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내전 아닌, 김일성 남침야욕·中의 적극적 지원과 개입·스탈린 이이제이 계략 등이 투합된 국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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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정치와 6・25전쟁'은 좌우대립의 해방 정국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에 관해 연구한 뒤, 강대국정치 관점에서 6・25전쟁에 대해 재조명한 논쟁적 책이다.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저자 배정호 GK전략연구원장은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구상 제의에 대해 수차례 거부하다가 왜 승인했을까?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약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의 발발은 가능했을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김일성의 6・25전쟁 준비를 지원했는가?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해방 정국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에 관해 연구한 뒤,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구상 제의에 대해 수차례 거부하다가 왜 승인했을지에 대해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약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의 발발은 가능했을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김일성의 6・25전쟁 준비를 지원하였는가? 등의 문제제기를 했다.
강대국정치의 관점에서 6・25전쟁의 발발에 대해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거부하던 스탈린이 승인을 하게 된 전략적 계산 및 이이제이의 계락, 항미원조와는 달리 초기 단계부터 개입한 마오쩌둥의 전락적 계산과 조선족 부대의 북한군 편입 등에 역점을 두고 분석,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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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호 지음/법문사 펴냄

‘강대국정치와 6・25전쟁’은 좌우대립의 해방 정국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에 관해 연구한 뒤, 강대국정치 관점에서 6・25전쟁에 대해 재조명한 논쟁적 책이다.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저자 배정호 GK전략연구원장은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구상 제의에 대해 수차례 거부하다가 왜 승인했을까?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약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의 발발은 가능했을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김일성의 6・25전쟁 준비를 지원했는가? 등의 문제를 제기한다.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거부하던 스탈린이 승인을 하게 된 전략적 계산 및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계략, 항미원조와는 달리 초기 단계부터 개입한 마오쩌둥의 전락적 계산, 조선족 부대의 북한군 편입과 중국군의 참전 등에 역점을 두고 분석을 시도한다.
책은 6・25전쟁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과 사회적 모순, 남북한간 이념적 대립이나 국지전 충돌 등에 의해 확전된 내전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 야욕, 중국의 적극적 지원과 개입, 스탈린의 전략적 계산과 이이제이 계략 등이 투합(投合)된 국제전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6・25전쟁의 전반적 전개를 기술하면서, 낙동강방어선의 전략적 중요성과 미국의 ‘뉴 코리아 플랜’, 대규모 중국군의 참전에 따른 새로운 전쟁으로 전환, 크리스마스 공세 실패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해임, 정전협상과 반공포로 석방 및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 확보 등을 분석했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세인 ‘8월 총공세’와 ‘9월 총공세’에서 경북 영천, 대구 등이 함락돼 낙동강방어선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질 경우, 대한민국을 포기하는 미국의 한국 정부 해외 이주계획 ‘뉴 코리아 플랜(New Korea Plan)’을 보면, 낙동강방어선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구국의 전선이었고, ‘8월 총공세’의 다부동전투와 ‘9월 총공세’의 영천전투는 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구국의 전투라는 분석이다.
저자는 6・25전쟁의 영향과 관련, 냉전의 심화와 미국의 대공산권 봉쇄정책의 군사화, 미국의 대중국 고립화 정책, 중소간의 상호 불신과 중소동맹의 균열, 미일동맹의 강화 등 국제정치의 변화를 분석한다. 막대한 물적・인적 손실 및 민족적 자긍심의 상처 등 한반도와 한민족에게 미친 영향을 다뤘으며, 6・25전쟁의 책임론에 의한 남로당의 비극적인 몰락 등 북한의 권력정치에 미친 영향 등도 분석했다.
책은 6・25전쟁의 교훈에 관련,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공작과 위장 평화공세, 유엔군사령부의 전략적 가치와 존재의 중요성, 주한미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한미동맹의 결성, 선진 강대국(GK·Great power Korea)을 향한 국력의 증강 등에 대해 분석을 시도한다.
저자는 “6・25호국정신이야말로 ‘자유주의 수호 정신’이다”며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에 ‘자유주의 수호 정신’을 명기한다면, ‘6・25정신’을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25전쟁의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이후 73년의 세월이 흘렀다. 1950년대 국제사회의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세계 10대강국으로 발전했지만, 6・25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불안정한 평화의 정전상태로 분단되어 있으며 긴장과 도발의 불씨를 내재하고 있다.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한반도가 정전상태이지만 70여년 이상 평화를 유지해왔기에 6・25전쟁을 과거의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며 잊어가고 있다.
저자는 “6・25전쟁은 한민족에게 엄청난 피해와 상흔을 남긴 민족상잔이었지만, 전쟁의 기본적 성격든 국제전이었다”며 “김일성이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소련 스탈린의 배후 조종과 지원을 받아 도발한 국제전이었다”고 주장한다.
6・25전쟁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과 사회적 모순, 남북한간 이념적 대립이나 국지전 충돌 등에 의해 확전된 내전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 야욕, 중국의 적극적 지원과 개입, 스탈린의 전략적 계산과 이이제이 계략 등이 투합(投合)된 국제전이라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등 공산주의 국가들은 6・25전쟁을 내전으로 주장하며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주장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2001)에서 6・25전쟁에 관해 소위 ‘옐친문서’라고 불리는 300여종의 소련의 극비문서를 기반으로 친북 성향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내전설 등의 수정주의는 허구였다고 적시한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캐스린 웨더스비 교수도 1990년대 초에 기밀 해제된 구소련 문서보관소의 6・25전쟁 관련 문서들을 발굴·분석한 뒤 6・25전쟁은 소련, 중국이 정교하게 기획한 국제전이었다고 주장하며 6・25전쟁을 내전으로 파악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홍콩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쑤이 박사의 지적처럼,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마오쩌둥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약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의 발발은 가능했을까라는 문제 제기를 한 사례가 소개된다.
저자는 해방 정국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에 관해 연구한 뒤, 6・25전쟁의 발발과 관련,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구상 제의에 대해 수차례 거부하다가 왜 승인했을지에 대해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 동조와 지원 약속이 없었다면, 6・25전쟁의 발발은 가능했을까? 마오쩌둥은 어떻게 김일성의 6・25전쟁 준비를 지원하였는가? 등의 문제제기를 했다.
강대국정치의 관점에서 6・25전쟁의 발발에 대해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거부하던 스탈린이 승인을 하게 된 전략적 계산 및 이이제이의 계락, 항미원조와는 달리 초기 단계부터 개입한 마오쩌둥의 전락적 계산과 조선족 부대의 북한군 편입 등에 역점을 두고 분석, 재조명한다.
스탈린은 대한민국의 공산화에는 야욕이 있었지만, 38선 분할에 관한 미소간의 협약,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무력 충돌에 부담감 등으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수차례 거절했다. 그런데, 1949년 12월 하순,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이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미국 지상군이 참전시 소련 대신 중국이 참전한다고 약조하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승낙했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남침 구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면 6・25전쟁은 발발하였을까와 관련해 저자는 “북한의 전면적 기습 남침은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남침이 연기됐거나,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게릴라전으로 전개됐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어 “김일성의 남침 구상에 관한 스탈린의 승낙에는 동아시아대륙의 공산주의 신흥 강국 중국을 견제하려는 스탈린의 계략도 내재돼 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무력충돌을 할 경우, 미국과 중국은 군사력을 포함한 국력이 소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이이제이 계략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반도를 떠난 미군이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해도 다시 개입할 가능성은 매우 낮게 전망했다. 마오쩌둥은 미국은 지상군 파병대신 일본군을 용병으로 파병할 수 있고, 약 6만〜7만명의 일본군 파병을 예상했다. 마오쩌둥은 일본군이 재무장해 용병으로 파병될 경우, 중공군이 충분이 격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쟁의 참전 댓가로 소련의 현대식 무기 지원, 대만 침공시 소련의 해공군력의 지원, UN에서 대만의 축출과 중공의 회원국 가입 등을 전략적으로 계산하며 6·25전쟁의 기획단계부터 김일성의 남침구상에 동조히고, 협력했다.
마오쩌둥은 이와 같은 전략적 계산에 따라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중공군의 팔로군에 소속된 조선족 부대를 북한군으로 편입, 편성되도록 했다. 중공군에서 북한군에 편입, 편성된 병력은 약 6만3000명이다. 이는 북한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총병력 규모는 약 240만명이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진격했고,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을 한다는 계획아래 막강한 전투력으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1950년 7월 말경, 북한군에 의해 호남지역이 모두 점령당하고, 경북 중북부지역과 경남 서부지역이 점령당하면서, 북한군은 한반도의 90%를 점령헸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전투를 펼쳤다.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북한군에 의해 공산화 통일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국도 대한민국을 포기하게 된다. 미국은 낙동강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정부 요인, 군대, 경찰 등 주요 한국인들을 남태평양의 미국령 서사모아(WesternSamoa)로 이주시켜 망명정부를 세운다는 뉴 코리아 플랜(New Korea Plan)을 구상, 수립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선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구국의 전선이었던 셈이다.
북한군의 대규모 공세인 ‘8월 총공세’와 ‘9월 총공세’에서 영천, 대구 등이 함락돼 낙동강방어선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질 경우, 대한민국을 포기하는 미국의 한국 정부 해외 이주계획 뉴 코리아 플랜(New Korea Plan)을 보면, 낙동강방어선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구국의 전선이었고, ‘8월 총공세’의 다부동전투와 ‘9월 총공세’의 영천전투는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구국의 전투였다.
김일성의 남침에 대해 적극적으로 동조한 마오쩌둥은 중국 동북군구(東北軍區)의 팔로군에 소속된 조선족 부대를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중국군에서 북한군에 편입・편성된 조선족 병력은 약 6만 3000명이었다. 북한군 4개 사단, 북한군 총병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국공내전과 항일전선에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 부대는 북한군의 정예부대가 된다.
저자는 “중국의 수뇌부는 사전에 미군 등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간파했다”며 “하지만 유엔군을 한반도 북부산악지대로 유인한 후에 중국군을 투입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미국군 등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해 평양에 입성할 시쯤에 중국군을 한반도로 진입시켰다”고 주장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약 240만 명 이상의 중국군이 6・25전쟁에 투입됐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1950년 11월 24일 감행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예상치 못했던 대규모 중공군의 반격으로 고전을 하게 되자, 미국 국방부 합동참모본부(JCS)에 보낸 전문(cable)을 통해 한국전쟁이 중국군의 참전으로 ‘완전히 새로운 전쟁(entirely new war)이 시작됐다’고 보고한다.
미국의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중국군의 대규모 참전과 공세에 대해 대항할 수 있었을까?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유엔군사령부는 북한, 중국 등의 끈질긴 해체 요구에도 불구하고, 1953년 7월에 체결된 정전협정의 관리 주체로서 현재까지 한반도의 평화와 정전체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유엔군사령부가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유엔군사령부는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도발은 물론, 중국 등 제3국의 도발을 억제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라고 했다.
저자는 “유엔군사령부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자산이므로, 한반도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의 체결이후에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반도에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대국들의 이해가 교차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지역에서 유엔군사령부는 존재 그 자체로도 전략적 가치가 높다”도 평가했다.
한국 국민들은 강대국정치가 전개되는 동아시아 국제전략환경에서 주한미군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미국의 남한에 대한 낮은 전략적 가치평가와 주한미군 철수, 미국 극동방위선인 애치선라인에서의 한국 배제 등을 고려해 남한에서 한번 떠난 미군은 북한의 남침이 있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판단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도발한 것은 주한 미군의 존재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참전 덕분에 북한의 남침과 중공군의 참전에 대응하며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체결 이후의 한국의 안보를 걱정하며 미국에게 휴전협정의 체결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주한미군의 증강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이승만대통령의 휴전협정을 담보로 한 한미동맹의 끈질긴 요구는 벼랑끝 전술 ‘반공포로 석방’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된다.
이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휴전직후인 1953년 8월 8일에 서울의 경무대에서 가조인된 후, 동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정식으로 체결된다. 이후, 한미동맹은 군사동맹인 동시에 가치동맹이며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하였고, 한국은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안전보장을 추구하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생존과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정충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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