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최영은 기자 2026. 9. 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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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흐엉 도딘 2인전 개최
비움의 묘법과 채움의 안료 결합
동서양 거장 도달한 회화적 경지
한·불 수교 140주년 기념 전시
박서보 미술관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문을 열었다. /최영은 기자

박서보 미술관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문을 열었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은 한국 단색화의 거장 고(故) 박서보(1931-2023년) 화백과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1945년-) 작가의 작품을 함께 선보이는 2인전이다.

두 작가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다른 문화권에서 자랐으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마치 같은 지점을 향해 걸어온 두 거장이 결국 교차점에서 만난 듯하다. 이들이 걸어온 창작의 길은 반대 방향이었다.

비움의 미학으로 도달한 박서보의 묘법

박 화백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배제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는 화면 안에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기보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 내는 데 집중했다.
한지 위에 끝없이 선을 긋는 과정인 한번·두번·백번·천번의 반복 행위는 그의 묘법(Ecriture) 연작의 정수다. /최영은 기자

한지 위에 끝없이 선을 긋는 과정인 한번·두번·백번·천번의 반복 행위는 그의 묘법(Ecriture) 연작의 정수다. 마음속 잡념을 하나씩 덜어 내듯 선을 그어 나간 셈이다. 생전 박 화백은 자신의 예술 정신이 세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고 밝혔다.

첫 번째는 행위의 무목적성이다. 이는 어떤 의도나 형상을 염두에 두지 않고 화면을 채워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창작과 달리 특정 구도나 의도를 배제한 채 손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을 그었다.  박 화백은 생전에 말했다. "생각을 안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고.

두 번째는 행위의 반복성이다. 동일한 동작을 수십년 동안 반복하며 명상하듯 작업에 임했다. 이 반복을 통해 조형적 요소를 더하기보다 마음을 점차 비워 냈다. 박 화백은 생전 "생각을 안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고도 말했다.

세 번째는 행위·물성·정신의 합일이다. 손의 움직임과 한지의 질감, 텅 빈 마음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지를 뜻한다. 이 순간 그림은 화가의 정신 그 자체로 변모한다.

안료 겹겹이 쌓아 올린 흐엉 도딘의 채움
흐엉 도딘의 작업 방식은 정반대다. 그는 광물 안료를 한 겹씩 수십 겹 겹쳐 올려 나간다. 색채를 계속 더해 나가면서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명료함이다. /최영은 기자

흐엉 도딘의 작업 방식은 정반대다. 그는 광물 안료를 한 겹씩 수십 겹 겹쳐 올려 나간다. 색채를 계속 더해 나가면서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명료함이다.

흐엉 도딘 작가는 "모든 것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싶었다"며 "명료함에는 놀라운 힘이 있고 충만함을 느끼게 해 준다"고 전했다. 색채의 층을 자꾸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색이 하나의 빛으로 수렴한다. 프리즘을 통과한 광선이 정제되는 원리와 같다.

그는 이른 아침 절제된 빛 속에서만 작업에 매진한다. 빛이 맑고 조용해 사색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서다. 안료 역시 직접 수집하고 조색한다. 흐엉 도딘은 "오롯이 자신만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내야 작품에 깊이가 깃든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창작은 고통스러운 여정이다. 멀리 보이는 빛에 도달하려면 고통이 따른다며 안료 층마다 고찰의 시간을 담아냈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

박 화백의 선 작업이 불필요한 요소를 지워 내는 소거의 미학이라면 흐엉 도딘 작가의 색채 층은 모든 요소를 하나로 모으는 응축의 미학이다. 방법론은 대립하지만 두 거장은 동일한 조형적 깨달음에 다다른다.

박 화백은 정신적 공백을 화면에 물질화된 형태로 구현했고 흐엉 도딘 작가는 물질을 극단까지 추구해 영적 투명성을 이끌어 냈다. 비움으로 시작해 충만에 이른 박 화백과 채움으로 시작해 명료함에 도달한 흐엉 도딘 작가의 시도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층별 공간 구성 따라가며 읽기

전시 공간은 총 3개 층으로 구성됐다. 지하 2층 전시실(SPACE 0)에는 두 작가의 1990년대 작품이 함께 내걸렸다. 구체적 형상이 없는 추상화임에도 안개·흙·물·바람 등 자연의 서정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지상 2층 전시실(SPACE 2)은 박 화백의 조형적 변화를 조명한다. 단색조 작업에서 벗어나 채색을 도입한 계기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 시대적 슬픔을 자연의 색채로 치유하고자 했던 예술적 전환을 보여 준다. /최영은 기자

지상 2층 전시실(SPACE 2)은 박 화백의 조형적 변화를 조명한다. 단색조 작업에서 벗어나 채색을 도입한 계기와 어머니에 대한 추억, 시대적 슬픔을 자연의 색채로 치유하고자 했던 예술적 전환을 보여 준다.

최상층 전시실(SPACE 3)에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대표작들이 배치돼 빛과 물질이 자아내는 고요한 아우라를 선사한다.

거장이 남긴 서명 없는 마지막 유작
<묘법 No.230127>·<묘법 No.230128>·<묘법 No.230129> /최영은 기자

SPACE 3에 들어서는 순간 호흡이 변한다. 세로 3.3m·가로 1.92m 크기의 흰 캔버스 3장이 8m 높이의 벽면에 나란히 서 있다. 작품명은 <묘법 No.230127>·<묘법 No.230128>·<묘법 No.230129>다. 박 화백이 지난 2023년 작고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려 낸 유작들이다.

세 점의 유작에는 작가의 서명이 빠져 있다. 박 화백은 생전 자신의 미술관이 건립되면 이 작품들을 함께 전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관은 완공됐으나 화백은 개관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끝내 화면 위에 서명을 남기지 못했다.

화폭을 가득 채운 백색 화면은 비움의 본질을 이야기 한다. 완성되지 않은 상태 그 자체가 박 화백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인 셈이다. 작품은 완성했으나 서명을 완성할 수 없었던 거장의 마지막 순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이 됐다. 

동양과 서양 다른 길 위에서 만나다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최영은 기자

한국과 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이 2인전은 국제 교류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동양에서 태어나 서양에서 활동해 온 두 거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캔버스에 접근했지만 동일한 조형적 깨달음에 도달했다.

회화의 극단에 서면 출발점의 차이는 의미를 잃는다. 박서보와 흐엉 도딘은 각자의 영역에서 미학의 한계에 부딪히며 문화적 구분, 재료의 차이, 작업 방식의 격차를 극복해 냈다. 그들이 공유하는 유일한 언어가 있다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었다.

박서보는 선을 그으며 마음을 비웠다. 흐엉 도딘은 색을 더하며 마음을 비웠다. 결국 둘 다 같은 행위를 반복한 것이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는 행위. 방법은 달랐지만 목표는 동일했다. 그 깊이에의 행위 앞에서 문화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누구든 박서보 미술관에 서서 비운 마음으로 두 화백의 작품을 마주할 때, 깨달음은 몸과 영혼으로 전해진다. 예술의 언어란 결국 이것일지도 모른다. 수십 년의 손가락이 한지 위에 남긴 것, 수십 겹의 안료가 만든 색 속에서 어느 순간 떠오르는 느낌.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감각과 감정 사이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순간 말이다.

☞묘법=박서보 화백의 대표 연작(Ecriture)으로, 한지 위에 선을 끝없이 반복해서 긋거나 다채로운 결을 만들어 비움과 수행의 정신을 구현한 한국 단색화의 정수다.

☞단색화=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추상화 경향으로 한지와 안료 등 재료의 물성을 극대화하고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정신성을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경제신문 최영은 기자
ourcye@seoulmedia.co.kr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또는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