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 美대사관에 뛰어들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면 좋겠구나”… 이념 넘어 억압 저항한 예술가[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장재선 전임기자 2026. 9. 2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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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3월 13일 오후 1시 15분(오스트리아 시각). 빈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8년 전 북한으로 납치됐던 대한민국 영화인 최은희와 신상옥이었다.

최은희, 신상옥은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하면서도 탈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이로써 신상옥은 남과 북, 미국 모두에서 영화를 제작한 유일한 한국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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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23) 최은희·신상옥 납북과 탈출 <하>
탈북 계획 세운 후 김정일에 베를린 영화제 참석 허락받아
오스트리아 빈 이동해 北요원들 감시 따돌리며 美로 ‘망명’
영화보다 영화같은 탈출… 할리우드 활동후 1999년 고국에
이념 대척점에 있는 작품 차례로 만들며 “인간 존엄이 중요”
신상옥(왼쪽), 최은희 부부가 1994년 오스트리아 빈 미국대사관을 다시 찾았다. 미국 ABC방송 특집 촬영을 위해 8년 전 북한의 감시망을 피해 탈출했던 현장을 찾은 그들은 웃는 표정이면서도 여전히 떨린다고 했다. 당시 흑백 사진에 AI를 통해 색상을 입혔다. 책 ‘영화감독 신상옥’ 중

1986년 3월 13일 오후 1시 15분(오스트리아 시각). 빈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두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8년 전 북한으로 납치됐던 대한민국 영화인 최은희와 신상옥이었다. 목숨을 건 탈북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최은희, 신상옥은 북한에서 영화 활동을 하면서도 탈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들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하자 김정일의 신뢰가 높아졌고, 두 사람은 그걸 이용해 외국에 함께 나갈 기회를 만들었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참석, 해외 합작영화사 설립을 위한 회의 등을 핑계로 삼았다. 서방 세계에 북 작품을 수출하기 위해 빈에 신필름 지사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그 지사를 통해 ‘사랑 사랑 내 사랑’(춘향전을 영화로 만든 작품)의 일본 수출 건도 추진하며, 이를 위해 교도통신 기자를 현지에서 만나 인터뷰할 계획이라고도 했다. 당시 북한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나빠서 직통 거래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한 시나리오였다.

“절대 단독행동은 없는 것이요”

북한 영화의 세계화를 꿈꿨던 김정일은 두 사람의 출국을 허용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했는지 철저한 감시가 따라붙는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두 사람이 몰래 녹취한 김정일의 발언. “우리 측 사람들이 단체로 당신들을 보호하며 다니니까요, 절대 단독 행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실제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북의 감시원들이 보디가드를 빙자해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두 사람이 김지미, 임권택 등 우리 영화인들을 만날 땐 남쪽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경계하며 서 있었다. 남북 양쪽의 감시를 받는 현실이 참 서글펐지만, 두 사람은 태연자약을 가장하며 탈출 시나리오에 따라 동베를린을 거쳐서 빈으로 이동했다.

1994년 신상옥(앞줄 왼쪽 두 번째)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일 때 모습. 그의 오른쪽 옆이 배우 카트린 드뇌브, 뒷줄 오른쪽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책 ‘영화감독 신상옥’ 중

그들은 빈 호텔 카운터에서 일하는 동양인 외모의 직원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방으로 불렀다. 그에게 미화 수천 달러와 함께 편지 두 장을 건네며 미국 대사관에 은밀히 전달해 달라고 당부했다. 영어와 일본어로 각각 쓴 편지 두 통의 앞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입니다.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하려고 하니 협조해 주십시오.”

대사관에 편지를 전했는지 여부를 다음 날 낮 12시까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는데, 시간이 되어도 그 직원은 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교도통신 기자 에노키 아키라를 만났다. 택시를 타고 인터뷰 장소로 가던 중 신상옥이 에노키에게 탈북 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이 자진 월북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에노키는 처음에 의아스럽게 여겼으나, 그들이 절실한 표정으로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비로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택시의 백미러를 통해 미행 차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쪽 감시원들이 쫓아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에노키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잡히는 대로 꺼내 택시 기사에게 주며 미행을 따돌려 달라고 당부했다. 차는 급하게 유턴을 해서 미국 대사관 쪽으로 향했다. 대사관 정문에 차를 대 달라고 했으나, 그 앞길엔 다른 차들이 주차돼 있어 30m나 지나 멈췄다.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려 뛰기 시작했다. 최은희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정신없이 뛰는데 대사관까지의 길은 멀기만 했다. 있는 힘을 다해 뛰는데도 슬로모션처럼 몸이 빨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뒷덜미를 잡힐 것 같고, 총알이 날아올 것 같은 긴박감이 우리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대사관 유리문 앞에 다다랐다.”

(이런 탈출이 있은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목숨을 건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분단의 질곡은 현재형인 것이다.)

최은희와 신상옥은 그렇게 탈출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왜 한국으로 바로 오지 않았을까. 두 사람은 나중에 “북의 첩보원들이 뒤를 쫓을 게 분명한 상황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신변 보장 약속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했다.

두 사람은 한국인이 없는 워싱턴DC 인근에서 3년간 은둔 생활을 한 후 한국에 있는 자녀들을 불러왔다. 큰딸 명임은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에 두 아들 정균, 상균과 작은딸 승리가 미국으로 와서 생활했다.

南·北·美 모두에서 영화 제작

신상옥은 1992년 할리우드에서 일본 자본의 투자를 받아서 영화 ‘스리 닌자’를 만들었다. 미국 극장서 개봉한 후 흥행에 성공하며 그해에 제작비 대비 수익률을 최고로 올린 영화로 기록됐다. (이로써 신상옥은 남과 북, 미국 모두에서 영화를 제작한 유일한 한국인이 됐다.)

신상옥은 1994년엔 제4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세계 영화계가 그를 거장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때 그의 작품 ‘증발’이 개막작으로 초청됐다. 심사위원 작품을 상영한 것은 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증발’은 유신정권 말기의 정보부장 실종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신상옥은 대한민국 정치 체제에 반감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그는 북한 전체주의 체제의 광적인 테러 행위를 비난하는 작품을 그 이전에 만들었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을 다룬 1990년 작 ‘마유미’가 그것이다.

최은희의 2011년 문화일보 인터뷰 사진. 타계 때 고인 유지에 따라 영정사진으로 썼다.

‘마유미’와 ‘증발’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신상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디에 인간의 존엄성이 있고 진실이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나는 모험적인 좌익도 싫어했고 모럴 없는 우익도 싫어했다. 예술가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해야 하기에, 둘이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0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9년 두 사람은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고국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은희는 귀국하자마자 극단 ‘신협’ 대표를 맡았고,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출연했다. 그즈음 최은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무대가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에 70대 나이에도 직접 서게 됐다”라고 했다.

그때 그는 문화일보 건물에 있는 옛 동양극장에서 공연했던 것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연극 전용 극장으로 유명했어요. 해방 직후 극단 아랑의 단원으로 동양극장에서 공연한 적이 있어요. 공연하고 나왔더니 그사이에 눈이 쏟아져 전차도 버스도 끊겼더군요. 눈길을 밤새 걸어서 남산 근처에 있는 집까지 간 적이 있어요.”

최은희와 자주 대화를 나누다가 새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의 납북과 탈출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는 것이다. 6·25전쟁 때 서울 거리에서 북한 배우 심영을 만났다가 북한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북한 내무성 소속 경비대 합주단에 속해서 북으로 올라가다가 평양 근처 청천강 옆 순천쯤에서 탈출했다.

악극단 멤버 6명이 탈주 계획을 세웠다는 걸 알고 간청해서 함께 도망쳤다. 탈주하는 날 유엔군 낙하산들이 하늘에서 잎처럼 무수히 떨어졌던 것, 청천강을 건널 때 수영을 못하는 그의 팔을 남자들이 붙잡고 동동 떠내려갔던 것 등을 그는 기억했다. “그 와중에도 이 장면을 전쟁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내 어깨를 밀쳤지요?”

그는 빈의 미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단다. “이걸 영화로 만들면 좋겠구나.”

최은희는 미국 대사관 문 앞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빌미로 남편을 가끔 놀렸다. “여보, 당신만 먼저 들어오겠다고 내 어깨를 막 밀쳤지요?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최은희 배우가 1954년 주한 미군 위문공연을 온 배우 매릴린 먼로와 함께한 장면.

그때마다 신상옥은 멋쩍어하며 빙그레 웃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자신이 그랬던 줄도 몰랐던 탓이다. 최은희가 그렇게 놀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신상옥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강해서였다. 한때 결별하는 일이 있긴 했으나, 늘 온화한 얼굴과 다정한 음성으로 자신을 감싸 준 남자였다. 무엇보다 영화에 일생을 바치며 그걸 위해 부지런히 독서하고 공부한 지성인이라는 점이 미더웠다.

최은희는 노년에 이렇게 되돌아봤다. “나는 분단국의 여배우로서, 신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 조국의 비극에 희생양이 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나는 배우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연기를 통해 모든 이들의 인생이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간통죄1호’ 피소됐지만 결혼 후 韓 영화사 큰 획

신상옥, 최은희 커플은 대한민국 ‘간통죄 1호’로 피소된 바 있다. 두 사람은 6·25전쟁 때인 1952년 대구 피란지에서 처음 만났다. 26세의 청년감독 신상옥은 연극배우였던 최은희를 자신의 영화 ‘코리아’에 캐스팅한 후 몇 차례 만나며 사랑에 빠졌다. 최은희는 촬영감독 김학성과 부부로 알려져 있기에 신상옥은 ‘선배의 아내를 넘보는 인간’으로 매도됐다.

김학성이 두 사람을 간통죄 혐의로 고소하는 바람에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 최은희와 김학성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은희는 전처소생의 아이를 키우던 김학성이 간절히 구애하자 함께 살긴 했으나, 생활고와 가정폭력이 겹친 데다가 전쟁이 터지면서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우여곡절을 거쳐 1954년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두 사람은 24시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영화를 위한 삶을 살았다.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등이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1961년에 이들 부부가 만든 ‘성춘향’이 홍성기(감독)·김지미(배우) 부부가 함께 만든 ‘춘향전’과 극장에서 맞붙었는데, ‘성춘향’이 흥행을 압도했다. 1964년에 만든 ‘빨간 마후라’는 일본과 동남아에 수출돼 크게 흥행했다. 최은희는 생전 “한류 바람을 가장 먼저 일으켰다는 긍지가 있다”라고 했다.

천생연분의 호흡을 과시했던 두 사람이 1970년대에 파경을 맞은 것은, 신상옥이 신인배우 오수미에게서 남몰래 1남 1녀를 뒀던 탓이다. 이혼을 했던 두 사람은 납북과 탈출 과정을 함께 겪으며 다시 부부가 됐다.

최은희는 우여곡절 속에서도 2녀 2남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명임·정균 씨는 입양한 자녀였고, 상균·승리 씨는 오수미 씨가 낳은 아이들이었다. 오 씨가 1992년 교통사고로 타계한 후엔 더욱 애틋하게 아이들을 돌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식 교육을 위해 치맛바람도 불사하셨어요.” 올해 63세인 큰아들 정균 씨는 이렇게 되돌아보며, 형제들의 근황을 전했다. “누님은 충북 괴산에서 버섯농장을 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남동생은 미국 캘리포니아 경찰로 일하고 있고, 여동생도 잘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영화감독의 길을 가고 있는 정균 씨는 “올해 부모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0월 중 추모 사업을 조촐하게나마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으셨고 후진 양성을 위해 학교도 운영하셨던 두 분의 업적이 잊히지 않도록 최소한 영화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교육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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