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이슬람 혐오'의 뿌리와 실체를 폭로한 종교학자

최윤필 2026. 9. 22.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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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머가 손가락질한 표적의 중심이 미국의 이슬람 학자 존 루이스 에스포시토(John L. Esposito, 1940.5.19~ 2026.7.19)였다. 그는 이슬람교에 원리주의나 근본주의라는 기독교적 용어가 덧붙여지기 전인 1970년대부터 정치-사회적 운동으로서의 이슬람 정체성과 역사적 분화 과정을 연구하고, 50여 권의 학술-대중서와 강연, 인터뷰, 미 국무부와 국토안보부, 의회 자문 등을 통해 이슬람-무슬림에 대한 미국 및 서구의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애쓴 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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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스포시토(John L. Esposito, 1940.5.19~ 2026.7.19)
1979년 이란혁명 이후,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서구 사회의 시대정신이 되다시피 한 이슬람 혐오(islamophobia)에 맞서 이슬람교가 무슬림 극단-테러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된' 역사적 배경과 실체를 알리고자 고군분투한 미국의 이슬람학자 존 에스포시토가 별세했다. 그는 '문명의 충돌'은 냉전 이후 보수 우파 학자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이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명의 대화'라고 호소했다. acmcu.georgetown.edu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이란 말은 영국 출신 미국 프린스턴대 중동학자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가 1990년 월간지 ‘더 애틀랜틱’에 기고한 에세이 ‘무슬림 분노의 뿌리(The Roots of Muslim Rage)’에 처음 등장했다. 1979년 이란 혁명과 89년 살만 루슈디 파동,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서구의 이슬람권에 공포와 경계심, 혐오가 점증하던 무렵이었다. 냉전이 갓 끝난 때이기도 했다.

2003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보수)’ 권력자들에게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면 중동 민주화-현대화가 도미노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이른바 ‘루이스 독트린’으로 이라크 전쟁을 종용한 주역 중 한 명이 그였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93년 논문과 96년 동명의 책으로 저 용어를 세계적 담론으로 확산시켰다. “문명 간 거대한 역사적 단층선이 다시 불타오르고 있다.(… 기독교와 정교회, 힌두교, 불교, 유대교 국가들과 면한) 이슬람의 모든 국경이 피투성이다.” 그렇게 냉전 이후의 세계는 새로운 선-악의 구도로 재편됐고 ‘적색 공포(Red. Scare)’의 공백은 이슬람 혐오(Islamophobia)로 빠르게 채워졌다.

1995년 4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탄 테러 직후 미국 주요 언론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중동 테러의 전형”이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FBI는 “갈색 픽업트럭을 탄 중동계 용의자들”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고, 일부 아랍계 무슬림 미국인(아브라함 아흐마드)이 연행당하고 아랍계에 대한 혐오-차별 범죄가 잇따랐다. 진범이 극우 성향의 백인 미국인(Timothy McVeigh 등)이란 게 밝혀진 뒤에도 오보와 여파에 대해 공식 사과한 매체나 정치인은 없었다.

2001년 알카에다의 9.11 테러 이후 이슬라모포비아는 당위가 아닌 ‘정의(正義)’가 됐다. 대다수 무슬림과 극단주의 테러 집단은 다르다는 변호는 안보를 위협하는 안일함으로, 또 테러 집단을 옹호한다는 비난거리가 됐다. 보수 언론인 마틴 크레이머(Martin Kramer)가 “(그들은) 무슬림 단체가 역겨운 행동을 할 때마다 ‘이건 이슬람을 대표하지 않는다. 진정한 이슬람이 아니다’란 말만 읊어댄다”고 말한 게 그 무렵이었다.

크레이머가 손가락질한 표적의 중심이 미국의 이슬람 학자 존 루이스 에스포시토(John L. Esposito, 1940.5.19~ 2026.7.19)였다. 그는 이슬람교에 원리주의나 근본주의라는 기독교적 용어가 덧붙여지기 전인 1970년대부터 정치-사회적 운동으로서의 이슬람 정체성과 역사적 분화 과정을 연구하고, 50여 권의 학술-대중서와 강연, 인터뷰, 미 국무부와 국토안보부, 의회 자문 등을 통해 이슬람-무슬림에 대한 미국 및 서구의 편견을 불식시키고자 애쓴 학자다.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정치적 이슬람)에 기반한 반미 반서구 정서와 테러리즘의 뿌리는 종교적 교리나 문화 탓이 아니라 19세기 이래의 식민-신식민주의, 특히 석유 등 자원 확보를 위한 미국의 중동 권위주의 정권 비호와 군사적 개입, 친이스라엘 정책 등 역사-사회적 맥락 속에 있으며, 이슬라모포비아 역시 개인적 무지나 편견을 넘어 정책과 언론 등에 의해 구조화-제도화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나의 전통에 대한 깊은 신념이 다른 전통에 대한 존중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슬람 위협론에 근거한 ‘문명의 충돌’을 냉전 이후 만들어진 신화라며 지금 필요한 것은 ‘문명의 대화’라고 역설한 그가 별세했다. 항년 86세.

2020년 10월 미국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이슬람 혐오 발언이 거침없이 전세계로 전해지던 무렵, 이탈리아 수도 로마에서 소수의 무슬림들이 벌인 연좌시위 현장. "이슬라모포비아는 자유가 아니며, 증오에 찬 위협적인 발언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란 구절이 적혀 있다. AFP 연합뉴스

그는 평생 독실한 이탈리아계 가톨릭 교인이었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사제나 선교사가 되고자” 14세 때부터 만 10년간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살면서 신학을 공부했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 “마음 깊은 곳의 외로움”을 떨치지 못해 사제 서품 직전인 64년 수도회를 떠난다. 뉴햄프셔의 세인트 앤서니대와 세인트 존스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뒤 템플대 박사과정(신학)에 진학한 그는 학장의 권유에 따라 시큰둥한 마음으로 이슬람 강좌를 수강했다가 “변혁적인(transformative)” 지적 충격을 받게 됐다고 한다.

“이슬람교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었”고 “영화 ‘엑소더스(Exodus,이스라엘 건국 과정을 영웅적으로 그린 1960년 시오니즘 영화)’ 등 영향으로 막연히 아랍-무슬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터였다. 팔레스타인 출신 저명 이슬람 학자 이스마일 알파루키 교수의 그 강의실에서 그는 대다수 무슬림 학생들과 어울리며 문화-관습 등 일상 전반에 스민 삶의 총체로서의 이슬람교의 역사와 본질을 경험한다.

이슬람교가 유대교-기독교와 다를 바 없는 중동에서 탄생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이며, 신약의 주요 인물들이 쿠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특히 마리아(마리암)는 쿠란에 별도의 장(쿠란 제19장)이 있을 만큼 중시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유대-기독교 전통 담론에서 배척돼 힌두교나 불교와 더 가깝게 밀쳐져 있던 이슬람교가 유일신과 예언자를 공유하는 ‘유대-기독-이슬람 전통’의 일부라는 사실. “취업도 힘들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이슬람학을 전공, 7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인들의 말처럼 취업 전망은 정말 암울했다. 당시 서구의 이슬람학은 냉전과 오리엔탈리즘-근대화 이론에 입각한 세속주의의 자장 즉, 신학적 연구보다는 냉전 하의 경제 개발, 아랍 민족주의 정권의 성패가 주된 관심사였다. 정통 신학을 연구한 비주류 이슬람학자였던 그는 매사추세츠주 우스터(Worcester)의 작은 예수회 학교인 홀리크로스(Holy Cross) 칼리지에 어렵사리 자리를 얻어 약 20년간 이슬람학이 아닌 ‘비교종교학’을 강의했다.

1979년 이란 수도 테헤란 아자디(Ajadi) 광장에 모인 군중과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의 대형 초상화. 대사관 직원 등 66명의 미국인이 인질로 잡혀 총 444일간 억류된 저 역사적 사건과 거의 동시에, 다시 말해 그 공포와 증오 속에서 비로소 미국은 이슬람(원리)주의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AP 연합뉴스

1979년 이란 혁명과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은 중동-국제정세뿐 아니라 이슬람학의 패러다임을 뒤집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슬람 사회가 서구식 근대화를 통해 세속화-서구화하리라던 근대화이론의 패러다임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며 종교(시아파)가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정치적 동력일 수 있다는 게 입증된 사건. 정계와 학계는 자신들이 놓친 게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슬람(원리)주의가 중동 연구의 뜨거운 화두로 급부상했다.

이슬람교 역사와 분화 과정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전문가였던 에스포시토는 단숨에 가장 주목받는 학자가 됐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이고 미 국무부와 외교부 당국자들의 면담-자문 요청이 쇄도했다. 그는 혁명 발발 후 단 5주 사이에 무려 3권의 책 출판 계약을 맺었다. 2023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가진 한 강연에서 그는 “내 경력과 첫 렉서스(고급 승용차)는 이란 혁명 덕이었다”고 농담했지만, 이슬라모포비아에 대한 그의 고난의 행군도 그와 동시에 시작됐다. 조지타운대 무슬림-기독교 이해 센터(ACMCU) 현 소장인 나데르 하세미(Nader Hashemi)는 “미국과 전 세계를 뒤흔든 대재앙적 사건을 배경에 두고 열린 시각으로 이슬람과 무슬림 문제를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라모포비아란 용어는 20세기 초 식민주의 시대의 산물이지만, 기독교 세계의 반이슬람 정서와 행위는 사실상 이슬람교의 창시와 함께 시작됐다. 위 그림은 14세기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수록된 구스타브 도레의 판화로, 몸통이 갈린 채 울부짖는 이가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다.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슬라모포비아’란 용어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중동 식민행정관 알랭 켈리앙(Alain Quellien)이 만든 말이다. “일부에게 무슬림은 유럽 기독교도와 화해 불가능한 적이며, 이슬람은 야만과 불성실, 잔인함으로 정의되는 문명의 부정이지만(…) 그 편견은 다소 과장된 것”이며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럽인의 적이 아니며, 식민 정복에 대한 저항 등 지역적 상황에 의해 적이 된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냉전기 내내 거의 쓰이지 않던 저 용어는 1990년대 부활했다. 영국의 인종 평등 독립 싱크탱크인 ‘러니미드 트러스트(Runnymede Trust)’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1994년 보고서에 이어 97년 영국 내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차별 실태 보고서를 발표하며 저 용어를 다시 썼다. 보고서는 이슬라모포비아를 “이슬람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나 혐오”로 정의하며, 그것이 개인적 혐오가 아닌 사회 구조적 문제라 규정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한 정부와 언론, 교육, 노동 등 여러 분야의 60여 개의 권고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저 용어와 별개로, 이슬라모포비아는 이슬람교가 창시된 7세기 이래 비잔틴-기독교 세계의 이단 비판과 함께 시작돼 근 300년간 이어진 십자군 전쟁으로 격화됐다. 15세기 말 이베리아 반도-그라나다 수복(레콩키스타) 직후 스페인 정부는 ‘피의 순수성(Limpieza De Sangre) 법’이란 걸 제정했다. 기독교로 다시 개종했더라도 이단의 피가 섞인 사람은 공직과 대학-수도회 입학(입회), 길드 가입, 결혼 등을 금지-제한한 법. 그 법은 1865년에야 공식 폐지됐다.

서사시 ‘롤랑의 노래’나 단테의 ‘신곡’도 중세 문화(문학)가 무슬림을 악마화한 단적인 예다. 단테는 지옥편 28곡에 “기독교를 분열시킨”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몸통이 갈려 울부짖는 형벌을 받는 장면을 담았다.

18~20세기 초 유럽 식민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은 중동-아랍 세계의 열등성을 부각하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다. 탈식민화와 냉전기 친서구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독립-민주화 세력 중 일부가 반서구 정치집단으로 분화하면서 이슬람=폭력=테러 등식에 기반한 이슬라모포비아도 본격화했다.

9.11 직후인 2002년 책 ‘부정한 전쟁(Unholy War: Terror in the Name of Islam)’에서 에스포시토는 오스만-무굴 등 역대 무슬림 제국들의 개방적-관용적 성격과 탈식민지 시대 이후 무슬림 권위주의 정권의 차이를 중점 부각했다. 그는 식민시대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에 건강한 시민사회를 구축하는 데 철저히 무관심했거나 오히려 반대했고, 그 결과 현대 서구 사회의 주요 가치들-인권과 자결권, 민주화 등-의 유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 열강들이 철수하면서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인위적으로 국경을 그었고, 그들의 힘을 등에 업은 정통성 없는 통치자들이 보안군과 비밀경찰에 의존해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해왔다는 사실, 한마디로 아랍-중동 사회의 민주화를 가로막은 것은 이슬람 종교나 문화가 아니라 제국주의-권위주의의 역사라는 거였다.

그는 2021년 인터뷰에서 2010~11년 ‘아랍의 봄’은 정권의 부패와 절망에 분노한 평범한 청년들과 중산층, 노동자, 기독교도 등이 함께 일으킨 대중 봉기였으며, 그 결과 이집트에서 비폭력 개혁 노선을 추구해온 ‘무슬림 형제회’가 선거에서 승리한 점을 중동 민주주의의 자생적 가능성의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2013년 군부 쿠데타로 형제회 정권(무함마드 무르시 정부)이 전복됐고, 그 과정을 미국과 유럽이 사실상 침묵-용인한 점, 그렇게 복원된 권위주의 정권의 더 가혹해진 탄압이 ISIS의 세력화 등 폭력적 급진화로 이어진 점을 환기했다. “진정한 위협은 이슬람주의 자체가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이 모든 합법적 반대 세력을 억압하면서 만들어내는 진공 상태다.” 즉 식민 열강들은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자원(석유)을 착취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들을 지원했고, 그 결과 일부 무슬림들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거부하며 “종교(이슬람교)를 납치”함으로써 1979년 이란의 샤 정권을 전복하고,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하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탄생시켰다는 것.

그는 기독교 일부 원리주의자들이 낙태 클리닉에 폭탄을 던졌듯이 무슬림 테러리스트 역시 대다수 무슬림이 혐오하는 극단주의자라고, “모든 종교에는 초월적인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아랍의 봄 당시인 2011년 2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 타흐리르(RAhrir) 광장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민들. 그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아니라 다수의 기독교인을 포함한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혁명 직후 선거로 집권한 비폭력 개혁파 '무슬림 형제단' 정권은 2013년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무슬림 형제단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ISIS 등 극단주의 집단이 세력을 확장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앞서 언급한 마틴 크레이머의 조롱 직후 그는 여론조사기관 갤럽과 함께 약 3년(2005~07)에 걸쳐 무슬림 35개국 시민 5만여 명을 대상으로 전화-대면 인터뷰해 그 결과를 분석한 책 ‘이슬람의 대변자는 누구인가(Who Speak for Islam? – What a Billion Muslims Really Think)’를 출간했다(Dalia Mogahed 공저). 응답자 중 9.11 테러에 동조한 이는 7%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평화와 민주주의, 여성 인권 등을 지지했다. ‘반서방 정서’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영국과 미국의 중동정책에 반감이어서, 예컨대 이집트인의 74%와 69%는 각각 미국과 영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한 반면 프랑스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건 21%에 불과했다. 또 쿠웨이트인의 66%는 미국을 부정적으로 여겼지만 캐나다를 밉게 본 응답자는 고작 3%였다.

그는 저 진실을 외면하는 보수-극우 학자들을 “대다수 무슬림이 지하가 아닌 사회 안에서 생활하며 활동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93년 조지타운대로 옮겨 ‘무슬림-기독교 이해 센터’를 창립해 2024년까지 이끌었고, 2000년 대학 내 단 4명뿐인 석좌교수(University Professor)가 됐다. 미국 중동학회 회장을 지낸 이슬람학자로서 드물게 미국종교학회(AAR) 회장을 역임하며 미국 정부와 유엔, EU의 정책에도 자문했다. 말년의 그는 이슬라모포비아 연구 프로젝트인 ‘브리지 이니셔티브(Bridge Initiative)’에 착수, 미국 대선 등 국제 정치 사회 전반의 이슬람 혐오-차별 현상을 분석하고 폭로하는 데 힘썼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제노사이드를 성토하며 지식인 연대 서명 등을 주도했다.

당연히 친 이스라엘계 극우 보수 학계는 그의 연구소를 ‘반유대주의의 진앙지’라 비난했고, 그를 테러집단을 옹호하는 위험 인물로 지목하곤 했다. 극우 성향의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호로비츠(David Horowitz)도 미국 대학가 진보-좌편향성을 비판한 2006년 책 ‘대학교수들: 미국의 가장 위험한 101명의 학자’에 에스포시토를 포함시켰다. 에스포시토는 “내가 1번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농담했다. 그는 호로비츠 등을 “세상의 다스베이더들(the Darth Vaders)”이라 부르곤 했다.

투사적 이미지와 달리 사석의 에스포시토는 농담을 즐기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누구와도 공감 어린 대화를 나누곤 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센터 동료였던 존 볼(John O. Voll)은 90년대 말 에스포시토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호메이니의 딸과 ‘여성 인권’을 두고 대담한 일화를 소개했다. “그 삼엄하던 시절 혁명의 딸이 브루클린 출신 가톨릭 교인과 시중 웃으며 대화를 나눴어요. 존에겐 문화적 경계 따윈 없었죠.”

에스포시토는 90년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혁명의 딸'과 마주 앉아 여성 인권을 두고 대화할 만큼 친화력과 공감력이 탁월했지만, 그는 대다수 무슬림과 소수의 테러리스트를 구분하지 않는 우파 학계의 완고한 이슬람 혐오주의자들을 "세상의 다스 베이더들"이라 부르곤 했다. bates.edu

그는 수도원을 떠난 이듬해 결혼한 아내(Jeannette “Jean” Paisker)와 입양한 아들(Emilio Gonzalez)을 두고 해로했다.

제자들은 그의 공감력과 관대함을 기렸다. 파키스탄 페샤와르대 민하스 마지드 칸(Minhas Majeed Khan) 교수는 타 대학서 학위논문을 쓰다가 막혀 보낸 이메일에 친절히 답장해준 극소수 학자 중 한 명이 에스포시토였다며 “그 관대함이 내 학문적 삶의 궤적을 바꿔놓았다”고, “지금도 나는 당시 나를 보살펴준 그의 시선으로, 세미나를 할 때든 논문을 지도할 때든, 학생들을 또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첫 아이를 출산한 뒤 휴학-학업 포기를 두고 번민하던 내게 ‘휴학-연구장학금’이란 대안을 제시해준 덕에 신학교수(Queens Univ. Charotte)가 될 수 있었다는 하디아 무바라크(Hadia Mubarak)는 “그는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의 50년 지기라는 말레이시아 현 수상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은 ”존은 글에서 보여준 엄격함 만큼이나 사적인 대화에서는 관대하고 자상했다”고 기렸고, 튀르키예 전 대통령 압둘라 굴(Abdullah Gul) 서구 세계에 이슬람을 소개한 그의 글들은 “늘 아름답고 우아했다”고 애도했다. 생전의 그가 “나의 소중한 비평가”라고 소개하곤 하던 아내 진은 “그의 제자들과 친구들 속에서 그를 본다”고 “그들을 통해 그의 유산이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너무 오래 걸려 낙담할 때도 있겠지만, 세상은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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