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감춘 정호용의 마지막 길…침묵으로 끝난 ‘신군부 5인’의 씁쓸한 퇴장

이태준·변문우 기자 2026. 9. 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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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전광판과 이름 없는 국화꽃 사진.

그의 죽음으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목한 '신군부 핵심 5인'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 전 장관은 신군부 핵심 5인 가운데 유일하게 진상조사위의 대면 조사에 응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5·18서울기념사업회는 정 전 장관 사망 이후 낸 입장문에서 "신군부 핵심 인물들이 결국 누구도 5·18의 진실을 고백하거나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며 "집단발포 명령자를 비롯한 핵심적 진실은 46년째 묻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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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도 영정도 없었던 빈소…세상 시선 피해 ‘조용한 장례’
전두환부터 끝내 닫힌 입…46년째 묻힌 광주 집단발포의 진실 

(시사저널=이태준·변문우 기자)

텅 빈 전광판과 이름 없는 국화꽃 사진. 9월13일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 35호실은 고인의 신원을 알리지 않은 채 치러진 '숨겨진 빈소'였다. 철저히 외부 시선을 차단한 빈소 내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의 영정과 위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향년 94세. 내무부·국방부 장관을 지내고 두 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인물의 마지막 길은 적막했다. 외부 조문객과 조화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목한 '신군부 핵심 5인'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사자들은 떠났지만, 1980년 5월이 남긴 뼈아픈 질문은 여전히 제자리다. 누가 시민을 향한 집단발포를 명령했는가. 그리고 그 명령은 어떤 경로로 현장에 하달되었는가. 신군부를 향한 사법적 단죄는 이뤄졌어도, 발포의 구체적 지휘체계를 밝혀줄 그들의 고백은 끝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호용 전 국방장관의 빈소 사진 ⓒ연합뉴스

끝내 열리지 않은 '마지막 생존자'의 입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의 장례는 시사저널의 단독 보도로 사망 소식이 알려진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서둘러 마무리됐다(9월13일자 참조). 유족은 9월14일 오전으로 예정됐던 발인을 새벽 5시쯤으로 앞당겼다. 

정 전 장관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다. 12·12 군사반란 직후 특전사령관에 임명됐고, 이듬해 광주에 투입된 3·7·11 공수여단을 관할했다.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내무부·국방부 장관을 거치며 신군부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는 생전 자신에게 5·18 진압 작전의 지휘권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계엄군의 공식 작전지휘계통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5·18 기간에 최소 네 차례 광주를 방문한 사실과 공수부대 운용에 관여한 정황이 확인됐다. 공식 지휘계통 밖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정 전 장관을 둘러싼 핵심 쟁점이었다.

대법원도 정 전 장관의 책임을 인정했다. 1997년 대법원은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해 시민군을 진압한 '상무충정작전'을 지원한 사실 등을 인정해 징역 7년을 확정했다. 정 전 장관은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됐지만, 이후에도 작전지휘권이 없었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2021년 2월 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진정서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면서 "전 전 대통령이 사과를 하고 화해를 해 국민 통합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측근들과 함께 전 전 대통령에게 사과를 건의했다고 밝혔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대신, 전 전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한 것이다.

한때는 증언에 대한 기대도 있었다. 정 전 장관은 신군부 핵심 5인 가운데 유일하게 진상조사위의 대면 조사에 응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특전사령관이 알고 있던 공수부대 운용 과정과 비공식 지휘체계, 전남도청 진압 작전의 의사결정 구조를 확인할 기회였다.

그러나 이후 미국으로 출국했고, 조사위 활동이 끝날 때까지 대면 조사는 성사되지 않았다. 발포 명령과 현장 지휘 관계를 풀 결정적인 증언도 남기지 않았다. 조사위는 2024년 정 전 장관을 내란목적살인 혐의 등으로 고발했지만, 그의 사망으로 직접 진술을 확보할 길은 닫혔다.

정 전 장관의 옛 측근인 김충립 전 특전사 보안반장은 시사저널에 "진상조사위 활동이 끝나기 전까지 정 전 장관과 5·18 진실 규명 작업을 같이 추진해 왔는데 결국 여러 이유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며 "마지막에는 진실 규명과 관련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 속에서 투병하다 떠났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기다린 것은 책임자의 설명과 사과였다. 고재대 5·18기념재단 사무처장은 "5·18 책임자이자 옛 전남도청 진입 작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 전 사령관이 사죄 없이 떠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며 "수십 년간 진정성 있는 참회를 기다려온 오월 영령과 유가족, 부상자들의 가슴에 또 한 번 상처가 남게 됐다"고 밝혔다. 양재혁 5·18유족회 회장은 "살아있을 때 양심선언이나 고백을 했다면 진실을 밝히고 용서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극정 5·18부상자회 회장도 "최소한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는 남겼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왼쪽부터)전두환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황영시 전 육군참모차장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당사자 숨고 유족이 나선 '반쪽 사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생애 마지막까지 5·18을 둘러싼 법정 공방의 당사자였다. 자신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20년 11월 광주지법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건강과 기억력 문제를 호소하던 그의 모습은 법정 밖의 행보와 대비됐다. 재판 출석을 피하면서도 골프를 치는 모습이 공개돼 비판을 받았다. 전 전 대통령은 2021년 11월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숨질 때까지 12·12와 5·18에 관해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는 장례식에서 부인 이순자씨의 입을 통해 나왔다. 이씨는 "남편의 재임 중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깊이 사죄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임 중'이라는 표현이 다시 논란을 불렀다. 12·12 군사반란과 5·18은 전 전 대통령의 취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작 두 사건에 대한 사과는 빠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뒤따랐다.

장지 마련도 순탄하지 않았다. 유족은 전 전 대통령의 생전 뜻이라며 북한 땅이 보이는 곳에 유해를 안장하려 했다. 2023년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사유지를 장지로 삼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지역사회 반발과 토지 소유자의 매각 철회로 무산됐다. 사망 4년 후인 2025년에도 유골은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족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21년 10월26일 숨진 뒤, 유족은 그가 생전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부족한 점과 과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밝혔다. 아들 노재헌씨는 부친이 5·18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과 과오도 함께 용서받기를 바랐다고 설명했다.

노씨는 부친이 생존해 있던 2019년부터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했다. 당시 방명록에는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다'고 적었다. 2025년에는 모친 김옥숙 여사와 함께 묘지를 찾아 다시 사과했다.

유족이 사과의 뜻을 전하고 참배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전두환 측과는 차이가 있었다. 다만 가족을 통한 사과가 당사자의 구체적인 책임 인정과 진상 고백을 대신하지는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11년 펴낸 회고록에는 광주의 비극을 유언비어 탓으로 돌리는 취지의 내용이 남아 있었다. 해당 내용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정되지 않았다. 신군부 내부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고 발포와 진압 작전이 어떻게 결정됐는지에 대한 답도 나오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화 당시 현장 모습 ⓒ연합뉴스

안갯속에 갇힌 '발포 명령'

황영시와 이희성의 죽음은 뒤늦게 알려졌다. 황영시 전 육군참모총장은 2022년 4월23일 숨졌지만 사망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흘 후였다.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은 같은 해 6월6일 숨졌고, 8일 발인까지 끝난 뒤인 10일에야 사망 사실이 언론에 알려졌다.

황 전 총장은 12·12 당시 1군단장으로 신군부에 가담했다. 5·18 당시에는 육군참모차장이었고,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감사원장을 지냈다. 수사 과정에서는 그가 강경 진압과 관련한 지시를 내렸다는 진술도 나왔다. 대법원은 1997년 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징역 8년을 확정했다. 그러나 황 전 총장은 생전 공개적으로 사과하거나 발포 지휘체계를 밝히지 않았다.

이 전 총장은 계엄군의 공식 지휘체계 정점에 있던 인물이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강제 연행된 뒤 그 자리에 올랐다. 1980년 5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전국 비상계엄 확대와 계엄군 투입의 지휘선상에 있었다. 1997년 징역 7년이 확정된 뒤에도 이 전 총장은 책임을 부인했다. 자신이 계엄사령관이라고 해서 모든 일을 주도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주장을 폈고, 발포를 명령한 지휘관은 없었다고도 했다. 계엄사령관의 설명에서도 명령의 주체와 전달 경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다섯 사람이 법정에서 인정받은 책임의 범위는 같지 않았다. 이들은 1997년 12·12와 5·18 관련 사건 재판에서 각자의 가담 행위에 따라 유죄를 확정받았다. 그러나 형사책임을 묻는 일과 개별 발포의 명령 과정을 규명하는 일 사이에는 간극이 남았다. 신군부 지휘부에 대한 처벌이 곧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를 확인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가 차원의 후속 조사도 이 간극을 모두 메우지는 못했다. 5·18진상조사위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진압 작전에 개입했고, 전두환이 실질적인 결정권자로 관여했다고 볼 정황을 확보했다. 하지만 집단발포를 구체적으로 명령한 인물을 특정할 기록이나 문서, 직접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조사위 전원위원회는 해당 조사 과제에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는 발포 명령이 없었다는 판단이 아니라, 조사 기간 안에 명령의 주체와 전달 경로를 충분히 밝혀내지 못했다는 의미다. 조사위는 2000명이 넘는 계엄군 관계자와 다수의 피해자·목격자를 조사하고 기록을 수집했지만, 집단발포의 최종 명령권자를 특정하지 못한 채 2024년 활동을 마쳤다.

정 전 장관 사망 이후 5·18 관련 단체들은 진상 규명과 함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용만 5·18서울기념사업회 전 상임이사는 "이들의 본질은 결국 정치적 야욕에 사로잡힌 정치군인이었다"며 "이들이 부와 권력을 누렸던 것은 12·12 쿠데타에서 5·18로 이어지는 국민 학살과 권력 찬탈로 이뤄진 만큼 그 재산을 환수해 피해자들과 국민에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5·18서울기념사업회는 정 전 장관 사망 이후 낸 입장문에서 "신군부 핵심 인물들이 결국 누구도 5·18의 진실을 고백하거나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며 "집단발포 명령자를 비롯한 핵심적 진실은 46년째 묻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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