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 시대, ESS도 봄날이 온다

권준범 기자 2026. 9. 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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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 진화 거쳐 전력망 핵심 설비로 급부상
계약시장·해외투자 확대...안전성·수익구조 관건

[수소신문] 태양광과 풍력발전이 늘어날수록 전력산업에는 새로운 과제가 쌓인다. 전기를 많이 생산하는 시간과 실제로 필요한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맑은 날 한낮에는 태양광 전력이 몰리지만 해가 진 뒤에도 공장과 가정,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소비한다. 송전망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생산할 수 있는 전기를 줄이는 출력제어까지 발생한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성과를 실제 전력 공급으로 연결하려면 발전설비와 함께 전기를 저장하고 조절하는 기반이 필요하다.

에너지저장장치, ESS가 주목받는 이유다. 남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한 시간에 공급하는 ESS는 발전량과 소비량 사이의 시간차를 줄인다. 빠른 충·방전으로 전력망의 주파수 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와 배터리 가격 하락이 맞물리면서 ESS의 역할은 전기요금 절감이나 비상전원 확보를 넘어 전력계통 운영으로 넓어지고 있다.

시장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글로벌 에너지 리뷰 2026'에 따르면 2025년 세계 배터리 저장설비 신규 설치 규모는 출력 기준 108GW로 전년보다 40% 증가했다. 신규 설비의 약 80%는 전력망 규모의 대형 설비였다. 중국이 신규 설치량의 약 60%를 차지했고 미국과 유럽이 뒤를 이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올해 2월 집계한 사업자 계획을 토대로 2026년 미국의 대규모 배터리 저장설비 신규 설치 예정량을 24GW로 제시했다.
▲AI가 생성한 ESS 설비 이미지.

ESS 시장을 이해하려면 출력과 저장량을 구분해야 한다. MW는 한 번에 얼마나 큰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지, MWh는 얼마나 많은 전기에너지를 저장하는지를 나타낸다. 가령 출력 100MW에 사용 가능한 저장량이 600MWh라면 단순 계산상 6시간 공급이 가능하다. 실제 운전에서는 변환 손실과 운전 여유분, 배터리 노화까지 고려해야 한다. 같은 100MW 설비라도 저장시간이 다르면 투자비와 역할이 크게 달라지는 이유다.

기술 변화의 중심에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있다. ESS는 전기차에 비해 무게와 부피의 제약이 상대적으로 작고, 반복적인 충·방전을 얼마나 경제적으로 수행하는지가 중요하다. 니켈·코발트를 사용하지 않는 LFP는 원가와 수명 측면의 장점을 바탕으로 적용 범위를 넓혔다. IEA는 2025년 세계 배터리 ESS에서 LFP가 90% 이상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관련 생산기반이 중국에 집중돼 있어, 보급 확대와 공급망 다변화를 함께 추진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가격 하락도 시장 확대를 뒷받침했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에 따르면 대규모 배터리 저장설비의 총설치비는 2010년 kWh당 2571달러에서 2024년 192달러로 약 93% 낮아졌다. 이는 배터리 셀 가격만을 뜻하는 수치가 아니라 설치된 시스템 기준의 비용이다. 국내 사업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견적도 아니다. 국가별 인건비와 부지, 계통연계 비용, 안전설비, 저장시간에 따라 실제 투자비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장기간 이어진 비용 하락이 ESS의 활용 가능성을 크게 넓혔다는 방향은 분명하다.

기술 경쟁은 배터리 소재에서 시스템 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은 셀의 전압과 온도, 충전상태를 감시하고, 에너지관리시스템(EMS)은 언제 얼마나 충전하고 방전할지를 결정한다. 여기에 전력변환장치(PCS), 냉각설비와 보호장치가 결합한다. 같은 배터리를 사용해도 이들 장치를 어떻게 설계하고 제어하는지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운전 신뢰성이 달라진다. 이상 징후를 조기에 파악하는 진단기술 역시 실제 운전환경에서 탐지 성능을 검증하고 유지보수에 연결할 때 가치가 생긴다.

전력망을 능동적으로 안정시키는 '그리드포밍'도 주목할 분야다. 기존 계통의 전압·주파수를 따라가는 제어에서 나아가, 인버터가 전압과 주파수의 기준을 형성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적용 조건과 설계에 따라 계통 안정화나 정전 후 복구를 지원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와 인버터 기반 설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ESS의 활용 범위를 넓혀주는 기술이지만, 배터리를 설치하는 것만으로 이러한 기능이 자동으로 확보되지는 않는다. 제어 성능과 보호체계, 다른 설비와의 상호작용을 검증해야 한다.

저장시간을 늘리는 기술도 산업의 다음 경쟁축이다. 몇 시간 동안의 수급 불균형을 조절하는 것과 재생에너지 발전이 장시간 줄어드는 상황에 대응하는 것은 요구 조건이 다르다. 리튬이온 배터리의 저장시간을 늘리는 방식과 함께 흐름전지, 압축공기 저장 등 여러 기술이 검토되는 배경이다. 양수발전까지 포함하면 에너지저장의 선택지는 더 넓어진다. 기술별로 입지와 건설기간, 효율, 운전수명이 달라 동일한 기준으로 우열을 정하기는 어렵다.

바나듐 흐름전지는 전해액을 외부 탱크에 저장하고 순환시켜 충·방전한다. 출력을 담당하는 부분과 에너지를 저장하는 부분을 구분해 설계할 수 있어 저장시간을 늘리는 데 유리한 특성이 있다. 반면 전해액 비용과 설치면적, 펌프 운전에 필요한 에너지 등을 함께 따져야 한다. 나트륨이온 배터리도 원료 확보와 공급망 측면에서 대안으로 평가되지만, 실제 원가와 수명, 양산 품질을 시장에서 입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장주기 저장 시장은 특정 기술이 단번에 대체하기보다 용도별로 경쟁하고 역할을 나누는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서는 ESS 중앙계약시장이 수요를 구체화하고 있다. 전력계통 운영에 필요한 ESS를 경쟁입찰로 확보하고 장기계약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전력거래소가 지난해 11월 공고한 제2차 육지 입찰은 6시간 연속 공급이 가능한 설비를 대상으로 15년의 거래기간을 설정했다. 설비를 설치하는 능력에 더해 계약기간 동안 정해진 성능을 유지하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와 전력거래소는 지난 2월 12일 전남 6곳과 제주 1곳 등 7개 사업을 제2차 시장의 우선협상 대상으로 발표했다. 당시 제시한 물량은 최대 565MW이며, 설비 구축 완료 시한은 내년 12월이다. 이는 운영 중인 설비 규모와 구분해야 한다. 입찰로 확보한 사업이 실제 계통 자원으로 기능하려면 인허가와 자금조달, 기자재 공급, 시공과 성능검증까지 이어져야 한다.

평가 방식에서도 시장의 관심이 드러난다. 제2차 입찰은 가격과 비가격 평가 비중을 기존 60대 40에서 50대 50으로 조정하고 화재 안전성과 산업경쟁력 기여도 평가를 강화했다. 초기 구매가격만 낮추기보다 안전성과 공급·운영 능력을 함께 보겠다는 취지다. 국내 시장이 장기적으로 성장하려면 이러한 평가가 낙찰 단계에 머물지 않고 실제 설비의 가동률과 성능, 유지보수 품질로 확인돼야 한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ESS 사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달 미국 미시간주 랜싱 공장의 생산 개시를 발표했다. 이 공장은 ESS용 LFP 셀을 생산하며, 미국 자회사 버테크가 이를 전력망용·상업용 저장시스템으로 통합한다. 배터리 셀 공급에서 시스템 구축까지 사업 범위를 넓히는 사례다.

삼성SDI는 지난해 12월 미국 고객과 2조원 이상 규모의 ESS용 LFP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공급기간은 2027년부터 3년이다. SK온도 지난해 미국 플랫아이언 에너지와 2026~2030년 최대 7.2GWh의 ESS용 LFP 배터리 공급계약을 발표했다.

ESS는 전기차 수요 둔화에 대응하려는 배터리 업계에 새로운 판로다. 다만 생산라인 전환과 수주 확대가 곧바로 수익성 개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중국 기업들이 확보한 LFP 원가경쟁력에 대응해야 하고, 해외 현지생산에는 초기 가동비용과 공급망 관리 부담이 따른다. 장기간의 성능보증과 현장 서비스도 필요하다. 경쟁력은 셀을 얼마나 저렴하게 만드는지와 함께, 고객이 요구하는 기간 동안 설비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에서 갈릴 전망이다.

사업성 분석에서도 관점을 넓힐 필요가 있다. ESS의 수익은 시장과 계약에 따라 전력 가격 차이를 활용한 거래, 최대수요 감축, 계통 서비스 제공 등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가능한 수익을 모두 더하면 사업성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특정 시간에 전력망 지원을 위해 확보한 충전량은 다른 용도로 자유롭게 사용하기 어렵다. 국내에서도 육지 중앙계약시장과 제주 시범사업의 정산구조가 다르므로 사업별 규칙과 운전 의무를 확인해야 한다.

비용 역시 배터리 구매비에 그치지 않는다. 부지와 계통연계 공사, 금융비용, 유지보수, 보험, 냉각용 전력, 배터리 성능 저하에 따른 보강·교체비가 누적된다. 충전에 쓴 전기를 모두 되돌려 받을 수도 없다. 예를 들어 왕복효율을 90%로 가정하면 충전에 사용한 100MWh 가운데 방전으로 회수하는 양은 90MWh다. 단순한 충·방전 가격 차이가 아니라 손실과 열화비용을 반영한 수익을 계산해야 한다. 결국 장기간 실제로 공급한 전력량 대비 총비용이 설비의 경제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안전성도 이러한 비용과 직결된다. LFP의 상대적인 열적 안정성이 시스템 전체의 무사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과충전과 내부 결함, 전기적 이상을 예방하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다른 셀과 설비로 확산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 입찰 공고가 소재 특성뿐 아니라 화재 예방·대응 설계와 안전규정 준수를 요구하는 이유다. 안전 투자와 정기점검을 줄여 초기 비용을 낮추면 장기간의 운전 중단과 복구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증가는 수요 기반을 넓히는 요인이다. 다만 순간적인 정전 공백을 메우는 무정전전원장치(UPS)와 수 시간 동안 전력을 옮겨 쓰는 ESS는 역할이 다르다. IEA 역시 데이터센터 등에 사용되는 UPS가 다른 비상전원이 가동될 때까지 짧은 시간 전력을 공급한다는 점을 구분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커진다고 해서 모든 배터리 수요가 동일한 저장시간과 수익모델을 갖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산업 성장은 보급량과 운영 성과를 함께 봐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비용과 공급기반이 검증된 리튬이온 배터리 중심의 확대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더 높아지면 저장시간을 늘리고 계통 안정화 기능을 고도화하려는 수요도 커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터리 제조와 함께 전력변환장치, 제어 소프트웨어, 안전진단, 유지보수 분야의 역할이 확대될 수 있다.

정책의 과제는 필요한 장소와 시간에 저장설비가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출력제어가 잦은 지역이라도 저장한 전기를 나중에 보낼 송전 여력이 없다면 활용도가 제한된다. 수 시간 규모의 ESS만으로 계절 간 수급 불균형을 해결할 수도 없다. 송전망 보강과 수요관리, 다른 유연성 자원과의 조합 속에서 ESS의 규모와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국내 ESS 산업이 확보해야 할 것은 장기 운전에서 증명되는 신뢰다. 예측 가능한 조달 일정, 실제 계통 기여에 대한 보상, 안전성과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운영 데이터가 쌓여야 민간투자와 기술개발도 지속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ESS의 필요성을 키우고 있다면,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은 저장한 전기를 얼마나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필요한 순간에 공급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