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강남 아파트 ‘할인 행사’ 하나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에서 두루 중용됐던 퇴직 관료를 만났다. 그는 정부 정책을 이야기하던 중 “왜 부자가 비싼 집을 싸게 살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강남 집값이 조정되는 현상을 뒤집어 봐야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요즘 ‘강남 집값 하락’이란 제목을 내건 기사들이 쏟아진다. 실제로 한국부동산원 조사에서 강남·서초구 아파트 가격은 최근 6주 연속 하락했다. 수억 원씩 빠진 가격에 급매물이 나오고 있다. 비싼 집에 보유세를 왕창 물리겠다고 예고하니 현금 흐름이 빡빡한 은퇴자를 중심으로 파는 사람이 늘고 있다.
정부는 강남 아파트 매물을 늘리면 다른 지역도 순차적으로 하락할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굴러간다. 한국부동산원 조사에서 강남만 하락할 뿐 전체적인 서울 아파트 가격은 84주 연속 오르고 있다. 전·월세는 말할 것도 없다. 무서울 정도의 주거비 상승세가 수도권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시중에 돈은 엄청나게 풀리고, 공급은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서 그렇다.
올해 상반기 광의의 통화량(M2)은 132조원 늘었다. 작년 상반기에 75조원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추가로 더 풀린 돈만 57조원에 달한다. 57조원은 전국의 모든 가구에 약 250만원씩 나눠줄 수 있는 거액이다. 서울시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57만 채의 집값을 모두 1억원씩 올릴 수 있는 액수이기도 하다. 재건축·재개발이 정체된 가운데 이런 천문학적인 돈이 쏟아지니 강남 집값을 누른다고 해도 주택 시장이 안정될 리 없다.
게다가 강남권 50억원짜리 아파트가 45억원에 거래된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99%는 엄두도 못 낸다. 결국 A라는 부자가 B라는 부자에게 싸게 넘긴 것에 불과하다. 가진 자가 희소 가치 높은 자산을 저렴하게 매입하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셈이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소수의 자산가들을 위한 ‘할인 행사’가 되어버렸다. 강남에서 활동하는 한 세무사는 “강남 집값이 조정되더라도 수년 치 보유세만큼 깎이는 정도에 그칠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며 “강남 안에서 갈아탈 적기로 보고 매물을 탐색하는 현금 부자들이 있다”고 했다.
정부가 부동산으로 소수를 벌주는 데 집착하는 사이 다수의 주거 안정은 뒤로 밀리고 있다. 비유하자면 식량 정책의 초점을 쌀에 두지 않고 캐비아에 두다 보니 쌀의 수급이 망가지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이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니 달래기 차원의 정치적 전시 효과가 필요하다고 여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만의 리그’인 강남에 집중하기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주거 비용을 낮추는 현실성 있는 방안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그래야 다수의 실질적인 효용이 커진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과다한 재정 지출을 자제해서 돈 풀기라도 감속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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