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건넨 '학습의 환상'…우리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다 [찐밸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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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AI의 효율성이 실제 학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진은 AI를 이용해 숙제를 사실상 '외주에 맡긴' 학생들에게 타격이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AI 자체가 학습의 적이라기보다 AI가 학생 대신 '생각해야 할 시간'을 없애버리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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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없이 문제 못 푸는 역설
금지vs활용, 엇갈린 대학가 반응
'생각 먼저' 책임 있게 쓰는 법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17일(현지시간) 미 캘리포니아주(州) 샌타클래라대 캠퍼스. 가을학기 개강 첫 주를 맞은 이날 캠퍼스는 제법 한산했다. 도서관 앞뜰에는 은박지에 싼 브리토나 음료를 손에 들고 대화를 하며 걷는 학생이 여럿 보였다. 도서관 안에는 수업을 마친 뒤 업무를 병행하는 직장인도 있었다.
공대 강의실과 실험실, 연구실, 학습 공간으로 구성된 소브라토 디스커버리·이노베이션 건물에 들어서자 드문드문 앉아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기자는 이곳에 머문 세 시간 동안 재밌는 학습 풍경을 발견했다. 학생들의 노트북 화면에는 대부분 코딩 도구나 인공지능(AI) 에이전트가 띄워져 있었고, 작업 도중 막히면 망설임 없이 AI창에 질문을 넣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션에게 스스로 고민하는 대신 곧바로 AI에 질문한 이유를 묻자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AI는 대화를 통해 사고를 자극하고 확장하는 '생각의 파트너'로 활용할 뿐, 논리를 구체화하고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 자신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AI 시대에 똑똑한 AI 활용은 탁월한 역량으로 인정받는다. 다만 적극적인 AI 사용을 놓고 이를 '사유의 확장'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생각의 외주화'에 불과한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 AI 사용에 관한 특별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학생들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스스로 고민하거나 교수·친구를 찾기보다 곧바로 AI에 답을 요구하는 현상을 '인지적 항복(cognitive surrender)'이라고 명명했다.
스스로 사고하는 대신 AI에 먼저 묻는 습관이 사용자로 하여금 "학습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 할 수 있다"는 게 이 보고서의 문제 의식이다. 다섯 달 동안 학생과 교수, 직원을 인터뷰한 MIT 위원회는 대학이 궁지에 몰렸다고 우려했다.
숙제 점수는 올랐는데, 시험 성적은 떨어지고

AI의 효율성이 실제 학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에 따르면 스톡홀름대와 홍콩대 연구진은 중국 한 지역의 중·고교생 2만6,811명을 30개월간 추적했다. AI를 사용한 학생들의 숙제 점수는 6개월 만에 18% 올랐고 과제 완료 시간은 30%나 줄었다. 그러나 책을 덮고 치르는 월말 시험 점수는 20% 하락했다. 장기적으로는 대학·고교 입시처럼 중요한 시험의 점수도 떨어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AI를 쓴 학생들 모두의 실력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연구진은 AI를 이용해 숙제를 사실상 '외주에 맡긴' 학생들에게 타격이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숙제를 빨리 끝내면서 점수를 올린 학생일수록 학습 손실이 컸고, AI를 쓰더라도 기존 학생들과 비슷한 시간을 들여 문제를 푼 학생들의 손실은 작았다. 다시 말해, AI 자체가 학습의 적이라기보다 AI가 학생 대신 '생각해야 할 시간'을 없애버리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AI 도움 중단했더니…문제해결능력·끈기 약화

이 같은 결과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확인됐다. 카네기멜론대·옥스퍼드대·MIT·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 연구진이 수행한 실험은 AI 도움을 받은 참가자들이 분수 문제를 푼 뒤 AI를 갑자기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마지막 단계에서 독립적으로 문제를 풀게 된 참가자는 문제를 끝까지 풀려는 의지는 물론 성과도 함께 떨어졌다. 연구진은 이를 AI가 답을 대신 내주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문제 해결 능력과 끈기가 약화된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도 관건은 도구가 아닌 쓰는 방식이었다고 미 경제·비즈니스 매거진 패스트컴퍼니는 분석했다. AI에 곧바로 정답을 요구한 참가자(61%)의 정답률은 가장 크게 떨어진 반면, 힌트만 얻은 참가자는 비슷한 성적을 유지했다. 독해력을 측정한 후속 실험도 마찬가지다. 정답 자체를 받아 적은 사람일수록 도구 없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워했다.
이들 연구는 AI가 학습 과정의 인지적 노력을 얼마나 남겨두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데 주목한다. AI를 무조건 금지 또는 허용하는 게 아니라 '어느 단계에서 AI를 개입시킬 것인가'가 핵심이라는 얘기다.
교육학의 '생산적 고군분투(productive struggle)' 개념이 다시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틀리고, 다시 시도하고, 질문하면서 스스로 해결책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가 학습이라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연구진도 생성형 AI 시대에 학생들이 과제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AI에 질문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생산적 고군분투'를 건너뛸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드는 불편과 실패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실력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테크 프리' 실험, 결과는?

대학들의 대응은 엇갈린다. 오하이오주립대는 2029년 졸업생부터 모든 학부생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AI를 책임감 있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각 단과대학별 'AI 플루언시' 로드맵을 마련했다. 약 5만3,000명의 학부생이 대상이다. AI를 적극적으로 교육 과정에 넣으려 하는 것이다.
반대편에서는 AI를 차단하는 실험이 시작됐다. 미 대학 내 표현의 자유와 열린 토론을 표방하는 비영리단체 열린담론연합의 공동 창립자 찰스 미첼은 16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에서 자신이 벅넬대에서 강의 첫날 제시하는 '기술기기 절대 금지(테크 프리)' 규칙을 소개했다. AI뿐 아니라 노트북도, 휴대폰도 쓸 수 없다. 대신 그는 학생들에게 가죽 노트를 나눠 주고 모든 과제를 그 안에서 하게 했다.
미첼은 '테크 프리' 강의실에 들어선 학생들의 심정을 "골초들이 모인 방에서 당장 금연을 통보하는 상황"에 빗대면서도, 학생들은 머지않아 '깊은 이해의 추구'와 '담론'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다. 화면을 스크롤하는 대신 책을 읽고 자기 성찰을 손으로 적을 때 학생들은 진짜 아이디어와 씨름하기 시작하고, AI 대신 교수와 소크라테스식 문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몰래 휴대폰을 들고 오는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판적 사고와 수사적 자신감, 반대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초·중등 교육은 더 직접적인 대응에 나서고 있다. 뉴욕시는 2026~2027학년도부터 유아부터 8학년(중학생)까지 약 60만 명을 대상으로 학생용 생성형 AI 사용을 1년간 중단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승인된 프로그램을 제한적으로만 허용하기로 했다. 두 번째로 큰 로스앤젤레스(LA) 통합교육구도 안전장치를 검토하는 동안 학생들의 생성형 AI 접근을 제한했다.

분야별 차이도 있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로스쿨도 올해 여름부터 학점이 걸린 과제의 구상·개요·작성·수정·편집에 AI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다만 교수는 수업 목적에 따라 예외를 둘 수 있다. 'AI를 배제하느냐'가 아니라 '학생 자신의 사고력을 먼저 갖추게 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날 샌타클래라대 로스쿨 건물 앞에서 만난 졸업반 학생 크리스는 "수백 쪽 분량의 판결문이나 논문, 전문서적을 요약할 때 AI를 주로 사용한다"며 "개인적 견해를 묻거나 정치적 문제에 대한 민감한 답변을 내야 하는 과제를 할 때 괜히 AI가 쓴 엉뚱한 답변을 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시카고대 로스쿨도 1학년 필수 과목에서 노트북·태블릿·휴대폰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대면 시험을 시행하면서도 법률 리서치·라이팅 과목에서는 AI를 활용하고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교육을 병행한다.
MIT 보고서의 처방도 'AI 사용금지'가 아니다. 아니타 사르마 오리건주립대 컴퓨터공학 교수는 NYT에 "어차피 학생들은 AI를 쓸 것"이라며 "문제는 책임 있게 쓰는 법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AI 시대, 대학 교육의 현실적인 타협점인 셈이다.
샌타클래라= 박지연 특파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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