화센터, 공원 등 지역사회에 이미 있는 공공시설을 노년층이 편하게 이용하도록 연결하고, 동아리나 소규모 모임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부 관계자 역시 "체육시설이나 행사, 동아리 등 다양한 방식의 수요가 있을 수 있다"며 "시설 중심 외에 다양한 여가 수요를 받아들이려면 제공 주체에게 예산이 더 필요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도 시설 숫자 확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정미진 계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 관련 시설 수와 프로그램은 실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시설 확충과 함께 프로그램 다양화, 질적 개선, 지역별 접근성 강화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고령층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동일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연령과 생활방식이 다른 노년층의 선택권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다.

경마공원에서 만난 이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야 돈도 벌고 체력도 좋을 때니 여기저기 갈 데도 많겠죠. 그런데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그럴 돈도 없고 힘도 없어. 여기 있는 양반들 그냥 도박쟁이처럼 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다른 갈 만한 데, 할 만한 일 있으면 그거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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