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적통’ 자처한 李 정부, 대법관 인사는 ‘유신식’인가

김화랑 회사원·이학박사 2026. 9. 2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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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국회 임명동의안 제출을 거부하고 69년 만에 '대법관 재제청'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대법관 인사를 규정한 헌법 제104조 제2항(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에 호펠드 체계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

대통령이나 국회는 이 절차를 건너뛰고 자신들이 고른 인물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없다.

대통령의 대법관 후보자 임명 거부와 재제청 요구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고향은 다름 아닌 유신헌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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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민생 빠뜨린 이재명號, 위기에 빠지다] 제청은 대법원장이, 낙점은 대통령이?

● 69년 만의 ‘대법관 재제청’ 요구…권력분립 형해화
● 권력 통제 위해 임명·제청·지명·선출 구분한 헌법
● 대통령의 ‘임명권’…마음대로 고를 권한까지 있나
● 국무위원과 대법관, 같은 ‘제청’이어도 무게 달라
● 유신이 지운 “임명하여야”…거부의 근거로 삼나
● 헌법은 권력의 제동장치…제멋대로 해석 안 돼

이재명 대통령(오른쪽)이 6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에서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왼쪽은 조희대 대법원장. 뉴스1 
청와대가 국회 임명동의안 제출을 거부하고 69년 만에 '대법관 재제청'을 요구했다. 건국과 전쟁의 혼란을 막 벗어난 시절도 아니다. 헌정 질서가 완숙 단계에 접어들었어야 할 시점에, 인치(人治)가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조희대 대법원장이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의 서면 제청을 두고 충돌한 이번 사태는 단순 인사 갈등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번 사태는 헌법이 규정한 권력분립의 원칙을, 선출 권력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형해화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방증이다.

권력 통제 위해 임명·제청·지명·선출 구분한 헌법

대한민국 헌법은 공무원 및 국가기관의 구성원을 임명하는 방식을 하나로 뭉뚱그려 놓지 않았다. 각 기관의 성격에 따라 엄격한 문언적 차이를 두는 식으로 설계돼 있다. 예컨대 헌법 제78조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임면'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일반적 공무원 임면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권력의 무게가 무거운 자리일수록 절차는 한층 까다롭다. 국무총리(제86조)와 감사원장(제98조), 대법원장(제104조 제1항), 헌법재판소장(제111조 제4항)은 모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했다. 대통령의 선택이 대의기관의 통제를 거치도록 강제한 것이다.

이외에도 헌법에는 인사와 관련해 다양한 표현이 등장한다. 국무위원(제87조)과 행정각부 장관(제94조), 감사위원(제98조 제3항), 대법관(제104조 제2항)은 국무총리나 대법원장 등의 '제청'을 임명의 선결 요건으로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 마음대로 고를 수 없는 자리도 따로 정해 뒀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일부(제111조 제3항)는 국회의 '선출'이나 대법원장의 '지명'에 대해 대통령이 재량권 없이 임명하도록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제114조 제2항) 역시 대통령의 임명권을 일부(3명)에게만 인정했다.

이처럼 헌법은 '임명' '제청' '지명' '선출' 등의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 권력 집중을 막고 상호 견제를 유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가 드러내듯 권력의 이해관계 앞에서 다양한 용어로 세심하게 그은 법적 경계는 자의적 해석에 따라 무법지대로 변모하기 십상이다.

이번 사태를 보며 한 이름이 문득 떠올랐다. 웨슬리 뉴컴 호펠드. 그는 '권리'라는 용어가 가진 모호함을 묵과하지 않고, 법적 관계를 엄밀하게 체계화한 미국의 법학자다. 그가 정립한 네 쌍의 법적 관계는 다음과 같다. ①상대방에게 특정한 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 '청구권'과 그 요구에 응해야 하는 '의무'의 관계, ②상대의 제지 없이 어떤 행동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유'와 그에 대응해 상대방에게 이를 막을 청구권이 없는 '청구권의 부재'의 관계, ③법률관계를 직접 만들거나 변경할 수 있는 '권능'과 그로 인해 법적 지위가 변동되는 '법적 구속성'의 관계, ④타인의 간섭이나 권한 행사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는 '면제'와 상대방에게 이를 바꿀 권한이 아예 없는 '권능의 부재'의 관계다.

복잡해 보이지만, 각 쌍은 하나의 법적 관계를 양쪽에서 설명한 것이다. 전자(청구권·자유·권능·면제)가 한쪽의 법적 지위라면, 후자(의무, 청구권의 부재, 법적 구속성, 권능의 부재)는 그에 대응하는 상대방의 법적 지위다. 나아가 ①과 ②가 누가 무엇을 요구하거나 할 수 있는지를 규율하는 '1차적 권리'라면, ③과 ④는 그러한 법률관계를 만들고 바꿀 수 있는 힘과 그 한계를 다루는 '2차적 권리'다. 후자는 사법(私法)을 넘어 국가기관 간의 권한 배분을 다루는 공법(公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이번 사태의 핵심 쟁점 역시 이 권한의 배분 문제다.

물론 법제처나 헌법재판소가 매번 호펠드 체계에 사안을 대입해 가며 고민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헌법기관 간 권한 충돌을 엄밀하게 해부할 때 호펠드의 방법론으로 차용하는 실익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대법관 인사를 규정한 헌법 제104조 제2항(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에 호펠드 체계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 대법관 인사에 각 헌법기관의 권한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알 수 있는데, 이때 세 개의 권능이 작동한다.

먼저 대법원장의 '제청권'이다. 대법원장은 대법관 후보자를 정해 제청함으로써 임명 절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권능'을 갖는다. 대통령이나 국회는 이 절차를 건너뛰고 자신들이 고른 인물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없다. 즉 국회나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를 임의로 세울 수 없도록 차단하는 '면제'의 영역을 형성한다.

다음은 국회의 '동의권'이다. 국회는 제청된 후보자의 임명에 동의할지를 판단하며, 동의하지 않으면 해당 후보자를 임명할 수 없다. 국회 역시 후보자의 법적 지위를 좌우하는 '권능'을 쥐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은 대통령의 '임명권'이다. 최종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만 보면 인사의 결정권도 대통령에게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명권은 대법원장의 제청과 국회의 동의가 선행돼야만 비로소 행사할 수 있다. 호펠드식으로 말하면, 대통령은 대법원장의 제청이나 국회의 동의를 대체할 권한이 없다는 점에서 '권능의 부재' 상태에 놓인다. 이때 헌법이 후보자 제청과 동의의 권한을 다른 기관에 나눠 맡긴 취지를 고려할 때 대통령의 최종 임명은 그 결정을 완성하는 기속적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국무위원과 대법관, 같은 '제청'이어도 무게 달라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청와대가 내세우는 논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대통령에게는, 대법관에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골라 앉힐 독자적 인사권은 없지만, 대법원장의 제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다." 

문제는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인정해 주는 순간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더는 헌법적 권능이라 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거부권 행사가 한 번이라도 허용된다면, 그것이 무한한 반복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을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제청권은 대통령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만 작동하는 권한으로 전락하고, 대법관 인사권은 대통령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바꿀 권한은 없어도, 거부할 권한은 있다"는 모순적 주장은 사법부를 행정부의 완력으로 길들이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일각에서는 헌법 제87조가 규정한 국무위원 임명 절차를 근거로 반론을 제기한다. "국무총리가 제청한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해 대통령이 실질적인 거부권을 행사하듯,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후보자 역시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제청권을 동일선상에 놓는 주장은 권력분립 원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무위원의 임명은 행정부 내에서 이뤄지는 인사다. 당장 국무총리부터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행정부의 2인자다. 총리와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성과와 책임을 함께 나누는 정치적·행정적 운명 공동체다. 대통령이 총리의 인사에 개입하거나 가끔 제동을 거는 모양새를 연출하는 것은, 권력분립 원칙에 따른 상호 견제가 아니라 행정부 내부의 미묘한 정치적 긴장과 권력 역학을 조율하는 내부 통제 방식일 뿐이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은 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권력분립의 헌법 질서에 따라 행정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헌법기관인 사법부의 수장이, 사법 정의의 실현과 독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행사하는 고유의 헌법적 권한이기 때문이다. 행정부 수장이 정책 집행 파트너를 고르는 내부 메커니즘을 외부 독립기관인 사법부가 행사하는 제청에 그대로 투사하는 것은 논리적 파탄이자 허위 비유다. 사법부의 영역에 행정부 통치 논리가 무단 침범하는 부당한 월경(越境)이며, 헌법이 규정한 견제와 균형의 전제를 허물어뜨리는 행위다.

유신이 지운 "임명하여야"…거부의 근거로 삼나

사법부를 겨냥한 청와대의 횡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실소마저 나온다. 대통령의 대법관 후보자 임명 거부와 재제청 요구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고향은 다름 아닌 유신헌법이기 때문이다.

대법원판사인 법관은 대법원장이 법관추천회의의 동의를 얻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경우에 제청이 있으면 대통령은 이를 임명하여야 한다.

-제3공화국 헌법 제99조 제2항-

대법원장이 아닌 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한다.

–제4공화국 헌법(유신헌법) 제103조 제2항-

제3공화국 헌법은 사법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대법관(당시 대법원판사) 인사에 있어 대법원장의 제청에 따른 대통령의 임명 권한이 기속행위임을, "임명하여야 한다"는 표현을 통해 명문(明文)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1972년 유신헌법은 법관추천회의를 전면 해체하고, "임명한다"로 문구를 의도적으로 변경했다.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 인사를 통섭하기 위해서였다. 유신체제를 두고 당시의 국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든, 장기 집권을 위한 설계였다고 여기든, 그 평가가 엇갈릴 수는 있다.

진정으로 비판해야 할 지점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경제·문화적 선진 대열에 합류했고, 제도적 민주화가 공고하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의 적통'을 자처해 온 세력이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과거의 흠결을 알뜰히 소환하고 있다. "헌법상 표현이 '임명하여야 한다'가 아닌 '임명한다'이니, 대통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은, 사법부를 입맛대로 길들이기 위해 옛 권위주의 체제가 만든 틈새를 당당히 악용하겠다는 뻔뻔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손으로는 유신체제를 살뜰히 복사해 사용하는 '내로남불' 그 자체다. 권력을 위해 법치주의의 둑을 허무는 작금의 행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마주한 참담한 정치의 퇴행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균택, 김승원 의원과 손솔 진보당 의원(왼쪽부터)이 8월 19일 서울 여의도 법사위 회의실 앞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후보 임명 제청과 관련해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 1
군주국에서 왕위가 절대 권력의 원천이었다면, 법치를 중시하는 공화국에서는 헌법이 그 권좌를 대신한다. 헌법은 권력의 근거인 동시에 그 한계를 긋는 최고 규범이기 때문이다. 헌법 문언이 권력자가 자신의 필요나 이해득실에 따라 입맛대로 재단하고 변형하는 임시방편이어서야 되겠는가. 헌법은 권력이 그 경계를 넘어 폭주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부딪치는 제동장치여야만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신체제가 남긴 헌법의 공백을 자의적 재량을 확보하는 도구로 합리화하고 있다. 헌법 해석을 핑계 삼아 사법부를 제멋대로 주무르려 드는 행태는, 헌법의 구속력을 거부하고 삼권분립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것이 대통령이 그토록 비판해 온 '내란'에 준하는 폭거라고 한다면 과도한 비판일까. 

김화랑 회사원·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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