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예술은 한 끗 차이?…미술 전시장에선 왜 샴페인을 마실까 [정인성의 예술 한잔]

정인성 2026. 9. 2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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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열린 2026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엔 7만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경기 침체의 우려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애호는 여전히 뜨거웠다.

전시장 곳곳에 자리한 간이 샴페인 부스까지 더해져 예술과 술이 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예술과 와인에 여전히 매료되는 까닭은, 속도와 효율만을 좇는 세상에서 쉽게 대체되지 않는 이 묵직한 시간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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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된 샴페인 하우스가 예술을 만나는 법

얼마 전 열린 2026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엔 7만여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경기 침체의 우려 속에서도 예술을 향한 애호는 여전히 뜨거웠다. 이번 페어 최고가를 기록한 유영국 화백의 유화 ‘워크(Work, 1971)’는 북미 미술관 이사회 회원에게 약 22억~25억 원 선에 팔렸다.

그동안 프리즈 서울을 꾸준히 찾으며 늘 흥미로웠던 장면 중 하나는 샴페인 브랜드의 존재감이었다.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이 거래되는 페어 한가운데 샴페인 하우스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관람객들은 저마다 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장 곳곳에 자리한 간이 샴페인 부스까지 더해져 예술과 술이 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칼럼의 이름도 예술 한 잔이다)

프리즈 서울의 공식 주류 파트너는 샴페인 하우스 메종 루이나(Maison Ruinart)이다. 루이나는 공식 웹사이트에 ‘ART’ 전용 섹션을 따로 둘 만큼 예술에 진심인 브랜드로, 프리즈 서울이 출범한 2022년부터 매해 아트 라운지를 선보여 왔다. 첫해인 2022년에는 한국 자연주의 회화의 거장 김종학 화백과 협업한 ‘세컨드 스킨’ 매그넘 에디션을 공개했다. 설악의 사계와 생명력 넘치는 꽃을 패키지에 담아냈으며, 판매 수익금 전액을 국내 생물다양성 보전 활동에 기부해 큰 호응을 얻었다.

2026 프리즈 루이나 아트하우스 / 사진. ©정인성


루이나(Ruinart), 김종학 화백과 콜라보 리미티드에디션 공개 / 사진=서울경제TV


올해 아트 라운지에서는 설치미술가 타다시 카와마타(Tadashi Kawamata)의 작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버려진 폐자재를 엮어 거대한 구조물을 세우는 작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다. 역사적인 석조 건축물이나 현대식 고층 빌딩 외벽에 불규칙한 목재 구조물을 침투시켜 강렬한 시각적 충돌을 일으킨다. 그의 작업은 영구성과 완결성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폐목재와 각목을 엮어 만든 둥지나 가설 비계 형태의 설치물은 자원 낭비를 경계하는 생태적 태도와 함께,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자연의 순환 과정을 상징한다. 카와마타는 만 28세였던 1982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로 참가했으며, 2008년 도쿄 현대미술관, 2010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현대 미술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겨왔다.

루이나와 타다시 카와마타의 설치 작품 / 출처. 루이나 홈페이지


루이나가 올해 타다시 카와마타와 손을 잡은 까닭은 브랜드와 작가가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나가 3년 전부터 이어온 프로젝트의 이름은 ‘자연과의 대화(Conversation with nature)’다. 매년 현대 미술 작가를 샹파뉴로 초청해 브랜드의 유산과 떼루아를 재해석하도록 하는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 브랜드의 간섭 없이 작가에게 기획과 제작 전권을 완전히 맡기는 예술 후원 방식)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와인 제조의 근간이 되는 자연과의 공존을 예술가의 시선으로 탐색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예술을 향한 루이나의 동행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1896년, 루이나는 아르누보의 거장 알폰스 무하에게 브랜드 홍보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샴페인 역사상 최초의 아티스트 협업 광고이자, 오늘날 루이나가 예술과 맺고 있는 깊은 유대의 출발점이었다. 그해 11월 샴페인의 본고장 랭스에서 열린 현대 예술 포스터 전시회(Exposition d'Affiches Artistiques)에 이 포스터가 출품되며, 상업 광고가 순수 예술의 반열에 오르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알포스무하 / 출처. 루이나 공식 홈페이지


루이나는 1729년 9월 1일 니콜라 루이나(Nicolas Ruinart)가 설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샴페인 하우스다. 니콜라의 삼촌이자 베네딕트회 수도사였던 돔 티에리 루이나(Dom Thierry Ruinart)는 돔 페리뇽(Dom Pérignon)과 동시대를 살며, 당시 ‘기포가 이는 와인’ 정도로 여겨지던 샴페인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았다. 조카 니콜라는 삼촌의 혜안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와인 사업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샴페인 역사의 첫 장이 열렸다. 루이나의 유산은 단순히 최초의 하우스라는 상징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양조 기술의 혁신 또한 선도했다. 1764년 유럽 왕실을 비롯한 주요 고객들에게 ‘자고새의 눈(Oeil de Perdrix)’이라 불리는 분홍빛 샴페인을 출하했는데, 이는 공식 장부에 기록된 세계 최초의 로제 샴페인이다.

크리예르 / 출처. 루이나 공식 홈페이지


이러한 루이나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크레예르’와 ‘샤르도네’다. 크레예르(Les Crayères)는 유구한 세월을 품은 백악질 지하 저장고를 뜻한다. 고대 로마 시대에 백악질 석재를 캐내던 채석장을 18세기에 지하 와인 셀러로 개조한 곳으로, 지하 38m 깊이에 총길이만 8km에 달한다. 빛과 진동이 완벽히 차단되고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이 거대한 미로는 루이나 특유의 빼어난 풍미를 빚어내는 공간이다. 백악질 암석은 스펀지처럼 수분을 머금고 뿜어내는 성질이 있어 셀러 내부를 항상 이상적인 습도로 유지해 주며, 와인이 장기간 신선함을 잃지 않고 천천히 숙성되도록 돕는다. 크레예르는 단순한 저장고를 넘어 샴페인을 가장 우아하게 길러내는 최적의 요람인 셈이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에서는 지금도 수백만 병의 루이나 샴페인이 고요히 숨쉬고 있다. 

두 번째 키워드인 샤르도네는 루이나가 추구하는 미학적 방향성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샴페인은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 세 가지 품종을 블렌딩해 완성한다. 적포도인 피노 누아가 탄탄한 골격과 바디감을 세우고, 피노 뫼니에가 둥글고 부드러운 과실미를 더한다면, 청포도인 샤르도네는 섬세한 기품과 산미, 그리고 장기 숙성의 잠재력을 불어넣는다. 루이나를 상징하는 대표 샴페인이 적포도를 섞지 않고 오로지 샤르도네로만 빚어낸 ‘블랑 드 블랑(Blanc de Blancs)’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블랑 드 블랑을 한 모금 머금으면, 샤르도네 특유의 섬세한 산미와 백악질의 미네랄 그리고 촘촘하게 피어오르는 기포가 입안을 산뜻하게 채운다. 은은하게 혀끝을 감도는 우아한 여운은 이 샴페인의 매력을 더하는데 한 몫한다.

블랑 드 블랑 / 출처. 루이나 공식 홈페이지


예술과 샴페인이 서로를 닮아 있는 이유는 결국 시간이라는 본질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폭의 캔버스 위에 거장의 붓질이 얹히기까지 수많은 고뇌의 시간이 응축되듯, 맑고 투명한 기포 한 방울 뒤편에는 빛조차 닿지 않는 크레예르에서 보낸 수년간의 인내가 흐른다. 우리가 예술과 와인에 여전히 매료되는 까닭은, 속도와 효율만을 좇는 세상에서 쉽게 대체되지 않는 이 묵직한 시간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세계는 저절로 영속되지 않는다. 타다시 카와마타가 폐목재를 엮어 만든 불완전한 둥지가 유한성과 순환 과정을 의미하듯, 샴페인 역시 자연의 섭리 위에 존재하는 대지의 산물이다. 루이나가 프리즈 서울에서 건넨 화두는 화려한 축제를 넘어 자연과의 대화라는 지속 가능한 공존의 태도였다. 떼루아를 지켜내려는 하우스의 책임감과 생태적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의 시선이 맞닿을 때, 잔 속에 담긴 황금빛 액체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하나의 철학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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