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속 삶도 ‘웃음’으로 살아낸 재일 조선인 가족

정의신 연극 ‘스미레 미용실’
‘재일 코리안 3부작’ 완결편…1963년 실제 탄광 폭발 사고 모티브
자이니치 2세 정 연출가 경험 투영…“가족 역사가 곧 이주의 역사”
1965년 일본 규슈의 작은 탄광마을 ‘아리랑 고개’. 재일조선인인 수미네 가족과 저마다의 사연으로 고향을 떠나온 일본인 광부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이곳은 가난하지만 소박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가정집 한편에 이발소를 운영하는 수미네는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삶 속에서도 수미는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미레 미용실’을 여는 꿈을 꾼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마을의 평온은 일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연극 <스미레 미용실>은 재일교포 극작가 겸 연출가인 정의신(사진)의 ‘재일 코리안 3부작’ 가운데 하나다. 전작 <이를테면 마치 들에 피는 꽃처럼>(2007), <야끼니꾸 드래곤: 용길이네 곱창집>(2008)에 이어 전후 일본 사회 속 자이니치(재일한국인)의 삶을 무대에 올렸다. 2012년 일본 신국립극장 초연 이후 14년 만에 한국에 첫선을 보인다.
극의 무대인 ‘아리랑 고개’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터를 잡은 한국인 가족의 삶이 응축돼 있다. 조선 국적을 지키는 아버지 ‘홍길’, 생계를 위해 귀화한 수미의 남편 ‘나루히로’, 사고로 다리를 다친 시동생 ‘히데히로’, 언니 ‘하츠미’와 일본인과 결혼한 막내 ‘하루미’까지, 국적도 이름도 제각각인 식구들이 부대끼며 살아간다. 탄광 사고는 차별과 빈곤 속에서도 웃으며 삶을 꾸려 가던 이들을 더는 떠밀릴 수 없는 삶의 막장으로 내몬다.

작품이 무겁고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전작 <야끼니꾸 드래곤>에서 그랬듯, 극중 인물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농담하고, 다투고, 술잔을 기울인다. 시도 때도 없이 “힘내자”고 외치는 ‘몽골고원 아저씨’ 같은 인물은 자칫 무겁게 가라앉으려는 극에 숨구멍을 낸다. 웃다가 목이 메고, 눈물을 쏟는 와중에도 느닷없이 웃음이 터진다.
작품은 1963년 후쿠오카현 미쓰이 미이케 탄광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사고를 모티브로 했다. 458명이 숨지고 839명이 일산화탄소(CO) 중독 후유증을 겪은 이 사고는 에너지 전환기, 무리한 감원과 안전 소홀이 부른 참사로 기록됐다.
주인공 수미 역시 실존 인물에게서 태어났다. 정 연출은 2005년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하기 위해 규슈 탄광 지역을 취재하다 사고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그는 개막 직후 인터뷰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난폭해진 남편을 피해 밤새 두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면서도, 국가를 상대로 끝까지 보상 투쟁을 이어간 강인한 여성이었다. 그분이 수미의 실제 모델”이라며 “국가가 방치한 참사 희생자들을 무대 위에 기록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작품의 미덕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고난을 신파로 그리지 않는 데 있다. 웃음과 눈물, 슬픔과 익살을 뒤섞으며 가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삶에 대한 의지를 그려낸다. 전무송, 최지연, 전국향, 서동갑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열연은 인물들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무너진 이들의 슬픔이 능청스러운 농담과 비통한 통곡을 넘나들며 관객의 가슴을 저릿하게 파고든다.
작품에는 정 연출 자신의 가족사도 포개져 있다.
15세 때 홀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정착한 그의 아버지는 조선적을 유지했다. 정 연출은 한국 국적, 형들은 일본 국적이다. 그는 “가족의 역사가 곧 이주의 역사이자 자이니치의 역사”라고 말했다. 생활감이 넘치는 세 자매의 모습은 어머니와 이모들을 투영한 것이다. 정 연출은 “어머니가 네 자매였는데, 어머니와 이모들이 만나면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밤새도록 와글와글 이야기했다”면서 “나는 남자만 오형제라 자매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며 웃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해온 정 연출은 오랫동안 두 나라의 경계에 있었다. 한때 이런 정체성을 둘러싸고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두 문화를 모두 품은 ‘더블 컬처’(Double Culture)를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60여년 전 일본 탄광촌의 비극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의 부조리와도 맞닿아 있다. 정 연출은 “언제 불합리한 참사에 휘말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현대 사회에서 서로를 부축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닿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공연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10월3일까지 이어진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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