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vs 필리핀 ‘남중국해 갈등’, 휴양 도시 세부로 번졌다

박강현 기자 2026. 9. 23. 00:4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만 ‘세부 사무소’가 불붙여
그래픽=김성규

남중국해에 이른바 구단선(九段線)을 그어놓고 해역 대부분의 영유권을 주장한 중국. 자국에 면한 바다를 ‘서필리핀해’라고 명명하며 해양 주권 수호를 외쳐온 필리핀. 두 나라의 갈등 전선이 바다에서 필리핀 본토로 옮겨붙고 있다. 대만이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이어, 세계적인 휴양 도시이자 제2 경제 도시인 세부에 두 번째 ‘판사처(辦事處·대표사무소)’를 설립하려는 계획에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켜라”며 반발하자, 필리핀 정부가 “대만과 협력하는 것도 우리 권리”라고 일축한 것이다.

대만은 중국과 수교한 국가에 대표부 또는 판사처라는 이름으로 외교·영사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소를 운영한다. 필리핀 정부의 승인하에 주 세부 대만 판사처가 설립될 경우 세부는 동아시아의 총성 없는 외교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521년 포르투갈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선단이 도착한 세부는 50년 뒤 마닐라로 천도할 때까지 필리핀의 첫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다. 한국(분관)·중국·일본(이상 총영사관)·미국(영사 사무소) 등 아시아·태평양 주요 국가들이 세부에 외교 공관을 두고 있다.

지난 18일 남중국해 분쟁 지역에서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과 충돌한 필리핀 선박의 난간이 파손돼 있다. 필리핀 해경은 이날 중국 해안경비대 선박이 자국 수산청 선박 한 척과 충돌했다고 밝혔다. /AFP 연합뉴스

필리핀 외교부는 20일 중국을 겨냥한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하나의 중국 정책이 1975년 필리핀과 중국 간 공동성명에 따라 일관되고, 명확하며,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면서도 “하나의 중국 정책은 필리핀이 대만과 경제적·문화적·기능적 협력을 추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필리핀과 대만은 가까운 이웃이며 오랜 기간 서로 교류하며 사업을 해온 관계”라고 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발언, “필리핀의 ‘하나의 중국’ 정책을 어떻게 시행할지는 중국이 아니라 필리핀 정부가 결정한다”고 한 길베르토 테오도로 국방장관의 발언도 소개했다.

필리핀의 성명은 대만의 세부 판사처 설립에 반발한 중국이 필리핀을 압박한 지 나흘 만에 나왔다. 앞서 지난 15일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이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세부에 두 번째 판사처를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이튿날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필리핀이 실제 행동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준수하고 양국 관계를 훼손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를 촉구한다”고 했다. 필리핀의 세부 대만 판사처 설립 허용을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설립 불허를 압박한 것이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중국의 압박을 사실상 내정 간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불쾌감을 표출하는 동시에 자국의 대만 정책에 관여하지 마라는 경고성 성명을 낸 것이다.

대만은 한국 부산·미국 뉴욕·일본 오사카 등 수도가 아닌 주요 도시에도 제2의 판사처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이 세부의 대만 판사처 설립 계획에 반발하고 있는 것은, 최근 대만이 중국과 갈등 중인 필리핀을 경제·외교적 교두보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대만은 이런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린자룽은 세부 판사처를 단순한 영사 서비스 거점에 그치지 않고 ‘대만·필리핀 경제 회랑’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대만과 필리핀 사이 사람·상품·자본의 이동을 늘리고 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 등 첨단 산업 공급망을 연결한 뒤, 미국·일본·필리핀이 추진 중인 ‘루손 경제 회랑’과 연계한다는 것이다. 필리핀 현지 언론들도 대만 측 구상이 루손 경제 회랑과 연결해 공급망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전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13일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 이틀 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2년 집권한 마르코스 주니어가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 노선에서 벗어나 강력한 친미·친서방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필리핀과 대만도 밀착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지난해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지난해 4월 필리핀 정부는 36년간 유지해오던 자국 관료와 대만 정부와의 접촉 규제 방침을 대폭 완화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부통령·외교장관·국방장관을 제외한 필리핀의 관료들은 경제·통상·투자 유치 목적으로 공식 직함 없이 자유롭게 대만을 여행하고 현지 관계자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됐다. 이어 여섯 달 뒤인 지난해 10월에는 대만 전기전자공업동업공회(TEEMA)와 필리핀 반도체전자산업협회(SEIPI)가 녹색 제조와 공급망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해 경제 협력 심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처럼 필리핀과 대만이 밀착하는 데는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만 남쪽과 필리핀 북부는 바시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고, 필리핀은 미국의 대중국 방어선인 ‘제1도련선(일본 규슈 남단부터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의 핵심 고리다. 대만으로서는 중국의 압박으로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판사처 확대를 통해 비공식 외교 채널을 넓힐 필요가 있다. 필리핀으로서도 대만과의 경제·안보 협력 확대는 중국을 견제하며 외교적 선택지를 넓히는 효과가 있다. 대만과 필리핀의 밀착은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경계하며 군사적으로 밀착해온 미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인도·태평양 자유 진영 국가들의 군사 동맹과 연계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필리핀은 다만 중국과의 관계를 일정 부분 관리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최근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난닝에서 열린 제23회 중국·아세안 엑스포(CAEXPO)에 올해 주빈국으로 참여해 약 300명과 73개 수출 기업으로 구성된 역대 최대 규모 대표단을 보냈다. 농식품부터 패션·관광·금융·제약까지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파견하며 주최국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대만을 사이에 둔 필리핀과 중국의 갈등이 폭발보다는 일정 수준에서 관리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중국이 ‘대만과 필리핀이 협력하고 있다’고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리핀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라며 “중국으로서도 이를 의식해 행동 수위를 조절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만 “필리핀이 하나의 중국 정책을 유지하는 만큼 대만과의 관계가 경제·문화·기능적 협력에 국한된다는 점을 신중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