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최저·비용 최고… MLCC, 전자제품 '2차 원가 쇼크' 불러오나
삼성전기·타이요유덴 등 기존 MLCC 제작사도 가격 인상 중… MLCC발 전자제품 가격 인상 오나
세계 최대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제조사인 일본 무라타제작소가 일부 제품 라인업 정리에 나섰다. 당장 생산을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범용 제품을 접고 수요가 몰리는 고부가 AI(인공지능)용 MLCC로 생산능력을 옮기는 세대 전환이다.
문제는 범용 MLCC가 전자제품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산업을 가리지 않고 들어간다는 점이다. 메모리플레이션에 이어 또 한 번의 가격 급등이 우려되는 이유다.

시계는 이미 가고 있다. 고객사의 단종 승인 회신 기한은 2027년 12월 31일로, 이때까지 별도 회신이 없으면 승인한 것으로 간주된다. 최종 주문 마감일은 2028년 3월 31일, 최종 출하일은 2029년 3월 31일이다.
무라타는 지속 공급이 필요한 고객에게 남은 수명 주기 동안 필요한 수량을 조기에 확보하라고 안내하면서, 이번 조치가 해당 제품군의 완전한 철수가 아니라 구형·범용 제품과 이미 교체가 예정된 품목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밝혔다.

무라타가 정리하는 GRM·GRJ·GXM 등은 범용 표준 MLCC다. 가전과 산업기기, 일부 인포테인먼트에 들어가는 대표 제품으로, 회로 안에서 특정 집적회로(IC)의 전원핀 옆이나 전원 라인 곳곳에 자리 잡아 전압이 튀는 것을 막는다. 없으면 회로 자체가 오작동하는 기초 부품이다.
구체적으로는 디커플링·바이패스, 교류 전원을 정류한 뒤 직류 전압을 다듬는 전원 평활화, 전자파간섭(EMI)·신호 필터링을 담당한다.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나 CPU 주변에서 생기는 고주파 잡음을 잡고 PMIC(전력관리반도체)와 부하 사이의 전류 변화를 다듬어 안정적인 전압을 공급한다.
TV와 냉장고, 에어컨 같은 가전에서는 메인 컨트롤 보드의 잡음 억제와 전압 안정화를 맡고, 산업기기에서는 모터 제어 보드와 센서 인터페이스 회로에서 동작 신뢰성을 좌우한다. 전원 라인의 미세한 전압 흔들림을 잡아 오작동이나 메인보드 고장을 줄이는 역할이다.
기초 MLCC를 정리하는 배경에는 수익성 격차가 있다. 증권가는 AI 서버용 MLCC의 영업이익률을 30% 이상으로 추정한다. 범용 제품의 8%보다 22%포인트 이상 높아, 같은 매출을 올려도 영업이익은 약 3.8배에 달한다. 한정된 생산능력을 어디에 쓸지는 계산이 끝난 셈이다.

수급 지표도 이를 뒷받침한다. UBS 에비던스랩에 따르면 지난달 9일 기준 글로벌 MLCC 유통업체 재고는 4주 전보다 8% 줄어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유통 단가 지수는 7% 올랐다. 재고는 마르고 값은 오르는 전형적인 공급자 우위 시장이다. 트렌드포스 집계로 6월 말 수주출하비율(BB율)은 무라타 1.30, 삼성전기 1.31, 타이요유덴 1.25로 코로나19 이후 최고였다. BB율이 1을 넘으면 출하보다 신규 주문이 많다는 뜻이다.

자동차 쪽 파장은 더 무겁다. 이미 인증을 마친 부품을 다른 제품으로 바꾸려면 긴 시간과 비용이 들고, 특히 안전·구동계 회로는 신뢰성 검증 부담이 크다. GXT와 GCM, GCJ, GCG 등 전장용 시리즈가 단종 대상에 포함된 것이 완성차 업체에 뼈아픈 이유다. 이 가운데 GCM과 GCJ, GCG는 구동계와 안전 시스템까지 아우르는 제품이어서 대체품 수급이 급하다.
완성차는 ABS와 에어백, 구동 인버터 등 부품과 기능이 많고 인증 절차도 그만큼 복잡하다. MLCC 역시 온도 사이클과 고온고습 바이어스, 진동, 기계 충격 등 추가 검증을 거쳐야 한다.

수요는 오히려 늘고 있다. 완성차 업체들이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을 지향하면서 고신뢰·고사양 MLCC의 중요도가 커졌다. 현대차그룹이 2027년형 아반떼와 그랜저에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플레오스 커넥트'를 적용하는 등 SDV를 구동하는 컴퓨팅·전원·통신 하드웨어가 고도화되고 있어서다.
중앙 컴퓨팅 전자제어장치(ECU)와 고성능컴퓨팅(HPC) 성능이 올라갈수록 고성능 SoC(시스템온칩)과 메모리, PMIC가 순간적으로 큰 전류를 요구해 MLCC가 더 필요해진다. ADAS(운전자보조시스템) 센서와 연산이 늘어날수록 카메라·레이더·라이다·센서융합 ECU·AI 가속기의 전원 안정화와 잡음 저감 수요도 커진다. 자동차가 바퀴 달린 컴퓨터에 가까워질수록 전기를 담고 흐름을 조율하는 MLCC의 탑재량과 중요도는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
덕분에 MLCC 생산 기업의 매출은 급증할 전망이다. 삼성전기의 MLCC 매출은 지난해 4조7100억원에서 올해 6조5100억원으로 38.2% 늘고, 내년에는 8조2400억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추정된다.
무라타 역시 AI용 MLCC 수요를 대응하기 위해서 2027년까지 약 800억엔(약 7500억원)을 투자해 전체 MLCC 생산능력을 20% 이상 확대하고 2028년 이후 추가 신공장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릴 수도 떠넘길 수도 없다…완제품사의 판매가 이중고
메모리값 탓에 제품 가격을 10~15% 이상 올리고도 영업이익에서 고전 중인 완제품 업체들에 MLCC 인상은 달갑지 않다. 사실상 모든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이라 재고를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비자에게 비용을 넘기면 판매가 꺾여 마진이 더 크게 훼손될 수 있어서다.
PC에서는 델과 HP, 레노버가 하반기 15~20% 가격 인상을 예고했다. 가전은 수익성이 최대 화두인 상황에서 범용 MLCC 인상까지 겹치면 내년 이후 2차 인상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진단이다.

최근에는 에어컨과 세탁기, 식기세척기, 로봇청소기에서도 인버터와 센서·통신 기능이 늘며 보드 수와 MLCC 탑재량이 함께 증가해 노출도가 커졌다. 삼성전자는 삼성전기를 그룹사로 두고 있지만 LG전자와 GE 등 다른 가전 기업은 부품 원가 변동에 그대로 노출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입장에서는 가전도 메모리플레이션이고 노트북도 메모리플레이션이라고 하는데 사실 당황스러운 측면이 있다"며 "가전 같은 일부 소비재는 메모리의 여파보다 원자재 공급과 MLCC 등 부품 가격 인상이 적지 않은 몫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빈자리를 누가 가져갈지는 아직 갈린다. 무라타가 범용에서 물러나면 세계 2위 삼성전기가 대체 수요를 흡수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선 나온다. 반면 삼성전기 역시 고부가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재편하고 있어 직접적인 수혜는 제한적일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삼성전기는 AI 서버용 MLCC 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조현지 DB증권 연구원은 "야게오 등 대만 업체가 범용 MLCC에서 충분한 고객 기반을 확보하고 있어 직접적인 물량 이전 수혜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며 "IT 및 일부 전장용을 포함하는 중저가 MLCC 시장의 낙수효과는 중국과 대만 업체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전망했다.
이어 "전장용은 인포테인먼트 등 중저사양 영역과 파워트레인·ADAS 등 고신뢰성 영역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무라타의 일부 생산 중단 결정은 고부가 제품에서는 선두업체의 가격 협상력과 수익성 개선을 강화하고, 저가에서 중급 제품에서는 중국·대만 업체로의 물량 이전을 촉진하는 시장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