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만원 절도는 징역 3년, 300억 기술유출은 2년 4개월

이기우 기자 2026. 9. 17.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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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 핵심장비 기술 中에 전달
기업 피해 막심한데 되레 감형
재계 “미온적 처벌 이어지면
국가 핵심 기술 줄줄이 샐 것”
/그래픽=백형선

1976년 설립된 페코텍사(社)는 반도체 조립에 필요한 장비 ‘캐필러리’를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납품하고 있다. 캐필러리는 머리카락 5분의 1 굵기인 금속 와이어를 반도체 칩에 연결하는 데 쓰인다. 고대역폭 메모리(HBM) 공정 핵심 장비다. 페코텍은 10년간 300억원 넘게 쏟아부어 기술을 개발했고 현재 세계 캐필러리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페코텍이 개발한 핵심 기술은 중국으로 빠져나갔다. 페코텍에서 17년간 근무하며 중국 공장 부품 생산을 총괄했던 김모씨가 지난해 초 중국 경쟁업체 A사로 이직하면서 핵심 기술이 담긴 파일을 USB에 저장해 무단 반출한 것이다. 이 일로 김씨는 기소돼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지난 5월 항소심에선 징역 2년 4개월로 감형됐다.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 등 한국 기업이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개발한 핵심 기술이 해외 경쟁 기업으로 유출되고 있지만, 기술 유출 사범에 대한 처벌은 너무 가볍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로 인해 국가 핵심 기술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고 재계에선 말한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2016년 설립 직후부터 한국 반도체 인력을 겨냥했다. 삼성전자 부장급 연구원 출신인 김모씨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정 정보를 빼돌리고 2016년 CXMT로 이직했다. CXMT는 김씨 외에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출신 반도체 인력을 잇따라 영입했다. CXMT는 이후 급성장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협하는 D램 업체로 부상했다. 그런데도 CXMT에 삼성 반도체 기술을 빼돌린 김씨에 대한 처벌은 징역 6년 4개월형에 그쳤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140만원을 훔친 50대 절도범에게 상습범이란 이유로 징역 3년이 선고됐는데 국가 핵심 기술을 훔쳐 빼돌린 산업 스파이에겐 이보다 낮은 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5년간 기술 유출 피해액 23조인데… “초범” “기밀 아니다” 잇단 감형

AI(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면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의 핵심 기술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한국이 앞서 있는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경찰이 검찰로 송치한 기술 국외 유출 사건은 2021년 9건에서 2025년 33건으로 늘었다. 5년간 발생한 기술 국외 유출 103건 중 중국으로 유출을 시도한 게 66건(64%)이었다. 유출 대상 기술을 분야별로 보면 이미 산업 주도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디스플레이가 28건으로 가장 많았고, 반도체가 18건으로 뒤를 이었다. 국가정보원은 2020~2024년 발생한 첨단 기술 유출 범죄 피해액을 약 23조원으로 추산했다.

중국 기업에 국내 반도체 기술을 넘긴 김씨는 페코텍 시절 2021년부터 중국 현지 공장에 파견돼 생산 분야를 총괄했다. 하지만 업무 실적이 좋지 않아 페코텍에서 권고사직을 통보받았고, 작년 3월 중국 기업 A사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다. A사는 페코텍이 70%를 점유한 HBM 반도체 관련 장비 ‘캐필러리’ 시장에 새로 진출했다.

김씨는 A사로 이직하는 과정에서 페코텍의 캐필러리 관련 기술을 유출한 혐의를 받는다. 본지가 입수한 김씨 사건 1·2심 판결문을 보면, 그는 A사 이직이 확정된 지난해 2월 말 캐필러리 관련 공정 정보가 저장된 USB를 회사에서 갖고 나왔다. 김씨는 그 뒤로도 페코텍 옛 동료들에게 지난해 4월까지 캐필러리 생산과 관련한 자료를 넘겨받았다. 제품 불량 보고서, 경쟁사 제품 비교 분석 결과, 일일 생산 현황 등이었다. 김씨에게 자료를 넘긴 다른 페코텍 직원들도 퇴사해 경쟁사로 이직하거나 창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지난해 5월 페코텍이 신고해 경찰에 긴급 체포됐고 이후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1월 1심에서 김씨에게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다른 공범들과 함께 증거 인멸을 꾀하는 등 범행 후의 정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5월 항소심에서 김씨의 형량은 2년 4개월로 줄었다. 김씨가 빼돌린 정보 중 ‘일일 생산 현황’ 자료는 페코텍 직원 모두가 열람·인쇄할 수 있었던 자료였다는 점 등이 감형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페코텍 관계자는 “우리 회사의 공정 관리 노하우가 담긴 데다 공개 대상이 관리자들로 한정되고 다른 곳에선 구할 수 없는 자료”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국내 반도체 기업 SKC 기술 유출 사건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 사례로 꼽힌다. SKC 연구원으로 근무한 B씨는 2019년 임원 승진에 탈락했다. 그러자 B씨는 그해 6월 중국 업체와 함께 반도체 웨이퍼 연마(CMP) 관련 사업을 하기로 했다. 중국 기업 산하에 자회사 형태로 공장을 세워 운영한다는 계획이었다. B씨는 이후 관련 기술 공정도 등 SKC 기밀 자료를 휴대폰으로 촬영해 중국 업체에 유출했다. SKC 협력업체 관계자들도 중국 업체로 끌어들였다. 결국 B씨는 범행이 적발돼 기소됐다. 그런데 1·2심에서 선고된 형량은 징역 2년 6개월에 그쳤다.

국가 첨단 기술 국외 유출이 이어지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024년 관련 사범 형량을 최대 징역 18년으로 높였다. 하지만 각급 법원에서 내려진 기술 유출 사범 관련 판결을 보면 페코텍이나 SKC 사건처럼 징역 2~3년에 그쳤다. 이마저도 항소심을 거치며 감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손승우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산업 기술 유출 사건은 피해 액수에 따라 형량이 결정되지만, 기술이 해외로 유출되면 피해 액수를 산정하기 어렵다”며 “이 때문에 기술 유출 사범에 대한 형량이 낮은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술 유출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경찰관은 “기술 유출 피의자 대부분이 초범이란 점도 법원에서 형량을 낮게 선고하는 요인”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중국 창신메모리(CXMT)로 이직하며 삼성전자의 8나노 D램 반도체 공정 정보를 빼돌린 김모씨는 지난해 2월 1심 법원에서 징역 7년에 벌금 2억원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선 형량이 징역 6년으로 줄었고, 파기환송심 등을 거쳐 징역 6년 4개월형이 지난 4월 확정됐다.

업계에선 김씨가 빼낸 삼성전자 기술 자료의 중요도를 감안하면 형량이 가볍다는 지적이 나온다. CXMT는 김씨 말고도 삼성전자 D램 개발 핵심 연구원이었던 박모씨 등을 영입했다. 박씨는 이직 전 삼성전자가 1조60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18나노급 D램 기술을 모조리 필사해 가지고 나갔다. CXMT는 이후 SK하이닉스의 기술도 확보했고 2023년 중국 최초이자 세계 4번째로 10나노대 D램 양산에 성공했다. 검찰은 김씨 등이 기술을 유출해 삼성전자의 2024년 매출액이 5조원 줄었고, 그 뒤로도 국가 경제에 수십조 원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봤다.

이병철 전 삼성전자 부사장(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은 “반도체는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 기술 우위를 갖고 있는 마지막 분야”라며 “기술 국외 유출에 대해 미온적인 처벌이 이어지면 한국 산업에 막대한 도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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